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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윤봉길의사 기념관

 

예산에서 북서쪽 23km 지점에 위치한 충의사는 일제강점기 독립 투사인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농촌계몽과 애국정신을 고취한 곳으로, 윤의사의 의거와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립되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의 애국충정을 기념하는 매헌 문화제가 열리며 윤의사의 귀중한

유품은 기념관에 전시되어 보물 제 568호로 보호되고 있다

충의문

윤봉길의사의 늠늠한 모습

배용순여사의 묘지와 주변의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윤황 공과 김원상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며 학교를 자퇴하였다.

18세에 야학과 농촌운동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하였고, 19세에는 부흥원을 건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 23세에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말을 남기며 중국으로 망명하여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그 사흘 후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 의거를 결행했다.

거사를 성공시키지만 그 자리에서 체포되고 일본 가나자와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거 당시 소지했던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갑, 회중시계, 도장을 비롯해 의거에 사용된 물통형

폭탄과 자결용으로 준비했던 도시락형 폭탄 등 28종 56점의 유물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부흥원(復興院)

부흥원은 윤봉길 의사가 문맹 퇴치를 위해 세운 교육 기관이다.

윤봉길 의사는 한 청년이 글을 몰라 공동묘지 팻말을 모두 뽑아 들고 와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한 사건을 계기로 농촌 계몽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한당의 사랑방에서 야학당으로 시작하였고 점차 인원이 늘면서 부흥원을 세웠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 전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글을 남겼다.

윤봉길 의사가 국외독립운동 중에 어머니에게 쓴 편지.

홍커우 의거를 감행하기 2일전 홍구공원을 답사하여 지은 그의 유작시.

 1932.04.29 홍커우 공원 의거에 사용된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폭탄.

흔히 도시락폭탄이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때 사용한 것은 물통형 폭탄이다.

윤봉길은 실로 단순한 독립지사가 아니라 신학문과 구학문을 두루 익혀 현실에 접목하려던 선각자였고

농민계몽에 앞장섰던 운동가였으며, 일본의 노예가 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살랐던 충의지사였다.

그의 의거는 단순하게 적의 요인 다수를 살상했다는 소극적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있던 항일투쟁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중국정부와 함께 항일연합전선을 펼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비견될 만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쾌거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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