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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심곡서원.신대호수

용인 민속촌이 9시에 개장을 하는 줄 알고 8시반에 갔더니 10시 개장을 한다 해서

다른 곳을 둘러보고 다시 오려고 이곳 심곡서원으로 왔다(5/22)

용인 심곡서원(龍仁 深谷書院)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서원이다.

2015년 1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30호로 지정되었다

 

지정사유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를 주향으로 하며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 후묘 형식을

갖춘 심곡서원은 1605년 건립되어 1650년 사액을 받았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으로, 건립연대와 사액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사액 후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서원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년)를 주향(主享)으로 하는 심곡서원은 강당이 전면에

위치하고 사우가 뒤쪽에 배치된 조선 시대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선조38년(1605년) 처음 건립되었고 효종 원년(1649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광조를 모신 서원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고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최근 이루어진 사우와 강당의 중수 시, 각각 1636년과 1657년에 작성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으며,

심곡서원 강당기(1673년, 송시열)와 심곡서원 학규(1747년, 이재), 숙종대왕 어제(1740년, 민진원) 등이 전하고

있어 심곡서원의 역사와 내력을 알 수 있다.

 

경내에는 조광조가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가 남아 있으며, 정암집 등 관련

고문서가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매년 춘추향사와 매월 삭망(朔望) 분향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아울러, 서원 인근에 있는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제169호)를 통해 심곡서원의

가치와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는 강당은 일소당이라 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에다 부연을 단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약한 흘림을 한 기둥머리에는 간결한 모양의 익공을

구성하였고 칸마다 목판벽과 판자문비(板子門扉)로 벽체를 달아 사면을 모두 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림간의 회합 등 학문의 강론장소로 이용되는 공간입니다. 일소당의 일소는 조광조의

절명시인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에서 한자씩 따왔습니다.

 

옛 속담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했습니다. 급진적 정치개혁을 하고자 했던 정암 조광조(1482~1519)는

훈구파에게는 모난 돌로 여겨져 그를 끝내 사사시키고 젊고 유망했던 정치가는 그만 그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심곡서원은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과 함께 조선의 4대 성현인 정암 조광조를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정암 조광조는 경기도 용인군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함경도에서 ‘무오사화’로 유배중인 소학군자’ 김굉필을 스승으로 모시며 그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총기로 스승을 놀라게 하였으며 사림파인 김굉필의 학통인

성리학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림파의 영수가 됩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갔는데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훈구파들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이 틈바구니에서 중종에게 유교의 덕목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왕도정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합니다.

불교를 미신으로 규정하여 소격서를 철폐할 것을 건의하여 그의 뜻을 관철해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합니다.

또한, 중종반정을 주도하여 공신 반열에 무분별하게 이름을 올린 훈구파의 ‘위훈삭제’를 주도하였고

그러다보니 조광조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정적은 미리 꺾어야 한다며 훈구파들은 조광조 제거작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주초위왕’의 나뭇잎 사건입니다.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는 경빈박씨 등 후궁에게 꿀물로 나뭇잎에

주초위왕 즉 ‘조 씨 성이 왕이 된다’라는 글자를 쓰게 한 뒤 벌레가 갉아먹게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등

그 일파를 모두 투옥해 사사시키지만 영의정 정광필의 만류로 조광조만은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시킵니다.

훈구파는 그의 유배가 부당하다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중종은 끝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 그의 짧은

혁신 정치는 끝나고 맙니다. 처음에는 중종도 조광조를 눈에 들어 하며 각별한 대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펼치다 보니 훈구파의 반발을 사게 되자 중종 또한 그를

멀리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훈구파는 먹이를 입에 문 늑대같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내 중종에게

사약을 내리게하였습니다.

 

조광조는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앞에 두고 절명시를 남겼는데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 주리라“

그 후 그의 죽음은 양팽손이 수습하여 뒷날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조광조는 선조1년인 1568년 신원이 회복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현재 심곡서원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금정산님 글에서

위건물과 아래 건물은 동제와 서제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

 내삼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기둥머리에는 조익공을, 기둥가구는 5량가로 구성하였으며 맞배지붕 옆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하고

옆면 벽의 중방 아래는 화방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광조 선생은 중종 때 사림파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구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16세기 초 연산군의 폭정을 몰아내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중종반정' 이후 새롭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관직에 오른 후 유교로 통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사당

장서각

장서각 내부의 모습

양팽손과 조광조의 사진이 걸려있다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400년 나무둘레 4.7m 수고 19m 지정일 1982.10.15

기묘사화

중종14년 1519년11월 중종 반정을 주도한 훈구파와 신진세력 사림파의 정치적 갈등으로 훈구파 남곤·

심정·홍경주 등에 의해 사림파 조광조·김정·김식 등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그러나 결국 기묘사화는 사림파가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 훈구파 공신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으나, 사림파 정치로 나아가는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부속건물들

토종 쑥부쟁이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500년 나무둘레4m.수고 17m 지정일 1982.10.15

향나무도 그때 심어진게 아닐까?

연당

언젠가는 이 등산로 따라 광교산도 한번 올라 보리라

호수가 두개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신대와 원천이 따로인지는 모르고 네비에 광교호수

입력하니 신대호수주차장으로 안내를해 신대호수만 한바퀴 돌아봤다

 

족제비싸리나무

쌍떡잎식물강 콩목 콩과 족제비싸리속에 속하는 속씨식물. 학명은 ‘Amorpha fruticosa L.’이다.

가지와 줄기를 문지르면 마치 족제비의 항문에서 나는 것과 같은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하여

‘족제비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방공사용 나무로 흔히 심어 왔으며, 현재는 울타리용으로도 심고 있다. 약재로도 쓸 수 있는데,

피부의 습진이나 염증 등을 가라앉히거나 화상을 진정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다.

불안한 신경을 진정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야간에 밝혀줄 조명등 인 것 같다

왕골

1년생 초본으로 종자로 번식한다. 연못가나 습지에서 자라기도 하고 강화도와 남부지방에서 화문석과

돗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재배한다. 밑부분의 마디에서 분얼하여 모여 나는 화경은 높이 100~200cm

정도까지 자라며 둔한 삼각주로서 속이 솜 조직으로 되어 있다. 잎몸은 너비 8~16mm 정도이다.

잎집이 길어 화경의 1/4 정도를 감싸고 연한 갈색이다. 7~8월에 개화한다.

꽃차례는 5~10개의 가지가 갈라져 산형을 이루고 다소 성글게 달리는 소수는 황록색이다

오리들이 먹이를 찾는 것인지 휴식을 취하는 것인지?

줌인해본 이리연

다년생, 부엽성 수생식물. 줄기는 가늘고 수심에 따라 신장. 직경 5-8 ㎜, 길이 150㎝에 달함.

잎은 원형 또는 난원형, 직경 7-20㎝, 기부가 심장형으로 깊이 파임.

거의 전연 엽병은 짧고, 길이 1-3㎝정도, 기부는 줄기를 따라 흐름.

귀모양 잎의 바로 밑의 마디에서 번식아와 화경이 나온다. 아래로 향함.

번식아는 다수, 지향성, 꽃이 핀다음 지면에 닿아서 새 줄기를 낸다.

논병아리

무슨용도인지?

마름

전국의 연못에 흔하게 자라는 한해살이 물풀이다. 세계적으로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분포한다.

줄기는 가늘고 길다. 물속의 잎은 깃꼴로 가늘게 갈라진다. 물위에 뜬 잎은 줄기 위쪽에 모여난다.

잎자루는 연한 털과 공기주머니가 있고, 8-14cm다.

공기주머니는 긴 타원형 또는 피침형이고 잎몸은 난상 마름모꼴이다.

잎 앞면은 윤기가 있고, 뒷면은 잎줄 위에 긴 털이 많다.

꽃은 7-9월에 잎겨드랑이에서 물위로 나온 꽃자루 끝에 1개씩 피며, 흰색이다.

꽃자루는 짧으나 나중에 길게 되며, 겉에 털이 난다. 꽃받침잎, 꽃잎, 수술은 각각 4개, 암술은 1개다.

열매는 핵과이며, 겉이 딱딱하고, 납작한 역삼각형, 검은색, 양쪽에 길이 1.2-1.6cm의 뿔이 2개 있다.

꽃창포

수원 검찰청사와볍원청사

어리연이 군데군데 많이 피어 있네

날씨도 좋으니 인증도 한번 해보고

호수주변에 가막살 나무가 많이 있어 지금 꽃을 피우고 있다

가막살나무

가막살나무는 인동과의 낙엽 관목으로 산기슭에서 자란다. 키는 1.5~3m가량이다.

5월에 갈색을 띤 하얀 꽃들이 가지 끝에 모여 피며,팥만한 열매는 9~10월에 빨갛게 익는다.

잎은 마주나는데 둥글거나 타원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이다.

울타리나 땔감으로 많이 이용하며 관상수로도 좋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과 중국 ·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신대저수지 수류발생장치

저수지 상류 정체된 수역에 수중 분사펌프에 의한 수류를 발생시켜 교반및

산소공급 작용으로 하부의 혐기성화방지 영양염류 용출을 억제하여

수질 악화를 예방한다

붉은 꽃창포와 어리연

타래붓꽃?

너무 많아 천대받는 꽃 개망초

수레국화

신구가 공존하고 있는 갈대

벌써 반환점에 거의 도달했다

부근에는 수련이 많이 피;어 있다

나무해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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