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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무섬마을과 농암종택의 가을

 

환학암

환학암 정자는 환학암 박경안(朴景顔 1608-1671)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후기에 그 의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다

환학암 정자는 내성천 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칸 반으로 평면구성은 전면에 계자각

헌함을 돌린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기단은 시멘트로 마감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어놓았다.

환학암 박경안은 자가 여우이고 호가 환학암(喚鶴菴)으로 풍모와 덕행이 순수하고 고상하여 임천에서

덕업을 쌓고 지냈는데 학사 김응조와 검암 정언숙, 매음 나이준, 원암(遠巖)의 반학정 박경증과 서로 도의로

사귀면서 일찍이 학가산(鶴駕山)의 몽음사와 영주 초곡의 괴정을 찾아서 한때 시를 짓고 그 그윽함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던 선비였습니다. 선생은 산음(山陰)의 구노회(九老會)에 참여했는데 당시 그의 미담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위 사진은 빌려온사진임

왜일자로 다리를 놓지 않고 뱀이 가는 것처럼 구불구불 해놨을까 재료도 더 많이

들어가는데 추측건데 이유는 하나일 것 같다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처음과 두 번째 왔을 때는 관광객이 많았었는데 요즘 두 번 왔을 때는 관광객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것도 코로나 때문이겠지

수도교

이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외나무다리가 세개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나지만 아래쪽에 유실된 것을 방치 했다가 지금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이 외나무다리를 통해서 상여도 지나가고 가마도 지나갔다 한다

모르는 분들은 의아해 하겠지만 상여가 저와 같은 다리를 건너는 것은 본

저로써는 쉽게 이해를 한다

가을이 깊어갈 때인데 아직도 코스모스는 건재하고 있다

까치구멍

까치구멍집은 배연·환기·채광 등을 위한 구멍(일명 까치구멍)이 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여칸(6칸)집으로 평면형식상 겹집이다. 봉당(실내 작은 마당)을 통하여 출입하고, 도적이나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해 외관이 폐쇄적이며 사람과 소가 한 주거공간 내에서 생활하는 인축동거형의

주거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까치구멍집은 안동을 중심으로 영주 및 강원도 남단부까지 미치는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초가로

이 지역의 자영농계층에서 많이 지었던 주택 유형 중 하나이다.

까치구멍집의 평면형식은 방을 온돌로 구성한 ‘온돌중심형’과 앞쪽의 방 한 칸이 마루로 대체된

‘마루중심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무섬마을의 까치구멍집 8개소는 모두 ‘마루중심형’ 겹집과 이를

기본으로 하여 확장된 집들로 공간구성이 조금씩 다르다.

산딸나무

작살나무

무섬마을은 역사가 350년 정도 된 이성동족 전통마을이다. 명당풍수형국을 제대로 갖춘 가거지로 그 형국이

하회마을과 유사하나 물 흐름과 그 형상에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에 자리 잡은 가옥들의 배치 또한

지정 민속마을과 다름은 물론 유사한 형국의 하회와도 다른 궁형의 띠 모양으로 흔치 않은 유형이다.

특히 전통마을의 풍광을 더욱 빛나게 해주고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해 주는 산수가 뛰어난 자연생태 환경이

거의 그대로 보전되고 있음이 돋보인다.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ㅁ자형주택, 까치구멍집, 一자형과 ㄱ자형 집 및

기타 가옥들의 배치 및 평면의 공간구성은 성읍·왕곡·외암 마을과는 지역적 특성을 달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같은 경북 지역의 하회·양동·한개 마을과도 다른 점을 보이는 고유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마을과 주거 민속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무섬마을의 현존 가옥은 ㅁ자형 주택(12개소), 까치구멍집(8개소), 一자형과 ㄱ자형 집 및 기타(15개소)로

구분할 수 있다. ㅁ자형 주택은 안채공간과 사랑공간이 대각선으로 배치된 안마당이 비교적 작은 완전ㅁ자형

뜰집이다. 안방이 익사 쪽으로 세로로 길게 놓이고 안대청에 도장방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이 지역의 특성을 읽을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며, 이들 중 박종우 가옥만 안방을 안대청 쪽으로 가로로

길게 배열하는 안동 지역의 유형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있다.

청퇴정

 

무섬마을은 유교가 성행하던 시대에 조성된 마을로 출산의례를 비롯한 전통적인 통과의례(관혼상제)는 대부분

사라지고 어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제례는 지금도 상당부분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내고 있다.

마을의 집에 사당을 설치하지 않는 것을 관습처럼 이어 왔는데, 이는 홍수의 위험이 있는 지형적 조건으로

조상의 신위가 떠내려가는 윤리적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런 관습은 1923년 선성김씨 종가

김광호 가옥에 사당이 건립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지만 다른 민속마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전통으로

무섬마을의 특이점이기도 하다.

쑥부쟁이

 

무섬마을은 얼마전에 포스팅을 했기에 생략하고 농암종택으로 넘어간다

https://blog.daum.net/kts450/7398591

 

영주무섬마을 2

무섬마을 전경 (빌려온사진) 무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반남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blog.daum.net

주소 클릭하면 마을 풍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농암종택의 있는 가송리의 볼거리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 ‘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전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이다. 이웃에 도산서원, 국학진흥원, 오천유적지, 퇴계종택, 도산온천, 이육사생가

등의 유적이 있다.신비의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곡'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이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가송리는

'공민왕유적', '고산정', '월명담', '벽력암', '학소대' 등의 명소를 감싸안고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 찾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농암 이현보 선생의 종택, 농암종택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농암종택이 있던 곳은 분천마을, 하지만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이후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전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 씨가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으며,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선조가 칭송한 농암의 그다음 적선은 효도였다. 농암은 46세 되던 1512년, 도산서원에서 1㎞가량 아래에 위치한

고향집 근처 영지산 기슭의 귀먹바위(농암) 위에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부모님을 모셨다.

'애일'은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아껴 어버이께 효도하겠다'는 뜻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애일당은 1975년 안동댐 건설 때문에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졌다가 2005년 다시 도산서원 위쪽인 도산면

가송리의 현재 장소에 농암종택과 함께 나란히 이건됐다.정인식님 글에서

67세이던 1533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 농암은 휴가를 얻어 아버지와 숙부, 외숙 외 고을 노인 6명을 초청해

애일당에서 또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른바 '애일당구로회'다. 이를 계기로 1547년 농암이 참여한 '속구로회'가

이어졌고, 20세기 초까지 참석자 수를 9명으로 제한하지 않은 채 '기로회' '백발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경로잔치가 계속됐다. 1602년에 열린 경로잔치의 기록에는 '오천에서 한 평민이 왔는데 나이가 101세라

한다'는 글귀도 있다. 농암이 뿌린 효의 씨앗이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지역사회의 경로문화로 정착된 셈이다.

농암은 또 진퇴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직언했고, 물러날 때는

미련없이 관복을 벗고 표표히 떠난 진정한 선비였다. 벼슬살이 초기 그의 별명은 '소주도병(燒酒陶甁)'이었다.

'겉모습은 검고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고 곧다'는 뜻인데, 이 별명은 사관 시절 그가 연산군에게 했던

직언에서 유래했다. 농암은 대간(臺諫:대관과 간관)들보다 임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말을 듣고 기록할 수 있게

하고, 이조와 병조의 인사 담당 관리들이 직무를 보는 정청(政廳)에 사관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언했다.

사관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연산군은 "신진관료가 주제넘은 건의를 한다"며 농암을 장형에 처했다.

농암은 76세 때 벼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43세 되던 해 지은 명농당 벽에 귀거래도를 그려 붙여놓고 귀거래를

꿈꿔왔으나, 임금의 은퇴 불허로 속앓이를 하다가 33년만에 꿈을 이룬 것이다. 농암이 한양을 떠나던 날 많은

조정 신료가 한강에 나와 그를 배웅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사람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자유로이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중종실록 37년(1542년) 7월 3일의 기사에 적힌 그날의 모습이다. 선비들은 그런 그를 두고 "만족할 줄 아는

뜻이 있다"고 평했다. 농암의 귀거래 의지는 현재 애일당 앞에 세워져 있는 '농암 각자(刻字)'에서 잘 드러난다.

세상일에 귀를 닫고 오로지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뜻이 담긴 이 각자 역시 수백 년 세월의 때가 묻어 자연의

한 물상으로 변해 있었다

농암은 88세 되던 해 "장례는 기한을 넘기지 말고 상사는 간략하고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편히

눈을 감는다. 실록은 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지중추부사 이현보가 졸하였다.

이현보는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는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관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 치우침 없는 객관적인 비평을 최고 가치로 삼는 사관이 한 인간의 삶을 정리하면서

이처럼 허물을 지적하지 않은 것은 드물다.

사랑채 왼쪽은 사랑채 내실

권씨부인이 지은 ‘선반가宣飯歌’는 이 지역에 우리말로 된 노래의 전통이 흘러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국문학계에 주목받고 있다. 내용은 자식이 승진하여 귀향하니 어머니가 기뻐서 노래한 매우

소박한 작품이다.

  

먹기도 좋구나 승정원 선반이여

놀기도 좋구나 대명전 기슭이여

가기도 좋구나 부모 향한 길이여 

안채

사당

긍구당

이 건물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종택에 있던 별당(別堂) 건물이다.

도산면 가송리에 새로 조성되고 있는 농암 유적지내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는 영천이씨의 세거지인

분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도산면 운곡리에 분강서원과 마주보는 곳으로 옮겼다가 최근

새로 조성중인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영천이씨의 예안파(禮安派) 파조(派祖)인 소윤(少尹) 이헌(李軒)이 분천리에 지은 건물로 농암의 아들인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이 중건하였다. 문중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대개 이곳에서 결정하는 등 종택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긍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몸채에다 모서리에 1칸의 온돌방을 덧붙여 ㄴ자형의

집이 되었다. 온돌방은 후면에 두었고 전면 3칸은 모두 누마루로 꾸몄고 마루 끝에는 난간을 돌렸다.

누하부는 목주를 받쳤으며, 온돌방에는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규모가 작고 꾸밈새가 검박하나 전면에

큰 누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는 집이다.

명농당

농암이 관직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연과 함께 생을

보내고 싶다는 ‘귀거래’의 소망을 담고 있는 곳이다.

분강서원

분강서원은 1613년(광해군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현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해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700년(숙종 26)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 5)년에 훼철되었으며,

1967년 옛터 서쪽에 복원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석채례를 행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운곡에 도곡재사 옛터에

서원과 종가를 이건하였다가 지금의 자리에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분강서원의 정문인 유도문

분강서원(汾江書院)

분강서원은 1613년(광해군 5)에 사림들이 농암 이현보 선생을 추모하기위해 건립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복원해오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도산면 운곡리에 도곡재사 옛터에

서원과 종가를 이건하였다가 지금의 도산면 가송리 자리로 종택과 같이 옮겨 왔다.

 

동재인 극복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하던 방

서재  경서재 유생들의 공부하며 기거하던방

서원의 사당 숭덕사

관리동

관리동 대문과 사랑채

애일당

농암 이현보가 연로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애일당. ‘애일(愛日)’은 노부모의 늙어감을

아쉬워하여 하루하루를 아끼며 효도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애일당은 농암이 1512년 연로한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애일당은 집 동쪽 영지산(靈芝山) 기슭의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1508년 가을, 내가 어버이 봉양을 위해 외직

(外職)을 요청해 겨우 영천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영천은 고향과 3일 걸리는 거리인데, 늘상 공무로 바쁘면서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은 달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유감스러운 것은 고향 처소가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릴 만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1512년, 마침내 바위 위에 집을 지었다.

 

명절마다 반드시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때때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드리기를 이 집에서 했다.

그러나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한편으로 기쁘면서 한편으로 슬픈 마음(喜懼之情)이 들지 않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愛日)’이라 했다

 

농암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때때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은 이미

이때 70세가 넘은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던 것이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한다. 이후 선조 임금이 농암가문에 ‘적선(積善)’이라는 대자(大字) 글씨를

하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일당구로회는 이후 농암종택이 400여년을 이어오는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강각은 1544년 애일당 남쪽 분강 강가에 농암이 지은 집으로 여기서 농암의 어부가가 나왔다.

이 집에는 이퇴계, 김안국, 주세붕, 이언적,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 많은 명현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런 좋은 자연환경에서 농암은 농암집, 농암가, 어부가 등 자연을 읊은 것이다.

 

농암 각자

 

농암은 고향 예안의 분천리 분강가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농암은 여기에 어버이의 쉼터로 애일당이라는 초막을

짓고 살았다. 강물 소리 때문에 아래에서 불러도 바위 위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여 ‘귀머거리 바위,

농암’이라 불렀다. 지은이가 이를 호로 삼은 것은 세상 명리에 못 들은 척 살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이 애일당은 그 후 홍수로 유실되자 대를 쌓고 위로 올려 짓고 그 암석에 ‘농암 선생 정자 옛터’라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 이라는 글씨로 4개의 바위에 2자씩 새겼다. 한말 진사 이강호가 쓴

해서체 글씨로 한 글자의 크기가 75㎝가 되는데 이와 같은 큰 암각서는 다른 곳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안동댐 건설로 물속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농암 바위는 그대로 두었고 이 암각서는 글자부분만을 절단하여

1975년 도산면 분천리 산11-1번지에서 분천리 산11-17번지로 옮겼으나, 이후 농암유적지정비사업으로 인해

도산면 가송리 612번지 농암 종택 애일당 앞 강변의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암각

애일당과 강각으로 가는 길

분강서원과 농암종택

농암 가문은 장수 가문입니다.

농암 89세, 아버지는 98세, 어머니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증조부 76세, 고조부 84세, 외조부 93세,

외숙부 두분 93세, 73세, 외사촌 85세, 동생들 91세, 86세, 아들들은 84세, 65세, 79세, 83세, 74세, 74세..

가문 전체 1500년대 평균 연령 80세, 7대 연속 200년간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안동에는 많은 종택과 서원이 있다

퇴계종택, 임청각, 충효당, 양진당(입암고택), 의성김씨종택, 의성김씨귀봉종택, 의성김씨운암종택,

의성김씨제산종택, 도암종택, 우경종택, 고성이씨 탑동종택, 차암고택, 향산고택, 흥해배씨 임연재종택,

무실종택, 전주류씨삼산종택, 정재종택, 노송정종택, 목재종택, 예안이씨 충효당, 예안이씨상리종택,

예안이씨마암종택, 안동송소종택, 지산종택, 진성이씨송당종택, 성성재종택, 간재종택, 주촌종택,

지촌종택, 죽헌종택, 탁정정종택, 가일수곡종택, 안동김씨종택, 안동김씨북애공종택, 안동김씨묵계종택,

안동구봉종택, 원대종택, 풍산김씨종택, 청주정씨종택, 함악고택, 겸와고택, 경당종택, 원주변씨 간재종택,

죽헌고택, 계와고택, 대산종택, 단계종택, 금포고택, 석고고택, 번남고택, 작천고택, 귀존종택, 온계종택

삼백당, 안동허백당종택, 항동고택, 후조당종택 안동권씨부정공파종택, 예천임씨금암리종택,선안동김씨종택,

후안동김씨종택, 이우당종택, 안동제산종택, 광산김씨 유일재고택.....

도산서원, 병산서원, 분강서원, 호계서원, 묵계서원, 역동서원, 화천서원, 타양서원, 고산서원, 임천서원,

청성서원, 용강서원, 봉암서원, 서산서원, 사빈서원, 벽계서원, 창렬서원, 근성서원, 경광서원, 유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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