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찾아가는 표충사 이번에도 날씨는 덥지만 배롱나무도 보고
계곡에 발담그고 놀기 위해서 표충사로 간다
일주문 뒤에서 본 모습
평일이지만 가족단위로 와서 물놀이 하고 있는 모습
표충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54년(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인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이때 흥덕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하자 왕이 기뻐하고 대가람을 이룩한 다음 절 이름은 영정사(靈井寺), 산 이름은 재약산으로 바꾸었다.
고려 문종대(1047~82)에는 당대의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1275~1308)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1839년(헌종 5)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月坡)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에 세운 표충사(表忠祠)로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었다.
1926년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埦 : 국보 제75호)·3층석탑(보물 제467호)·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표충사 수충루 -
표충사의 정문 역할을 하는 수충문입니다. 표충사 수충문은 2층 누각으로 1층은 장초석
위에 기둥이 놓인 삼문의 형태이고, 2층은 누마루가 깔린 형태로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보통사찰과 달리 삼문형태 누각이라는게 특징입니다 이곳을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충혼을 기리기위한 표충서원과 표충사당이 있기 때문에 사찰 입구를 서원처럼
누각형태로 세웠다고 함
사천왕문 양옆에 배롱나무꽃이 6~70% 정도 핀 것 같다
배롱나무는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날에 꽃을 피운다.
산천초목이 모두 초록 세상이라 배롱나무 꽃은 한층 더 돋보인다.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가 고향이며, 고려 말 선비들의 문집인 《보한집》이나 《파한집》에 꽃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고려 말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시집 오기 전의 중국
이름은 당나라 장안의 자미성에서 많이 심었기 때문에 ‘자미화(紫微花)’라고 했다.
글자로는 보라색 꽃이지만 붉은 꽃도 흔하고 흰 꽃도 가끔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자미화는 보라 꽃이 아닌 붉은 꽃이 먼저 들어오지 않았나 싶다.
이유는 자미화가 들어오고 나서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쓴 것으로 짐작되는 《양화소록(養花小錄)》 에
“사람들이 이름을 제대로 익히지 않아 자미화를 백일홍이라고 한다”라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저자인
강희안도 붉은 꽃을 보았음을 알 수 있어서다. 꽃이 오래 핀다고 하여 백일홍나무라 하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배기롱나무로 변했다가 지금의 배롱나무가 된 것이다.백과사전에서
배롱나무는 꽃이 오래 피는 특징 말고도 껍질의 유별남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오래된 줄기의 표면은 연한 붉은 기가 들어간 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얼룩무늬가
생겨 반질반질해 보인다. 이런 나무껍질의 모습을 보고 ‘파양수(怕瀁樹)’,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간지럼을 태우면 실제로 잎이 흔들려서 간지럼을 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일 따름이다.
식물에는 작은 자극을 일일이 전달해 줄 만한 발달된 신경세포가 아예 없다.
일본 사람들은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질 만큼 미끄럽다고 하여 ‘원숭이 미끄럼 나무’라고
이름을 붙였다.
배롱나무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남해안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룡(海龍)이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어 버리는 심술을 막기 위해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해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얌전한 처녀를 선발하여 곱게 화장을 시켜 바닷가 바위로 보내 해룡이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 왕자님이 마을에 나타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처녀 대신 바위에 앉아 있다가 용을
퇴치한다. 마을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얼마 동안 머물던 왕자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에는 마가 끼는 법, 왕자는 마침 출몰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100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마을을 떠나버린다.
매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왕자를 기다리던 처녀는 그만 깊은 병이 들어 100일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약속한 날짜에 돌아온 왕자는 그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이듬해 무덤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왕자를 기다리듯 매일 조금씩
피는 꽃이 100일을 넘겨 이어지므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일홍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도 배롱나무 옛터의 명성을 잃지 않는 곳이 여럿 있다.
소쇄원, 식영정 등 조선 문인들의 정자가 밀집해 있는 광주천의 옛 이름은 배롱나무 개울이라는 뜻의
자미탄(紫薇灘)이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담양 후산리 명옥헌에는 키 4~10여 미터, 줄기
둘레 30~150센티미터의 고목 100여 그루가 모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롱나무 숲을 만들고 있다.
그 외에도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경주 서출지 등도 배롱나무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백과사전에서
표충사삼층석탑
표충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물 제467호. 높이 770㎝. 이 석탑은 기단·탑신·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폭이 좁은 지대석 위에 놓여진 기단은 단층으로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기단보다도 높아 고준한 느낌을 준다.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옥개는 약간 둔중해 보이며 모서리에는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 등이 차례로 얹혀 있는데 나중에 후보된 것도 있으며 그 위에는 철제 찰주가 있다.
이 석탑은 기단이 단층인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에서 약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995년 6월 1일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석탑의 해체 보수 공사
중에 1층 탑신부에서 금동불상, 유리구슬, 명문석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석에 적힌 글자를 판독한 결과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岳山靈井寺也)"라는 제하의 글로 1491년 삼층석탑의 개수 내력을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루萬日樓(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현판은 "嶺南第一禪院"임
조선 철종 11년(1860)에 월암상인이 조성한 것으로 H자형의 독특한 구조로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으로 되어 안쪽에 아미타불을 모시고있다. 이곳은 중
생을 구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였던 곳이다. 후에 참선하는 방인 선방으로 사용하였으
며, 현재 서래각 선원으로 어어져오고 있다. 1926년 소실되어 1929년 중건을 계기로 현판도 영남제
일선원嶺南第一禪院으로 새로 걸었다.
딱 한 그루의 연분홍상사화 이제 수명으르다한듯 거의 백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집단으로 모여 있는 것이 아니고 사천왕문 앞에도 삼층석탑 뒤에도 영각 앞에도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 오래된 나무라서 모두 무성하게 꽃을 잘 피웠다
우화루
큰스님의 설법을 전파하는 장소로 이용됩니다 그래서 대광전의 마당 앞에 지어져 있습니다
설법의 장소라기 보다는 몸과 마음을 편하게 쉴수 있는 휴식공간입니다
팔상전 앞 배롱나무는 참나리와 잘 어울리는 듯 조화롭게 보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7호. 크기는 석가여래좌상의 높이 209㎝, 약사여래좌상의 높이 179㎝, 아미타여래좌상의
높이 179㎝. 표충사 대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중앙에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로 구성된 삼세불상이다.
표충사 대광전 목조삼존여래좌상은 수미단 위에 각각 마련된 연화좌에 단정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는 좌우의 아미타와 약사여래상보다 크게 조성되어 격을 달리하는 주존불임을 알 수 있다.
세 불상은 신체 비례, 얼굴 등은 대동소이하지만 옷주름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은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결가부좌한 자세에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여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쪽 손끝이 땅을 향하는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왼손은 다리 위에
놓아 엄지와 구부린 중지를 가볍게 맞대었다.
머리는 육계와의 경계에 중간계주, 정수리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넓적한 얼굴에 눈이 수평으로 가늘고 길며,
오뚝한 작은 코, 입술 양끝을 파낸 듯한 입술모양이 특징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의는 오른팔이 드러나게 입은 변형된 편단우견식이며, 옷자락이 팔꿈치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가슴 아래는 5개의 연꽃형으로 모양을 낸 승각기, 다리 앞에 넓은 주름을 중심으로 펼쳐 놓은 균등한 옷주름,
왼쪽 다리 위에 무릎을 감싼 듯한 옷자락 등의 표현은 색난(色難)의 구례 화엄사 각황전 목조불상(1703), 고흥 능가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1707) 등의 특징과 매우 유사하다.
거의 동일한 크기의 아미타와 약사여래는 자세나 머리와 얼굴 표현 등이 본존상과 대동소이하다.
아미타여래상의 수인은 왼손을 어깨까지 올리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어 엄지와 중지를 자연스럽게 구부려 맞대었다.
약사여래상의 수인은 팔의 위치가 아미타여래상과 반대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손바닥에는 약함이 놓여 있다.
얼굴은 본존에 비해 근엄함이 줄어들고 부드러움을 더했다. 법의는 본존과 다르게 양어깨와 오른팔이 드러나지 않게
변형통견식으로 입었으며, 오른쪽 어깨, 승각기, 양다리 사이의 옷주름 처리는 유사하다.
좌측이 관음전 우측이 명부전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세음보살은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귀에 무척이나 익숙한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 보살로 현실의 구세주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이라고 정성을 들여 부르면 재앙을 물리쳐주고 복을 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에 사용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홍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이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사찰이라도 범종만은 반드시 비치하게 된다.
이 당우는 산문(山門)을 들어서서 좌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영각은 사명대사 사산대사 그리고 역대 조사들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대밭아래 거대한 느티나무와 소나무
중의당 살법전 대흥불법도장
표충사(表忠祠)
사명대사와 사명대사 왼쪽에는 임란때 금산에서 전사한 기허대사
오른쪽에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사찰내에 사당(祠堂)이 있는 것은 표충사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이든다
표충사와 유물관
저위 뾰쪽봉이 필봉인 것 같다
나오면서 보니 화장실 앞에 맥문동이 꽃을 피웠네
무지덥다 땀이 줄줄 계곡물을보니 풍덩하고 싶어진다
아래에는 어느분이 정성들여 쌓은 돌탑도 보이고
영남알프스의 주산(主山)인 재악산(載嶽山, 載岳山 : 해발1189.2미터)은 원래의 산명입니다
이 재악산(載嶽山, 載岳山, 사자봉 獅子峰, 제1봉)을 1925년에 일제(日帝)가 천황산(天皇山)으로 조작했습니다
제1봉인 재악산(載嶽山, 载岳山 = 사자봉 獅子峰)을 위와 같이 조작하고,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은 "역사적 근거와 증거가 없는 재약산(載藥山)"으로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래 현판과 안내문을 보면 현판은 제악산 안내문은 천황산입니다 이제 통일을 시킬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며칠전에 구입한 A 42 5G 폰으로 닭의장풀을 접사로 담아보는데
처음 담는 접사사진이라 아직은 좀 그렇네
위 사진과 아래 사진 3장은 시험삼아 A 42 5G 폰으로 촬영한 사진
요즘은 폰사진이 더 잘 나오는 것 같다
재약산과 사자평에서 흘러 층층폭포와 홍룡폭포를 거처 흘러내리는 표충사 계곡물도
오랜 가뭄으로 물이 별로 없다 오늘따라 그늘과 계곡에도 바람이 불지 않는데
물속에 들어가지 않는한 덥기는 마찬가지다 한시간쯤 발담그고 있다 집으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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