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골짜기에 위치한 미리내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신부가 되었다가
병오(1846년)박해 때 순교한 김대건 신부(교명 안드레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향 카네이션
비덴스
비덴스 페룰리폴리아(Bidens ferulifolia )는 멕시코 및 중앙아메리카 원산의 국화과(Asteraceae)식물이다
한해살이풀이지만 제주도 등지에서는 겨울나기가 가능한 여러해살이풀이다.
유통명은 비덴스, 바위랜드, 바이랜드, 바이덴스 등으로 불린다.
영명은 Apache beggar-ticks, bur-marigold이다. 높이 45~60cm까지 자란다.
줄기는 곧게 자라면서 옆으로 뻗고 풍성하게 자라며 밑 부분에는 공중뿌리가 나오기도 한다.
잎은 마주나고 2 회 깃꼴로 깊게 갈라져 있으며 쑥갓처럼 가늘고 골이 깊은 모양이다.
꽃은 5~10월에 선명한 노란색으로 꽃대 끝에 한송이씩 달려 핀다.
꽃크기는직경 약 3~4cm정도이고 꽃잎은 5~8장으로 긴타원형이며 끝이 얕게 패여있다.
꽃대가 지속적으로 올라와 개화기가 길어 오랜기간 동안 꽃을 볼 수 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종교탄압 속에서도 신앙심을 지키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 들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주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며 살았던 곳이다.
이 성지에 미리내 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피운 불빛이 깊은 밤중에 보면 은하수처럼
보인다는 것 때문이었다. 26세의 나이에 생을 마친 성 김대건의 일생은 짧았으나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 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거목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김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 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1829-1921년)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 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주교의 유언대로 그를 김 신부의 옆자리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 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던 것이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한다.
그리고 미리내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어서 김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됐다가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지난 1972년부터 시작됐다. 성모 성심 수도회와 천주 성삼 성직 수도회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해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이 완공됐다.
1980년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였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이 건축되었다. 제대에는 김대건신부님의 비골(종아리뼈)이 모셔 져 있고,
2층에는 박해당시의 성구형틀이 전시되어 있다.
경당에는 현재 모두 여섯 분의 묘소와 함께 김 신부의 하악골(아래턱뼈)을 모셨다. 다른 유해는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성신 교정) 성당 안에 안치돼 있다. 김 신부의 묘역에는 한국 천주교의 3대
주교인 페레올 주교님과 미리내의 첫 주임신부인 강도영 신부, 최문식 신부 등의 유해가 석관 속에
안치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 경당
김대건 신부 묘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거두어준 이민식의 묘
김대건 신부 어머니 울술라의 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
기념성당내부
기념성당 내부제대
기념성당 2층에는 김대건 신부의 하약골(아래턱뼈)이 전시돼 있다는데
올라가 보지 않아서 빌려온사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상
성(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였다. 김대건은 1821년 충남 당진군에서
신앙심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3년, 15세 때 조선인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 신부 모방의 눈에 띄어 신학생으로
중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1844년 12월에 부제품을 받았고 이듬해 8월 상해 보근 김가항(金家港)
신학교 성당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45년에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비밀리에 입국하여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며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신분이 탄로나서 체포되고, 신부가 된 지 겨우 1년이 되던해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김대건 신부는 '사학죄수'라는 죄목으로 칼을 맞고 죽었다. 김 신부가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돕던
이민식(당시 17세) 소년이 관리들 몰래 죽은 성(聖)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을 미리내까지 옮겨왔다.
200여 리나 멀리 있는 이 곳에 와서 1846년 10월 30일 자기의 선산인 지금 김대건 신부의 묘 자리에
시신을 모셨다.
1901년 5월 18일, 성(聖)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 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1928년 9월 18일에는 김대건 신부 묘 뒤편에 작은 건물을 세우고 이후 성 김대건 신부의 석상과
미리내 성당을 세우는 등 성지의 모습을 갖추어 왔다.
미리내성지 묵상의 집(원장 정춘자 수녀)은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오후 5시30분부터 다음날 오후4시께까지
월피정을 실시하고 있다. 월 피정 주제와 프로그램은 매월 조금씩 다르지만 연중 큰 흐름은 '회개와
용서'에 맞추고 있다.
묵상의 집은 미리내성지를 찾은 이들이 가정 문제나 정신적·육체적 문제로 힘들다며 쉬면서
피정할 수 없느냐고 문의해 오면서 이들을 위해 4년 여전부터 월피정을 시작했다. 고통받고 상처입은
이들은 피정에 참가하면서 위로를 받으며 자신과 화해하고 상처 준 이와 화해하며 힘을 얻고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피정 참가자들은 개인을 비롯해 부부, 모녀, 소모임 회원 등 다양하다. 피정 프로그램은 크게 강의와
참회예절, 성체조배, 성지와 연결된 십자가의 길, 성 김대건 신부 경당과 묘소 참배 및 유해 친구(親口),
묵주기도 등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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