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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우두산 출렁다리.황산마을 고택.용암정

 

지난해 9월 준공 후 올해 5월 개통식을 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개통이 수차례 연기되어

오다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 전환에 따라 2020년 10월 24일 개통했다.

출렁다리 주변에는 노약자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숲길 무장애 툇마루 산책길(덱로드)을 비롯해 온열치료실,

건강측정실, 다도 체험실을 갖추고 건강관리(웰니스)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는 산림치유센터 등

시설이 있다.  

Y자형 출렁다리는 거창군 가조면 북쪽 해발 1046m 우두산의 해발 600m 지점 계곡 위 세 곳을 연결한다.

국내 최초로 특수공법인 와이어를 연결한 현수교 형식으로 만든 출렁다리는 각각 45m, 40m, 24m로

총길이가 110m에 이른다.

코로나 19로 인해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어 할 수 없이 뒤돌아서야 했다

나처럼 왔다 돌아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경치가 빼어난 우두산

고견사와 Y자형 출렁다리 가는 길

거창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에 황고(黃皐) 신수이가 입향하면서 번성한 거창신씨 씨족마을로, 마을의 생성은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시대 영조 이후 인물이 연이어 배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폭 5m 이상, 높이 15m 이상의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이 고목을 안정좌(安亭座)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은 대체로 평탄하며 마을 동측에 흐르는 호음천을 중심으로 큰땀과 동촌으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내 주택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며 규모와 형식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는 시도민속자료 제17호 ‘거창 황산마을

신씨고가’ 등의 지정문화재는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 전체는 약 50여호로 거의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으며 이렇게 한 마을 전체가 모두 기와집으로

무리지어 있는 것은 이른바 씨족부농촌으로 소작마을을 별도로 두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담 하부 2~3척 정도는 방형에 가까운 제법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진흙을 사춤하지 않고 대부분 메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는 도로보다 높은 대지 내 우수(雨水)를

담 밖으로 자연스럽게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석으로 메쌓기 한 위에는 하부의 자연석보다 작은 20㎝ 내외의 돌을 담 안팎에 사용하여 진흙과

교대로 쌓아 올렸고 대부분 담장 상부에는 한식기와를 이었으며 또한 근년에 쌓은 담장은 기존 담장과

달리 엇쌓기를 하였다.

마을의 시한당 앞 연못은일반적인 한국 전통의 연못양식인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 아닌 원지방도형

(圓池方島形)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특하다. 전반적으로 전통고가와 어우러진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 담장 - 토담길이 약 1,200m의 돌담, 하부가 돌담 구조인 토석담
* 마을형성 - 600년전 형성
* 문화재 - 거창 대정리 신씨고가(경상남도 민속자료 17호) 등 3건

황산마을 거창신씨 상계를 살펴보면 참판공 신기가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4형제

중 막내 신후경과 함께 전남 영암에 정착했다. 신후경은 형제를 두었고, 그중 맏이인

신영수는 3형제(우평, 우회, 우맹)를 두었다.

맏이인 신우평은 거창읍으로, 둘째 신우회는 전암 영암에 남아 있었고, 셋째 신우맹은

황산마을에 첫 정착한 황산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신우맹은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요수 신권, 둘째가 신규, 셋째가 신준이다. 셋째

신준은 외지로 나가고, 신권·신규 두 형제는 조선 연산군 7년(1501년) 황산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후 이 마을은 거창신씨 집성촌으로 번창했고,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수승대 초입에 거창신씨 집성촌 황산마을이 있다. 황산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정자와 정자나무가 많다고

해서 대정리라 불렸으나 1995년 거창군 조례에 의해 황산리로 바뀌었다.

 

황산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7호’로 이름 높다. 황산마을에 들어서면 굽을 길을 따라 끝없이

뻗어 있는 아름다운 흙돌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황산마을의 흙돌담들은 순수하게 흙과 돌로만 축조돼 있다.

이곳은 거창 신씨(居昌 愼氏)의 집성촌으로 주민의 80% 이상이 모두 거창 신씨 종친들이다.

조합장댁

소정댁

석송당은 문이 잠겨있어 내부를 볼 수가 없다

요즘은 이런 까치 집도 어쩌다 하나씩 볼 수가 있다 그 많은 까치들은

어느 곳에 집을 짓고 살까?

국장댁은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나보다

교감댁도 지금 아무도 살지 않고 비어있어 풀만 자라있다

원학고가

황산마을 여러 고택 중 가장 건축미가 빼어난 곳 하나를 들라면 원학고가이다. 원학고가(猿鶴古家).

‘금원산(金猿山) 아래 학(鶴)처럼 사는 이의 옛집’이란 뜻이다.

거창 황산마을 중앙에 위치한 원학고가는 500년 동안 이 터에 자리를 지켜왔다.

요수(樂水) 신권(愼權) 선생의 10세손인 신종삼 선생이 1927년 기존의 집을 헐고 다시 건립해 88년간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명품고가로 ‘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돼 있다.

서부경남에서는 규모가 제일 크고, 보존 상태가 좋다는 원학고가는 현재 박정자 종부가 손수 맡아

집을 관리하고 있다. 주재료가 나무와 흙인 한옥 공간 운학고가에 머물면 안팎으로 소통하는 바람과

온돌에서 나오는 온기가 순환하며 찌든 일상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줄 것 같다.

오늘은 종부가 출타를 했는지 문이 잠겨있다(이사진은 캡처한 것임)

현감댁은 기거를 하고 있는 집이라 깔끔히 정돈되어 있다

종가댁

황강고택은 황산마을의 입향조인 신권의 7세손인 신성진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형식과 특징을 볼 때, 조선시대 후기에서 일제강점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근래에 증개축을 통해 일부 변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변형된 것을 제외하면, 원형을

어느 정도 잘 간직하고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한산댁 역시나 온기가 있는 집이다 말끔히 청소가 잘 되어 있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방문객을 먼저 반기는 것도 담장이다. 흙과 돌로 만든 토석담이다.

자세히 보니 담장 아랫부분엔 흙 메우기 없이 돌만 얹어 놨다.

비가 많은 거창의 지리적 특성을 염두에 둔 조치다.

한번씩 마당을 물바다로 바꾸는 비가 빠져나갈 배수구인 셈. 메쌓기라 부른다.

반면 담장 윗부분엔 돌 틈새를 흙으로 메워 남덕유산의 매운 바람을 막는다. 찰쌓기란다.

고을원댁

 

마을서당으로 사용된 듯

잘정비된 담장

 

 

황산전통한옥마을에서 옛 조상들의 주거생활을 체험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거창은 오래전부터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고장으로 이름난 곳이다. 낮에는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밤에는 황산마을에서 전통한옥체험을 한다면 여름 휴가철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황산전통한옥마을은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에서 가깝고, 인근에 송계사계곡, 거창조각공원,

금원산자연휴양림, 월성계곡, 거창박물관, 화계사, 쌍계사계곡 등의 관광지가 있다.

마을정자에서 바라본 마을 우측 풍경

마을정자에서 바라본 마을 좌측 풍경

용암정은 1801년(순조1)에 용암 임석형 선생이 위천 강변의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하였다. 용암 선생은 석천 임득번 선생의 8세손으로 조행과 학문이 빼어나서

당세와 후세까지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용암정이 준공된 이듬해(1802년 음력 7월 16일) 용암정을

제목삼아서 7언율시를 읊었는데 그 시에서 차운하여 읊은 분으로는 판서 이원조, 대사성 이휘준,

참판 정홍경, 승지 김유헌 등 20여 명으로서 당시 명인들이 모여 학문과 도의를 연마한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마루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자 안에는 용암정, 반선헌, 청원문門,

환학란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반선헌, 환학란, 청원문의 현판은 지암 이동항 선생의

필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암정이 자리한 원학동(猿鶴洞)은 이름 그대로 원숭이와 청학을 상징하는 신선의 세계다.

용암정의 남쪽에는 학담(鶴潭)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천상의 새, 청학이 깃든 못을 의미한다.

환학란은 ‘청학을 부르는 난간’이란 의미로 용암정의 난간을 뜻한다.

 

정자의 서쪽으로는 십이지의 하나인 원숭이를 상징하는 금원산(金猿山)이 우뚝 솟아 있다.

또한 용암정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그 의미의 상징을 금원산으로부터 가져오고 있다.

선계의 동물인 원숭이를 불러와 ‘원숭이의 소리를 듣는 문’이라는 뜻의 청원문이라 이름하고 있다.

그리고 선계에 든 사람을 ‘반려하는 신선’으로 비유하여 이곳 용암정을 신선과 반려하는 집,

즉 반선헌이라 명명하고 있다.

정자는 보통 산수가 좋은 곳에 위치한다. 산이나 언덕, 강이나 호수 또는 바닷가에 자리를 잡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세워진다.

용암정에서도 요수원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보인다. 일반적으로 정자에서 보는 전망 중에

가장 으뜸인 것은 물과 관련된 수경관이다.

본래 정자를 두르고 있는 자연은 산수라 하여 첫째가 산이고,그다음이 물이다.

그러나 실제 정자의 대부분은 계곡, 호수, 강가, 바닷가 등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산보다는 물과 더 친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출처:우리명승기행에서

용암정은 신선이 살고 있는 터전, 곧 신선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계를 나타내는 요소는 용암정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용암정에서 2km 정도 떨어진 위천가에는 신선의 강림 장소라는 강선대(降仙臺)가 있고,

그밖에도 환선대(喚仙臺), 수승대(搜勝臺), 척수대(滌愁臺)와 같이 신선과 관련된 장소들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원학동 전체가 신선이 살고 있는 하나의 동천임을 나타낸다.

거창의 용암정은 삼동천의 하나인 원학동 골짜기에 계곡을 따라 흐르는 위천(渭川)가에 세워진 경승이다.

이미 원학동의 명승으로 잘 알려진 수승대로부터 북쪽 방향으로 1km 정도 올라간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소정천과 남덕유산에서 시작되는 월성천이 북상면 소재지에서 합류되어 위천을

이루는데, 이 위천이 시작되어 수승대로 향하는 작은 계곡을 ‘요수원계곡’이라 한다.

요수원계곡은 말 그대로 산자수명한 골짜기인데 용암정이 바로 이 계곡의 남쪽 언덕 위에 지어져 있다.

안의삼동은 옛날부터 명승지로 유명한 곳이다. 본래 안의현에 속한 세 곳의 동천으로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행정구역이 바뀌어 화림동과 심진동은 함양군, 원학동은

거창군에 포함되어 서로 다른 군으로 분리되었다. 덕유산에서 남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 아래에 자리한 안의삼동은 그야말로 신선이 살 듯한 동천이다.

용암정은 갈계마을에 터를 잡고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지은 정자다.

일찍이 그의 조부와 부친을 따라 노닐던 물가에 놓여 있는 평평한 바위인 용암 위에 1801년(순조 1)

건립한 누정이다. 임석형의 선대는 항상 용암에서 소요하기를 즐겨했지만 끝내 정자를 건립하지

못해 아쉬워했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임석형이 가까운 친척들과 뜻을 합해 용암정을 짓게 된 것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대대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는 풍조가 있었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임석형 또한 출사를 생각하지 않고 요수원계곡의 동천에서 평생 안빈낙도를

즐기며 선유(仙遊)했다

강선대 너머에 용암헌이 있어
仙臺一隔龍巖軒
신선이 타고 우화등선한 수레를 생각하노라
尙憶當年羽化轅
이곳에 만약 학을 탄 손님이 온다면
此必倘來承鶴客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원림에서 늙어가리라
論詩把酒老林園
- 임석형, <반선헌>

정자는 방이 있는 정자와 방이 없는 정자 두 가지로 나뉜다. 방이 없는 무실형(無室形) 정자는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 지방에 많이 지어졌다. 일반적으로 기호 지방의 정자는 환로(宦路)에 있는

인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유상(遊賞)의 목적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와 비교하여 방이 있는 유실형 정자는 호남과 영남 지방에 많이 지어졌다. 영호남의 정자는 대부분

그 안에서 기거할 수 있고 학문을 닦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용암정 또한 정면 3칸, 측면 2칸, 모두 6칸으로 구성되어 후면의 중앙에 1칸의 방을 들여 학문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휘준(李彙濬, 1806~1867)이 쓴 용암정의 중수기를 보면 임석형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그에 따르면 임석형은 학문이 깊고 행실이 발라 당대의 유명한 인사들과 교류가 많았지만 벼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임천(林泉)에서 소요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50세가 지난 후 만년에 들어서면서 선대의 뜻을 소중하게 느끼고 이를 이어가고자 용암정을

짓게 된다. 정자가 지어진 이후에도 이곳에서 그의 자손들은 독서를 하며 학문을 연마했지만 과거에

응시하는 것에는 연연해하지 않았다.

정자에는 대부분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의 편액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자의 명칭이 새겨진 현판이며, 또 하나는 창건기(創建記)나 중수기(重修記) 등 정자에 관한

기록을 담은 편액이다. 셋째로는 정자에서 읊은 시를 새긴 액자다.

그 외에도 특별히 정자의 주인이 지향하는 삶의 의미나 이상(理想), 후손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목표

등을 담은 경구를 새긴 편액이 걸리기도 한다. 용암정에는 정자의 주인이 지향하는 이상을 나타내는

경구인 환학란(喚鶴欄),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이라는 글을 3자횡서로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이를 보면 용암정은 ‘환학, 반선, 청원의 정자’라고 할 수 있다.

이 글들은 모두 신선이 살고 있는 곳, 즉 동천을 나타낸다.

후손들의 가계도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를 파서 세웠다

거창 회림동계곡의 동호정은 저런 통나무계단을 두개를 나란히 세웠던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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