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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청도 운문사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 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청도군에 속해 있으나 교통 편의상 대구와 생활권이 밀접해 있다. 서기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한 신승(神僧)에 의해 창건되어 원광국사, 보양 국사, 원응 국사 등에 의한 제8차 중창과 비구니 대학장인

명성스님의 제9차 중창불사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180호인 처진 소나무와금당 앞 석등을 비롯한 보물 7점을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로서, 사찰 주위에는 사리암, 내원암, 북대암, 청신 암, 문수선원의 5개의 암자와 울창한 소나무, 전나무 숲이

이곳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이곳은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인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 국사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도량이다.

 

지금은 260여 명의 학승들이 4년간 경학을 공부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 자리한 사찰이다.

(운문산=호거산) 높이 1,188m로 태백산맥의 가장 남쪽에 있는 운문산은 동으로 가지산·남으로 재약산,

영축산 등과 이어져 있어 산악인 사이에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고 있다. 운문산은 산세가 웅장하며 나무들이

울창하여 등산객이 많이 찾는 산이다. 이곳에는 운문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절과 암자가 있고, 주변 경관은

매우 아름답다.

천연기념물 제180호. 높이는 6m 정도이며 가슴높이 둘레가 2.9m로서 가지는 동서방향으로 17.6m, 남북으로

20.3m 정도 퍼졌다.

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반송(盤松)이라고 불려 왔다. 그러나 반송은 원대가 여러 개로

갈라져서 자라지만, 이 나무는 2m 정도 자란 다음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가 맞다.

수세(樹勢)가 좋고 반원형에 가까운 수형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사방으로 처진 가지는 계속하여

밑으로 자라기 때문에 땅에 닿지 못하도록 지주로 받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처진 소나무를 언제 심었는지 그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삽목 전설이 전하고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옛날 호거산(虎踞山) 운문사 뜰 평탄한 곳에 한 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소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또 어느 스님이 절에 잠깐 머물면서 시든 소나무 가지를 땅에

 꽂아 두고 생명을 불어넣는 주문을 외워 살려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운문사에 소나무에 해마다 막걸리를 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막걸리를) 해마다 삼월 삼짇날이면

화엄반 스님들이 맞아 주고 있다.

소나무를 통해 우리 학인 스님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의미 있는 소나무이다.

학인스님 50여 명이 소나무 주위로 둥글게 자리를 잡고 반야심경을 낭송한 뒤 바가지 가득 막걸리를

소나무 뿌리 가장자리에 뿌린다.

수령 400년인 은행나무와 소나무에 공양 올린 막걸리는 12말, 210리터로 50여 년 전부터 이어온 행사다.

운문사에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 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 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 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인종 22년(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원응 국사 비(圓應國師碑)

고려 중기의 승려 원응 국사(1051~1144)의 업적과 행적을 기록한 비.
비석의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어졌으며, 세 쪽으로 잘린 비 몸만 복원되었다.

비 몸은 높이 2.28m, 너비 1.8m. 고려의 명문장가 금강 거사 윤언이(1090~1149)가

비문을 짓고 대감 국사 묵암 탄연(1069~1158)이 썼다.  원응 국사는 고려 숙종 때의 승려로

11세에 입산하여 희 함선사(喜含禪師)에게 학문을 배웠다. 송나라에서

천태 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귀국하여, 예종 17년(1122)에 왕사로 책봉되었다.

인종 22년(1144)에 ‘이 몸은 한 조각구름. 남김없이 흩어지지만 둥구렷한 달 하나 있어

맑은 빛 허공에 넘치리’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93세로 입적하였다.

인종은 국사로 책봉하고 원응이라는 시호를 내려 비를 세우게 했다.

지룡산의 위용 좌측으로 보이는 게 북대암이다

만세루

청도 운문사(雲門寺) 만세루(萬歲樓)는 운문사(雲門寺) 경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규모가 정면 7칸, 측면 4칸의

 “一자형” 겹처마 팔작지붕으로서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이다. 만세루(萬歲樓)는 1,105년(고려 숙종 10년)

원응 국사(圓應國師)가 중창하였다고 전하며, 건립 시기는 최근 대웅전 해체수리 시 발견된 기와 명문과

상량문을 분석한 결과 적어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증된다. 만세루(萬歲樓)는 건축적·역사적 내용이

풍부한 건물이며, 17세기를 전후한 시대적 건축 표현을 담고 있는 점, 그리고 이익 공형식 무고주 7량 가구의

독특한 가구 수법 등을 높이 평가된다.

만세루의 용도는 옛날 북편에 있었던 대웅전을 향하여 법회나 설법 시에 사용하던 건물로 면적은 200여 평이다. 

범종루를 짓기 전에는 종각을 겸하여 사용하였다. 현재는 매년 열리는 어린이 여름 불교학교, 졸업식 등 대외적인

 행사 때 만사 용하고 있다.

 

만세루의 종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세루의 범종은, 범종 위 용뉴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몸통 부분에는 보살상 2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상단 부분에 다라니가 범어로 새겨져 있다.

현재 이 범종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를 주존불로 모신 법당이며,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신 법당을 말한다.

그리고 각 절마다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은 단 하나뿐이다.

 

하지만 운문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보전 현판이 걸린 건물이 두 채 있다. 조선 숙종 때 지어져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1994년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으로 원래는 비로전이다. 하지만 만세루 뒤에 있던 진짜 대웅보전 건물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비로전을

대웅보전으로 고쳐 최근까지 사용해온 것이다.

 

1994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리에 대웅보전이 새로 지어져 현판을 걸고, 옛 비로전에도 제 이름을 되찾아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합의를 하지 못해, 결국 운문사는 사찰 형식에 맞지 않게 대웅보전이란 이름의

법당을 두 채나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자리에 1994년 새로 지었다

 

비로전

비로자나불

비로자나 삼신불회도

운문사 보광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신불회도는 1755년 처일(處一)의 주도로 총 19명의 화승이 모여 제작한 불화이다.

18세기의 삼신 불화는 비로자나와 석가, 노사나를 세 폭으로 나누어 그리는 3폭 형식이 유행하였지만, 이 불화는 거대한

 화폭에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 등 삼신불을 중심으로 여러 권속들을 함께 그린 1폭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물론 1650년에 제작된 갑산 삼신불 괘불탱에서 확인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한 형식이다.

 특히 보살형의 노사나불은 특유의 설법인을 취하지 않고 연꽃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연꽃을 든 노사 불의 수인은 수도사

 노사나 괘불탱(1704년)과 통도사 노사나 괘불탱(1792년) 등 괘불화에서 확인될 뿐 후불도에서 표현된 예로는 유일하다. 

 

이 불화는 18세기 작품 중 삼신불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드문 형식의 삼신불회 도로서 안정된 화면 구성과 균형 잡힌

 인물 표현, 적색과 녹색이 대비를 이루는 차분한 색감 등에서 18세기 불화의 높은 격조를 잘 보여준다.

운문사 비로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

보물 제678호. 높이 540cm. 원래 기단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부 보수되었으며 특히

상층기단의 팔부중상에 새로운 석재가 첨가된 흔적이 남아 있다. 2기의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인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으로, 크기나 양식 면에서 거의 동일한 특징을 보여준다.

하대석은 지대석과 붙어 있는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2개씩 새겨져 있고 그 위를 넓고 편평한 갑석이

덮고 있다.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팔부중상을 1구씩 조각했다.

팔부중상은 손과 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 좌우에는 천의가 날리고 있으며, 뒤에

부분적으로 보수되어 다소 어색한 느낌을 주는 상도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전체 비례로 보아 1층 옥신이 조금 높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표현되어 있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처마 끝이 수평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두 탑 모두 사각형의 받침대 위에 노반·복발·앙화가 놓여 있다.

 오백전

       이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3칸의 팔짱 지붕 건물입니다.  오백전은 원광 국사(圓光國師)가 창건

       하고 보양 국사(寶壤國師)가 중창할 때부터 있었던 전각이라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숙

       종 10년(1105) 원응국사가 중창한 건물이 지금의 취사장 옆에 있었는데, 언제인가 허물어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보처 미륵보살과 우보처 제화 가라(과거세 석가모니 전생 시에 석존에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주심. 정광 불 혹은 연등불이라 함) 보살님과 둘레에는 오백나한님을

 봉안하였다. 건물은 원광국사가 창건 보량 국사가 2 중창, 원응국사가 1105년(고려 숙종 10년) 3 중창을 하고

지금의 건물은 박경호 스님이 후원 쪽에서 이전 개축하였다. 그 후 비구니 금광 스님이 보수와 개체 불사를 하였으며,

 오백나한상 조성연대는 미상이다.

불이문 (부처와 중생은 둘이 될 수 없고 하나라는 불이)

이곳은 스님들의 수도 정진하는 곳 들어갈 수가 없음

작압(鵲鴨)·작압전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 갑사의 유래를 알게 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전면 측면이 모두 한 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한 신승(神僧)이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신비로운 새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본

자리에 이르니 무너진 석탑이 있어서 그 무너진 석조물로 다시 탑을 쌓으니 파편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는

것을 보고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가 깨달음을 얻은 뒤 동. 서. 남. 북에 각각 절을 짓고 중앙에 '대작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를 오갑사(五鴨寺)라고 한다.

 

작압(鵲鴨)이라는 말은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운문사의 전신인 작 갑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작압전은 신승이 발견한 석탑터에 지어진 전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현재의 목탑 형식으로

재건되었다 한다.

석조여래좌상

머리와 높다란 육계에는 나발이 표현되었고, 얼굴은 네모난 편으로 눈·코·입 등이 섬세하지 않고 조그마하게

처리되어 있어 부처의 위엄을 찾아볼 수 없다. 목부분은 거의 표현되지 않아 짧은 편이며 좁은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 주름선이 형식적이고, 밋밋한 가슴 위로는 승각기가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나 불신에 비해 손이 작고 조각기법이 정교하지

못해 투박한 느낌을 준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연꽃무늬와 화염 무늬가 장식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대좌는 특이한 육각형으로 상대석에는 타원형의 앙련이 조각되어 있고, 중대와 하대석은 1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하대석에는 복련이 돌아가면서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전반적으로 양감이

줄어들면서 평면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위축된 자세나 장식적인 광배 문양 및 대좌의 표현 등에서 시대가

다소 내려가는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사천왕 석주

사천왕 석주(四天王石柱)는 운문사(雲門寺) 작압전(鵲鴨殿) 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뒤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 신(方位神)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이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 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 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 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운문사 동호

보물 제208호. 높이 55cm, 입지름 19.5cm, 몸 지름 31cm. 몸체의 어깨 부분에 새겨진 명문인

"咸雍三年六月日改造童海重參拾斤都監大德成念"에 따르면 1067년(문종 21)에 개조되었고 무게는 30근이었다고 한다.

그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감로 준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어 절에서 사용했던 불구의 하나로 추측된다.

몸체는 원통형으로 뚜껑과 높은 굽이 달려 있으며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몸체의 좌우에는 여의두 무늬 모양의

 손잡이 고리가 붙어 있고 뚜껑은 중앙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 위에 연판과 십자형의 화염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의 꼭지가 달려 있다. 지나치고 못 보았기에 빌려 온 사진임

관음전: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 기도하는 신도들이 있어서 내부는 사진을 못 찍었음

명부전:지장보살을 모신 전각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정교하게 잘도 쌓은 돌탑

칠 상각:북두칠성으로 상징되는 칠원 성군을 모신 전각

응진전은 석가모니불과 16 나한상을 봉안하였다. 16 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들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들이다.

본래 응진전은 현재 서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이후 1995년 명성 주지스님이 지금의 위치에 응진전과 조영당을 신축하였다. 조영당에는 원래는 수십 위의

 영정을 모셨는데 일부 불에 타고 파손되어, 지금은 원광 국사를 비롯한 11명의 고승과 운문사 수호에 공이

있는 손긍훈 대장군 , 김식희 대장군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정들의 제작 연대는 미상이나

 1868년에 개채 중수하였다

운문사를 돌아보고 한 번도 들려보지 못했던 북대암으로 왔다

까치밥으로 놔둔 듯 새들이 쪼아 먹은 흔적도 보이고

노박덩굴 열매도 보이고

돌감인 듯 아주 작은 모습의 감

석류 역시도 아주 작아서 볼품이 없다 그래도 가까이 찍으니 작게 보이지 않네

영하의 날씨에도 메리골드도 보이고  코스모스 한송이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북대암에 대한 안내문

장독대가 많기도 하지만 정돈이 아주 잘 되어 있다

지룡산 봉우리들

산신각과 지룡산

북대암

요사채 겸 접견실로 사용하는 듯

북대암의 소각장과 굴뚝 기왓장으로 쌓은 것 같은데 상당히 정교하게 쌓았다

북대암에서 바라본 운문사

북대암에서 바라본 운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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