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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덕숭산 수덕사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

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

천왕문‧금강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코끼리석등

중국의 승려.

본명은 계차(契此)인 중국의 승려인데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찡그리며,

배는 늘어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포대화상의 환한 미소를 보니 잠시라도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중국에는 사찰뿐이 아니고 관광지에가도 포대화상이 많이 있다

황하정루

원담 진성스님 글씨라고 한다

수덕사 대웅전(국보 49호 이다)

대웅전은 안동 봉정사 극란전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다음으로 예산 수덕사 대웅전이 3번째로

오래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수덕사 대가람은 임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으나대웅전만 살아남았다. 

괘불掛佛이란?

괘불은 ‘걸 괘掛’와 ‘부처님 불佛’자를 써서, 걸어놓는 부처님 그림이라는 뜻이다.

괘불은 보통 5, 6미터에서 크게는 14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걸개그림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약 80여 점 남아있다고 전하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여 한번 움직이는 데

장정 20여 명 이상이 필요하다. 이렇게 큰 크기의 대형 불화를 대대로 조성하여 다량 보유하고

있는 전통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다.

수덕사 노사나불 괘불탱

 높이 10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초대형 괘불이다.

거대한 노사나불이 정면으로 서서, 양 팔은 접어들어 손바닥을 위로 가게 손목을 꺾어 양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설법인’의 수인(손모양)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장대한 몸은 다채로운 영락 구슬로 아름답게 장식되었습니다. 머리에 쓴 보관에서는 신비스러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그 끝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몸에서는 빨강, 노랑, 파랑, 초록,

하양의 오색찬란한 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부처님 양 옆으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등 온갖 보살님들이 모두 출동하였다.

 

그림 상단 양쪽으로 십대제자, 그리고 하단 양쪽 가장자리는 사천왕이 나뉘어 그려져 있다. 주존 부처님을

협시하는 보살·제자·천왕 등의 구성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 영산회상의 협시 군중을 아우르고 있다.

그러니, 노사나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기도 합니다. 또 보관 한 가운데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얹었으니, 비로자나-노사나-석가모니의 삼신(三身)이 모두 상통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에는 법고각과 범종각이 따로 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무스카리.우단동자.인동덩굴.자란

하설초Cerastium tomentosum

Cerastium tomentosum (snow-in-Summer)은 초본 꽃식물이며 Caryophyllaceae 계통의 일원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tomentose"또는 펠트 잎에 의해 그 속의 다른 종과 구별됩니다.

유럽의 고산 지대에 서식하는 낮고 퍼지는 다년생 식물입니다.

줄기와 잎은 은회색이고 꽃은 별 모양이며 흰색이며 지름은 약 15mm입니다.

꽃 클로즈업상록수로 자라며 자라나는 다년생 초본 식물로 성장 높이가 15 ~ 30 cm (드물게 45 cm)에 이릅니다.

전체적으로 빽빽하게 털이 있습니다.

​잎은 길이가 30mm에 달하고 선형에서 피침 형이며, 비단, 은빛, 곱슬곱슬하고 얽힌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으며

흰색 펠트처럼 형성됩니다.

꽃차례는 최대 15 개의 꽃으로 구성됩니다. 꽃받침의 길이는 5 ~ 7mm입니다.

꽃잎은 흰색이고 꽃받침 길이의 두 배입니다.

캡슐의 이빨은 약간 바깥쪽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개화기는 북반구의 5 ~ 7 월이지만 연중 다른 시기에도 개화 할 수 있습니다.

저아래에는 선수암과 극락암이다

견성암 오르는 길에 늦둥이 금낭화

견성암

비구니들의 정진도량 일엽스님이 기거하던 곳

                               ■ 일엽스님은 … 

              1896년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수료하고 도쿄(東京) 유학을 다녀온 개화기 최초의

              여류 문인. 신여성운동을 주도하여 세상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으며 여러 번의 결혼과 실패,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창한 여성해방운동가였다.

 

              일세를 풍미하던 신여성이던 그는 1923년 수덕사에서 만공선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한 뒤 1933년 금강산

              마하연에 주석하던 만공스님을 법사로 금강산 서봉암에서 출가, 당대 최고의 인텔리 여성 김원주는

              근대 비구니계의 최고봉 일엽(一葉)스님이 된다. 일엽스님은 “성품을 백련과 같이 한 후에야 비로소 산문을

              나가 중생을 교화하라”는 스승 만공스님의 유지에 따라 만년에 이르기까지 절필하고 줄곧 禪과 수도에만

              전념했다. 특히 견성암 입승을 맡아 30년 동안 한 번도 산문을 나가지 않고 장좌불와하는 등 보통

              선객으로는 감히 흉내내기 힘든 용맹정진을 몸소 보여주었다.

 

              또한 덕숭총림 비구니 선원 건립 등 불교중흥을 위해 앞장서고 말년에는 유려한 문체로 중생교화를 위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를 펴내 세인들의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청춘을 불사르고’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출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급속도로 많아졌다.

 

              스님은 당신의 입적을 예견했는지 1970년 4월 마지막 생일날 ‘일생에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라는

              게송을 남긴다. “일생에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요/ 영겁에 얻기 어려운 이몸이라/ 태어나 험한 길 거쳐

              이 산에 이르니/ 오늘에야 문득 옛 근심 잊노라.”

              일엽스님은 1971년 1월28일 세수 76세 법랍 38세로 스님이 설립한 덕숭총림 비구니 총림원에서 열반했다.

              스님의 영정과 추모탑이 덕숭산 수덕사 환희대에 모셔져 있다.위의 글들은 모셔온 것입니다

견성암 부속건물들

견성암의 역사

견성암은 1890년대의 암울했던 구한말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이신

 만공 큰스님의 주관하에 비구니 도흡스님의 시주와 여러 대중들의 동참으로

지금의 정혜사옆 토굴 터에서 선원으로 시작

1965년 2대 방장 벽초 큰스님과 견성암 대중스님들의 발원으로 지금의 위치에 터를 다지고 돌을 다듬어서

인도식 지상 2층 건물로 중창, 그 이후 지붕에 기와를 얹어 한국 가람의 형식으로 보완

해마다 하안거/동안거에는 100여명 선각스님들이 운집하여 깨달음의 등불을 밝히기 위해서

좌복을 도복삼아 치열하게 정진하고 있습니다

 

견성암 뜰에 있는 처진소나무

만동탑..만공스님의 사리탑이다만공 대선사는 경허 큰스님의 제자로
초기 한국 불교계 큰 공적을 남긴 큰스님이며 수덕사 중창하였고 괴짜 스님이다

 

예산 수덕사 만공탑은 만공스님(1871~1946)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7년에 세운 석탑으로 전통적 승탑

형식을 탈피한 근대적 기념탑이다. 육각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세 개의 기둥을 평면

Y字형태로 세운 후, 그 위에 구체(球體)를 올려놓았다. 기둥 세면의 빈 공간에 오석(烏石)으로 면석을 조성한

후, 정면에는 ‘만공탑’, 좌우측면에는 ‘世界一花’(세계일화), ‘百艸是佛母’(백초시불모)를 비롯한 만공스님의

친필과 행장(行狀), 법훈(法訓) 등을 새겼다. 탑 주위에 두른 육각의 돌난간은 후대에 만공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만공탑은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만공스님의 사상과 불교 교리를 상징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고, 각 부재의 구성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어 근대기 사찰 조형물로 가치가 높다.

만공스님이 만든 미륵불 만공스님의 유적이다

 

 

이곳은 일엽스님께서 만년에 기거하다 입적하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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