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부산

2021년 8월9일의 하루일상

아침에 4시반에 기상 간단하게 간식 챙겨먹고 5시에 파크골프 구장으로 나간다

전날밤 안전문자는 200mm 물폭탄이 터질 거라는 예보 그러나 밤에 소나기 조금 내리고

더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백양산 자락에 구름만 오락가락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남쪽의 엄광산과 구덕산 승학산에도 하얀구름이 낮게 떠가는 것을 보니 비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아침 6시가 되니 파크골프 동호회원들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한다

구름은 이동을 하지만 간간히 보이는 하늘은 푸르기만 하고 공기도 무척 맑다

평소때 같으면 저기 보이는 김해 신어산이 흐미하게 보이는데 오늘은 선명하고도 가깝게 보인다

이렇게 2시간 반 동안 옆지기와 63홀 돌고 옆지기 출근 때문에 집으로 왔다

어제 산악회회원과 양산 구불사 가기로 약속이 돼서 집에서 9시 반에 출발 구포역에서 만나 구불사로 왔다

구불사는 양산 석계에서 석계공원묘원 쪽으로 3~4km 지점에 있다

원의 의미는?

선종 혹은 선종에 속하는 사원이나 승려들은 둥근원을 사용하여 일체 중생의 마음이 두루 평등함을

표상하였으며 이것을 일원상이라고도 한다.
원은 우주만유의 근본자리이요, 모든 불·보살의 마음자리이며, 일체중생의 불성자리인 동시에

대소유무(大小有無)의 분별이 없는 자리요, 나고, 죽고, 가고, 오는데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의 업보가

끊어진 자리이다. 또한 언어와 명상이 빈(空)자리이며, 우주만유가 원만하여 구족하고 지극히

공(空)하여서 무사한 자리이다.

오른쪽은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요즘도 효라는 말이 유효할까 ? 효라는 말이 있긴할까?

대웅보전

간단히 합장하고 회원님 에불기도 하는 동안 사찰 주위를 둘러본다

예불을 하는 스님의 목소리가 맑고 찌렁찌렁 힘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젊은 승 같다

벽에는 12지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보전 벽화

비비추

누리장나무

식용이 가능한 누리장나무속의 낙엽관목. 오동잎을 닮은 잎은 마주 나며 잎 뒤에 있는 희미한 선점들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나기 때문에 ‘취오동’이라고도 부른다. 잎자루에는 털이 잔뜩 나 있다.

꽃은 통꽃으로 8~9월에 가지 끝에 취산꽃차례를 이루며 무리 지어 피는데, 연한 분홍색의 꽃부리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다. 수술과 암술은 갈라진 꽃부리 밖으로 나와 있다.

열매는 핵과로 10월에 진한 남빛으로 익고 붉은색으로 변한 꽃받침 위에 달린다.

추위에 잘 견디며 빨리 자라 정원이나 공원에 흔히 심지만 배기 가스에는 약하다.

뿌리가 깊게 내리지 않으나 길게 멀리 뻗는다.

달뿌리풀

냇가에 흔히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기는줄기는 땅 위에서 사방으로 벋는다.

줄기는 곧게 서며 높이 150-300cm, 아래쪽 마디에 퍼진 털이 많고, 속이 비어 있다.

잎은 길이 10-30cm, 폭 2-3cm이며 어긋난다. 잎집은 잎몸보다 짧고, 위쪽이 붉은 자주색을 띤다.

꽃은 8-9월에 핀다. 이삭꽃차례가 모여서 원추꽃차례를 이루며, 자주색이다.

전체 꽃차례는 길이 25-35cm이다. 작은이삭에는 낱꽃이 3-4개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한다. 대만, 러시아, 몽골,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부근에 홍룡사가 있는데 홍룡폭포가 유명해 자주 찾는 곳인데 어제 비는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몇 년만에 한번 들려보기로 하고 홍룡사로 간다

천성산 홍룡사

양산 천성산 자락에 위치한 홍룡사는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에 속하는 사찰이다.

절 이름 홍룡(虹龍)은 옛날에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661∼681) 원효(元曉)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일 년 내내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가홍정(駕虹亭)은 천성산 홍룡사 앞쪽에 위치한 정자로서 양산 대석에 살던 가선대부 석은(石隱) 이재영

(李宰榮)은 노병이 치유되고 난 66세이던 1918년에 자신의 소유지였던 홍룡폭포 아래에 죽우(竹友)

권순도(權順度)와 같이 정자를 세우고 많은 이들이 함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이재영이 저술한 가홍정원운병서(駕虹亭原韻幷書)에 가홍정의 건축 내력이 있으며, 칠언율시의

한시(漢詩)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을 묘사하고 있다.

 

석은 이재영의 원운(原韻)을 소개해 본다.

聖山如畵洞天靑 천성산 그림같고 골짜기는 깊어 푸른데

一派虹流霹巨靈 한줄기 폭포 무지개에 큰 신령이 소리치네

別地雷虹淸晝雨 별천지 우뢰소리 맑은 대낮에 비가 내리고

危巖花笑春雲屛 높은 바위 꽃이 웃고 저문 구름은 병풍을 두르네

數楹拙搆堪貽累 몇개 기둥으로 든 집은 누추함을 면치 못해도

半世塵愁可喚醒 반평생 세속 수심을 불러 깨우쳐 줄 만하다

多謝東南行過客 동남으로 가는 과객에게 무척 감사하노니

登臨衿珮摠蘭馨 등림하는 선비들은 모두 난초 향기로다

소원목에 소원을 적어 매달은 것이 보이는데 이 분들의 하나하나 소원이 다 이루어지길.........

원효는 산내에 89암자를 지어 1천 명의 대중을 가르쳤으며, 당시 각 암자에 흩어져 있는 대중을 모으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그 북을 매달아 두었던 집북재와 《화엄경》을 설법하던 화엄벌

등이 남아 있다. 화엄벌은 8부 능선에 있는 광활한 억새평원이다.

 

홍룡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 승려 법화(法華)에

재건됐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건물들이 젊은 모습을 띠고 있다. 절 이름 홍룡(虹龍)은 폭포 이름에서

유래한다. 작은 사찰인 홍룡사가 유명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70년대 말 우광(愚光)이 주지로 부임한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명(寺名)에서 터에 이르기까지 물과 깊게 관련되어 있는 홍룡사는 관음도량이라고도 불린다.

폭포 옆으로 백의관음이 봉안된 관음전이 있고, 선방으로 이용하고 있는 무설전에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홍룡사의 관음보살 중에는 폭포에 현현(顯現)한다는 낭견관음보살도 있다고 하는데,

1천여 년 동안 감로수를 쏟아낸 폭포와 인접한 곳에 관음도량이 들어선 것이다

현존하는 당우(큰집과 작은 집)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종각과 요사채가 있고, 선방(禪房)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대웅전은 1910년대 중창된 근대 목조 건축물이지만 전통적인 조선 후기

건축 수법을 충실히 반영한 건물로 이곳 산세와 어우러져 상당히 아름답다.

 

사찰 뒤쪽 절벽을 타고 물줄기는 쏟아내는 홍룡폭포는 제1폭포와 제2폭포가 있는데,

옛날에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1970년 조성된 관음전은 홍룡폭포 안쪽 중간부분에 위치하면서 간결한 맞배지붕  주심포

구조로 되어 있으며,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공간에 비해 비교적 규모 있게 지어졌다.

정면에 여닫이문, 양 협간에 외여닫이문을 달았고,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으로 했고 내부는

하나의 공간으로 조성한 一자형의 불단으로 되어있다.

 

천성산 중턱에 자리한 홍룡사(虹龍寺)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관음전은 중생들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보살핀다는 백의관음으로 표현된 해수관음보살과 폭포 속에서 화현하신다는 낭견관음을

함께 모시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불탱화 역시 관음탱과 천수천안관음탱을 조성하고 있어

관음성지로서의 격이 다르다 말할만하다.

수도 없이 다녔지만 오늘도 그자리에서 인증을 한다

삼층의 폭포에는 기암괴석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뒷면에 돌출해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상층은

높이가 24m(80척), 중층은 14m(46척), 하층은 10m(33척)이었다고 한다. 물이 사위에 부딪혀

거슬러 튀어져 그 물보라가 햇빛을 받으면 무지개가 서는데 폭포수가 마치 선녀가 춤을 추는 듯하고,

황룡이 승천하는 것 같다 하여 무지개 홍(虹)자와 용 룡(龍: 옛날에는 瀧-비 올 롱) 자를 쓴다.

하단폭포

이렇게 홍룡폭포를 둘러보고 집으로 향한다

점심식사 후 동래정씨 시조묘 800년 된 배롱나무를 보기 위해 양정으로 왔다

시조는 신라의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회문(鄭繪文)이다. 회문은 신라 경애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정완(鄭玩)의 아들이며, 경애왕 말년인 927년 견훤의 난으로 피신하였다가 931년에 돌아와

동래호장(東萊戶長)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안일호장의 칭호를 받았다고 전한다.

정회문 이후 몇 대의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1世)로 한다. 고려시대에 지원의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 문도의 아들 정목(鄭穆)은 좌복야

(左僕射)를 지냈고, 목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은 동지공거(同知貢擧)·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냈으며, 항의 아들 정서(鄭敍)는 《정과정곡(鄭瓜亭曲)》의 작자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재상 17명, 대제학 2명, 공신 4명, 판서 20여 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하였다. 중종 때

대제학을 지낸 정사룡(鄭士龍)을 비롯하여 선조 때 우의정 정지연(鄭芝衍), 숙종 때 우의정 정재숭(鄭載嵩),

헌종 때 영의정 정원용(鄭元容), 정조 때 우의정 정홍순(鄭弘淳) 등을 배출하였다.

아침과 오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좋았는데 오후에는 청명한 날에 햇볕은 무척 따깝다

경모문 앞에서 눈이 부시도록 하얀 백합을 만났다

부산 양정동에 있는 부산진의 배롱나무는 화지공원에서 2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수령은 8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68호이다.

 이 나무는 약 800년 전 고려 중기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동래 정씨 시조의 묘소 양 옆에 1그루씩 심은 것이 오래되어 원줄기는 죽고,

주변에 새가지들이 별개의 나무처럼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원줄기가 없어 그리 굵지는 않으나,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8.3m 정도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가 이렇게 쇠줄로 상처를 받고 나무의 암이라고 하는

부스럼 같은 군더더기 같은 것들이 붙어 있어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천연기념물을 관리는 어느 곳에서 하는 것인지 소속 기관에서는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관리인에게서 배롱나무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있는 관광객

천년은 족히 될 것 같은 나무사이에 새끼를 치듯 돋아나 800년을 지켜온 배롱나무 

이 나무 마저도 상처투성이에 병이 들어가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원줄기는 고목이 되어 옆으로 누어 세월을 말해주고 새로나온 많은 줄기들이 자라고 있다

일부는 꽃이 피다 말라죽고 일부만 피어 옛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곳 정문도의 묘는 우리나라 8대명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명당자리에 얽힌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그가 죽어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도깨비들이 나타나

묘를 파헤쳐 버려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침이 계속되어 아들이 마을 노인을 찾아가 사실을 얘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 없으니 관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그의 아들은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도깨비들이 나타나

“주인이 들어왔구나”라고 하며 되돌아 갔다고 전해진다.

 

부산진구의 배롱나무는 동래 정씨 시조의 묘 옆에 심어 조상을 기리고 자손들의 부귀영화를 기원하는 뜻을

가진 나무로서 그 문화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배롱나무로서는 매우 오래된 나무이므로 생물학적

보존가치도 커서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렇게 돌아보고 집에 돌아오는데 33번버스가 우리동네로 가는 차라서 승차를 했더니

아쁠사 종점으로 가는 차였다 부산에 오래 살았지만 버스를 타는 일이 별로 없어 로선을

잘 모르는 쑥맥이라서 내려서 다시 출발하는 차에 오르니 빙빙돌아 우리동네에 도착을 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 하루를 마감 하는데 하루활동 걸음 수가 16.600보다


http://youtu.be/RRC3SdjZ5WM

'부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운대 블루라인(해변열차)  (0) 2021.09.09
송정해수욕장과 공수항  (0) 2021.09.05
삼락.맥도 생태공원 연꽃  (0) 2021.07.31
곰내연밭과 용연폭포  (0) 2021.07.15
능소화  (0) 2021.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