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대전

예산 대원군 부친 남연군묘

전에 덕산 도립공원에서 야영을 했지만 바로 부근에 있던 남연군묘는 몰라서

지나치고 말았는데 아산까지 왔으니 외암 민속마을에 들렸다가 온양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에 남연군 묘로 왔다

남연군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높은 언덕에 반구형 봉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앞에 석물과 비석이 서 있다.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것을 1846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이하응은 풍수지리설을 믿고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하여 지사(地師)인 정만인(鄭萬仁)에게

부탁하였다.

지사는 전국을 두루 살펴보고 이곳을 ‘두 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二代天子之地]’라고 지목하였다.

이곳에는 본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묘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으나, 대원군에 의해 폐사되고

남연군의 무덤이 옮겨졌다. 이장한 7년 후 차남 명복(命福)을 낳았다. 철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종손이었던

명복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 뒤 1866년(고종 3)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패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E.J.)가 미국인 젠킨스(Jenkins,F.)를

자본주로, 프랑스 선교사 훼론(Feron)을 통역관으로 삼아 백인 8명, 말레이지아인 20명 등 약 100여 명의

중국인 청년을 무장시켜 4월 18일 홍주에 정박하고 고덕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러시아 병사라고 속이고 남연군의 무덤을 훼손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엄히 하였다.

이 무덤을 파헤친 사건은 국내외로 커다란 비난을 받았다.

무덤 주변에서는 조선시대 기와가 많이 나오고, 또 탑을 파괴할 때 백자 2개와 단차(團茶) 2덩이, 사리도 3개가

나왔다고 한다.

남연군 묘주위에는 가야사 박굴작업이 지금 진행중에 있다

세도정치 아래에서 난봉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이하응은 당대의 풍수가 정만인에게 장차 앞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차령산맥 중에서도 명당이 많은 가야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산땅에 만대를 거쳐 영화를 누릴 곳과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가 있는데, 부친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하시오.”
대원군은 그곳에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묘를 쓸 명당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봉분을 모셔야 할 자리에는 석탑이 있었다.

야심에 사로잡힌 이하응은 권세를 이용해 1840년 가야사를 불태우고 석탑을 부순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남연군묘 풍수지형은 다음과 같다.
소백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속리산을 거쳐 차령, 청양의 백월산, 홍성의 대월산으로 이어져 가야산이

만들어지고, 이어 그 줄기는 북쪽으로 뻗다가 몸을 돌려 가야산을 다시 돌아보는 가운데 한 맥이 서쪽으로부터

내려와 만든 명당이다. 남연군묘의 좌향은 해좌사향으로 남동향이고, 물은 백호자락에서 득수(得水)하여

우수도좌(右水倒左)로 혈을 감싸주면서 좌측 을진(乙辰)방위로 거수(去水)된다. 주산인 석문봉과 그 좌우에는

가야봉이 천을(天乙)이 되고 옥양봉이 태을(太乙)이 되어 각각 혈을 호위하고 있다. 또한 오른쪽의 백호(白虎)는

금성과 목성의 산들이 연이어 뻗어 혈을 감싸며 수구를 막고 있고, 청룡(靑龍)은 목성의 산들이 서로 이어져

역시 혈을 감싸며 백호의 끝자락을 겹쳐 감싸니 수구를 완전 관쇄(關鎖)하고 있다.

이곳의 풍수지형은 한마디로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주위의 산들은 마치 만조백관이 혈을 향해 절하는

모양 같으니 가히 천자지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완벽한 터가 없듯이 이곳에도 흠은 있다.

청룡이 몽둥이를 들고 묘를 향해 공격하는 듯 머리를 내밀고 있고, 백호 쪽은 청룡보다 높고 크며 각각의

모습이 뛰어나 청룡을 압도하고 있다.

남연군 묘 뒤로 보이는 가야산

저위 상가 저수지에서 야영을 한 것 같은데 어찌 여기 남연군 묘를 못보았을까

가야사지는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옥양봉 남쪽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한때는 예산 수덕사보다

융성한 절로 알려졌다.

현재 고려~조선시대 중복 조성한 건물지 9동 및 담장 2기 등이 확인됐고 사찰이름을 가늠할 수 있는

‘가량갑사’(加良岬寺) 명문기와, 치문편, 곱새기와, 마루 암막새, 연화문․귀목문 수막새 및 당초문․

귀목문 암막새 등이 출토됐다.

덕산면 상가리 미륵불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돌기둥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미륵불로

불리지만 형태로 볼 때 관세음보살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머리에는 풀과 꽃무늬가 장식된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얼굴은 길쭉하며 양 볼에 두툼하게 살이 올라있다.

왼쪽 어깨를 감싸며 입은 옷은 선으로 새겼으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양팔은 몸에 붙인 채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었고 왼손은 손바닥을 배에 대고 있다.

이 불상에 표현된 양식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이런 유형의 불상은 충청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7월19일 새벽 비가 내리더니 동녁이 밝아오면서 무지개가 떴습니다

데레사님 동네는 쌍무지개가 떴던데 여기는 새벽에 이렇게 가까이에

떠서 전체를 못담고 부분으로 담았습니다

 

'충청.대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숭산 수덕사  (0) 2021.08.16
윤봉길의사 기념관  (0) 2021.08.13
아산 외암 민속마을  (0) 2021.07.07
진천농다리와 초평저수지  (0) 2021.06.29
예산호 출렁다리  (0) 2021.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