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곰내연밭과 용연폭포
데미안2
2021. 7. 15. 08:19
며칠 전에 하이얀님께서 곰내 연밭에 다녀온 사진을 올렸기에 그렇지 않아도 용연 폭포가
이번에 내린 비로 물이 많을 것 같아 한번 가보려든 참인데 잘 됐다 싶어 옆지기하고
휴일 오후에 출발을 했다
연밭으로 들어가려는데 어찌나 개망초가 많은지 먼저 눈 맞춤을 해본다
빠른 것은 진즉 피었고 지고 있지만 대체로 이제 꽃대가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여기는 철마에서 정관으로 넘어가는 구도로 곰내재 바로 아래에 있다
지금은 바로 아래에 터널이 뚫려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인데 오늘 연꽃을 보기 위해
많은 차량들이 길거리에 주차되어 있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지저분한 연못에서도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마치 사바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고 여겨진다.
또한 무명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취되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잎을 야뇨병 치료에 사용한다. 뿌리는 강장제로, 열매는 부인병 치료나 강장제로도 사용한다.
연뿌리를 달인 물은 입안 염증이나 편도선염에 좋고 연뿌리의 즙은 폐결핵·각혈·하혈 치료에 좋다.
이외에 씨는 정력보강에 이용된다. 땅속줄기인 연근은 아스파라긴(asparagine), 아르기닌(arginine),
레시틴(lecithin) 그리고 많은 녹말을 함유하고 있다.
연꽃에는 아름다운 10가지의 의미가 있으니 그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염오(離諸染汚)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그 잎과 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즉 주변의 잘못된 것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
불여악구(不與惡俱)
물이 연꽃에 닿아도 흔적을 남기지않고 그대로 굴러떨어진다.
즉 주변에 어떠한 나쁜 것을멀리하고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
계향충만(戒香充滿)
물속의 더러운 냄새도 연꽃이 피면 그 더러운 냄새는 사라지고 연꽃의
향기로 연못을 가득 채운다. 즉 향기 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
본체청정(本體淸淨)
연꽃은 어떤 곳에 있어도 그 연잎은 푸르고 꽃잎의 색은 아름답다.
즉 깨끗한 몸과 마음을 간직하라는 의미
면상희이(面相熹怡)
연꽃은 잎의 모양이 둥글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한다.
즉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며 인자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
유연불삽(柔軟不澁)
연꽃의 줄기는 연하고 부드러워 강한 사람에게도 잘 꺾이지 않는다.
즉 남의 입장을 이해하여 융통성있고 유연하게 살아가라는 의미
구자개길(具者皆吉)
연꽃을 꿈에 보면 길한 일이 생기니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다.
즉 좋은 일 길한 일을 하도록 인도하라는 의미
개부구족(開敷具足)
연꽃은 피고 나면 반듯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으로 즉 선행을 많이 하여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의미
성숙청정(成熟淸淨)
연꽃이 활짝 피면 그 색이 정말 곱고 아름다워 그 연꽃을 바라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즉 몸과 마음이 맑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
생기유상(生己有想)
연꽃은 어린 싹이 날 때부터 달라 꽃이 피지 않아도 연꽃인지 알 수 있다.,
즉 누가 보아도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초이님 글에서
몇 백 년은 됐을 것 같은 우람한 소나무
아직 미완성 이지만 몇송이 연꽃이라도 볼 수 있어 위안을 삼고 지난번 많은 비가
내렸으니 폭포 물이 풍부할 것 같은 용연폭포로 가보기로 한다
홍류동천(虹流洞川)을 이렇게 썼나보다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깊은 산골이 아니지만 그래도 폭포가 형성되는 곳인데 이번 비로 물이 풍부해
시원한 폭포를 볼 수 있어서 찾아온 보람이 있다
저 위에까지 담아야 되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기에 이렇게만 담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시원한데 물놀이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시원할까?
홍연폭포를 찬양한글 같은데 해석불가
이렇게 둘이 나왔는데 바로 집으로 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동해안 죽성 드림세트장에
들렸다 가기로 의견일치 월전마을 네비 찍고 고~싱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아 당파싸움에 휩쓸려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19년 동안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았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고집과 칼날 같은 성품을 지녔지만
백성을 아끼는 따뜻한 인정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윤선도는 서울에서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였고
고조부인 윤효정은 전라도 해남에 넓은 땅을 가진 대부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난한 백성을 보살피기에 앞장섰는데, 생활이 어려워 세금을 내지 못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대신해 여러 번 세금을 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윤선도는 여덟 살 때 숙부인 관찰공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를 어여뻐한 숙부는 그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고,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깊은 산속의 절에
머물게 하며 학문을 닦을 수 있게 했다. 외로운 산속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그는 자연을 살피고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학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해 26세 때 진사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고산 윤선도와 그의 시비
그러나 당시 조정 상황은 어지러웠다. 이이첨 일파가 광해군을 에워싸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단념했다. 그가 이렇게 단칼에 벼슬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호 가문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대담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이첨의 횡포와 영의정 박승종, 왕비의 오빠인 유희분이 국정을 그르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문을 미리 본 이이첨 일파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선도를 죄인으로 몰아
변경 지역인 경원, 기장 등으로 유배를 보내고, 그의 양아버지 윤유기도 관직에서 추방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짓는 등 조용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자 윤선도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인조는 윤선도를 의금부 도사에 임명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고향인 해남에서 지냈다. 1628년(인조 6)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추천을 받은 그는 왕자들의 교육에 전력을 쏟아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호조 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 문학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거쳤지만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가
눈엣가시였던 우의정 강석기의 시샘을 받아 경상도 성산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는 현감직마저 박탈당했지만 그는 해남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해남의 젊은이와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왕자와 왕족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청나라에 함락된 뒤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위사진은 빌려온 사진임
오우가(五友歌)
고산 윤선도
나의 벗이 몇인가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동산에 달이 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수 (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 서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 뿐인가 하노라.
석 (石)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빨리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다가 누르는가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 뿐인가 하노라.
송 (松)
더우면 꽃 피우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 서리 모르는가
구천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
죽 (竹)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곱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월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한 것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그러나 항해 도중 들렀던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落書齋)라는
정자를 세워 이곳을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그가 병자호란으로 고초를 겪은
임금에게 문안도 드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를 다시 영덕으로 유배 보냈다.
1년 정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보길도로 돌아와 시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다.
그 후 그가 가르쳤던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보길도에서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죽성항과 등대 저 앞에도 나리가 군락을 이루고
작은 해안마을에 세워진 이 성당은 2009년 방영 됐던 드라마 ‘드림’ 촬영지로 유명하다.
이 곳 기장의 죽성성당은 사실 진짜 성당이 아니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지어진 이른바 촬영용 스튜디오.
그 때문에 드라마의 이름을 따 드림성당이라는 별칭도 있다. 비록 진짜 성당이 아닐지라도 성당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 때문에 드라마가 종영된 후에도 죽성성당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황학대 바위 틈에 피어 있는 참나리
황학대는 참나리가 군락을 이루고 많이 피어 있다
월전 앞 바다 바위섬 물이 빠지면 이렇게 드러난다
휴일 날이라 길거리에 주차해둔 차량 때문에 진행도 어렵지만
주차할 곳도 마땅찮다
어촌 마당에 잠시 주차하고 주위를 촬영도 해본다
예전에는 저길로 대변항까지 많이도 다녔는데 사상으로 이사온 뒤에는
잘 와지지 않는다
역시나 주말에는 동해안에도 주차장 마다 만차 대중교통 이용해서 트레킹 하는 것이
가장 편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