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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목포 유달산 케블카

목포 근대 역사관을 보려 했으나 아직 개장을 하지 않아서 케블카를 타기 위해서

북항 스테이션으로 왔는데 여기도 역시 9시부터 입장이다

매표하고 20분쯤 기다리다 탑승을 한다 그래도 일찍 왔기에 주차도 용이하고

쉽게 탈 수가 있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슬로우시티 목포의 옛 중심지인 목포 원도심과 북항,유달산은 물론 고하도를 비롯한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살펴볼 수 있는 해양관광, 레저, 문화관광의 새로운 중심축이다.

유달산의 지형적 특성과 우수한 경관을 고려하여 원도심과 다도해상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국내 최장3.23km,

국내 최고높이155m를 자랑한다. 캐빈대수 일반40대,크리스탈 15대 총55대 운행중 총 3,234m

(해상 820m, 육상 2,414m)

왼쪽 바다 건너 큰 건물이 신안군청인 것 같다

왼쪽에 보이는 아파트군이 있는곳이 목포 신시가지인 듯

유달산

노령 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 끝에 자리한 산이다.

일등봉의 높이가 230m이며, 표고 50m이하가 29.8%로 가장 많으며 200m 이상은 0.4%에 불과하다.

유달산 전체가 화강암이며 경사가 급하지만 일주도로를 따라 일부 완만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유달산의 대표 수종은 소나무(곰솔)이고 왕자귀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이 있다.

식생 구성으로 볼 때 인공 조림 수종을 제외하면 토양 조건은 척박한 편이다.

목포대교

2012년에 완공된 목포대교는 총연장 4.129m 너비 35~50m의 왕복 4차선 도로로 목포 북항과 고하도를

잇는 해상교량으로 비상하는 학의 날재처럼 아름다운 모습과 일몰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자아내고 있다.

목포대교는 목포시에 있는 국도 제1호선의 자동차 전용도로 교량으로, 죽교동과 유달동은 육지측에 있으며

고하도,허사도를 연결하며 목포 신외항과 서해안 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목포의 관문으로 주탑과 케이블의

모양은 목포의 시조인 학 두마리가 목포 앞바다를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환 것이다.

여기는 유달산 스테이션이다 내려서 유달산 일등바위와 마당바위를 볼 수 있으나 

고하도에 다녀오면서 보려고 바로 고하도로 간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고하도와 고하도 해안 데크길 바다에는 군함 한척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유달산 밑의 옛 가옥들 비교적 낙후된 동네이다

캐빈에서 바라본 스카이워크와 유달유원지

목포 해양대학교와 실습선인 듯 

유달산과 신안 비치호텔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퀸메리호

퀸메리호(1만3665톤, 여객정원 1264명, 차량 490대(승용차기준))는 국내 여객선 중 여객구역이 최대인

선박으로, 럭셔리한 다양한 객실이 구성되어 있어 고객들에게 쾌적하고 편안한 공간을 제공한다.

고하도 전망대와 고하도 해변산책로

고하도는 목포시내에서 남서쪽으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영산강 어귀에 있는 작은 섬이다.

섬의 북쪽 언덕은 바다 건너 유달산과 마주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영산강 하구둑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은 시내 서쪽 방면에서는 목포대교가 북항 선착장과 고하도를 연결해주고 있다.

고하도는 서남해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영산강의 빗장 역할을 하는 지리적 특성이 있어서 이를 아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이곳을 전략지로 활용하여 일본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작은 섬이지만 이곳을 잃으면 호남의 곡창지대를 흐르는 영산강을 일본군에게 내어줄 수도 있는

곳이기에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Love Box라 해서 무엇인가 가까이 가봤더니 사랑의 자물쇠다

늦둥이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보이고

이고들빼기도 보인다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일본수군을 격파한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해남의 전라우수영에서 고민했다.

적군은 아직 많은 수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적군의 주력 부대가 다시 명량해협으로 진입하고 별동부대가

진도 남단으로 우회하여 접근한다면 명량해협에 인접해 있는 전라우수영은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임시로 진을 펼쳤던 안창도로부터 10월 29일 이곳 목포 앞바다 고하도로 수군 본영을

옮겨 주둔하면서 군량미를 비축하고 군수물자를 모아 전력을 재정비했다.

이순신은 이곳 고하도에서 1598년 2월 17일 다시 강진 앞바다 고금도로 수군 본영을 옮길 때까지 107일간

주둔하면서 전함 건조 및 수리, 무기 제작, 군량 확보 등 전투준비에 만전을 기했다.각주1) 당시의 진영 터와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수군 진영이 있던 곳은 속칭 불당골이라고 부르는 지점으로 서북풍을 막아낼 수 있는

산 밑의 남쪽 기슭이다. 북쪽 봉우리의 나무를 베어 목재를 가져다가 진영과 군량창고를 건립했다.

전통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극을 썼으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민족분단을 객관적으로 그려냈다.

1966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1년 문화방송(MBC) 연예과장을 거쳐 1963~83년 극단 산하

대표로 있었다. 1973~7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부회장, 1974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75년 극작가협회 회장, 1982~86년 방송광고심의회 회장, 1989년 중앙국립극장 운영위원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9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교수, 1999년 경희대학교 정보문화원 객원교수,

200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2004년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등을 지냈다.

본명이 광남(光南)인 김현은 1942년 7월 29일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남동에서 태어난다.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린 시절과 관련해 그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옻나무,

발목까지 빠지던 뻘의 감촉,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여름날의 황톳길, 더위,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 등이다.

그는 섬에서 초등 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모를 따라 뭍으로 이사해 7월에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7년 서울에 올라와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나 떨어지고, 목포의 문태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입학한 뒤 그는 곧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김현은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한다. 그는 서울대 재학 시절 한국 문학을

주도하게 될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되는데, 김화영 · 유평근(불문과 1년 아래) · 김치수 · 김승옥(불문과 같은 학년) ·

곽광수(불문과 1년 위) · 조동일(불문과 2년 위) · 김주연 · 이청준 · 염무웅(독문과 같은 학년) ·

박태순(영문과 같은 학년) · 김지하(미학과 1년 위) 등이 그들이다.

호는 초성(焦星)·수산(水山). 192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연극인. 우리나라 최초로 연극에 있어서 표현주의극이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고 내세웠다

 

장성군수였던 성규(星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복잡한 가정 속에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를 남달리 사랑한 아버지는 엄격한 유가적 법도에 따라 가르쳤다.

목포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을 마친 뒤,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마모토[龍本] 농업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 잠시 귀국해 정점효와 혼인했다. 일찍이 16세 때부터 단편〈공상문학〉을

썼던 그는 문학에의 꿈을 꺾을 수 없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9년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희곡을

전공했다.

 

1921년 '동우회순회연극단'을 만들어 국내에서 40여 일 동안 문화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이때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우에노[上野]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윤심덕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가업을 이어 상성합명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1926년 마침내 가출,

일본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던 중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본명은 경순, 호는 소영.

1915년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 고등과를 거쳐 191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

천안공립보통학교·아산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영광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6년 숙명여고보 신학년제(4년제)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1929년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를 수료했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63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1965년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24년 〈학생계〉에 시 〈백합화〉를 발표하고, 이듬해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단편 〈추석전야〉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뒤 잠시 작품활동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광수의 추천으로 〈하수도공사〉

(동광, 1932. 5)·〈백화〉(동아일보, 1932. 6. 8~11. 22) 등을 발표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비축하며 전쟁을 대비하던 곳, 고하도이충무공유적  고하도 이충무공유적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인 조선 선조 30년(1597)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머물면서 군량미

및 군수물자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던 곳이다. 장군은 이곳에 돌로 남·서 길이 1㎞, 높이 2m, 폭 1m의

성을 쌓아 적의 배를 구별하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오가는 배들에게 1∼3석의 식량을 내어 놓고

통행첩을 받아가도록 하여 열흘 만에 일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무기와 배를 만들며

전열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 고하도 * 고하도는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작은 섬이다.

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에서 볼 수 있고, 《난중일기》에는 보화도라고 하였으며,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에는 고화도로 표기되어 있다. 

줌인해본 신안 천사대교

목포대교

목포 해양대학교와 실습선

좌측 목포 해양대학교  이등바위 일등바위 앞에 신안비치호텔 유달유원지

저멀리 영산강 하구둑

줌인해본 영산강 하구둑

고하도 해변데크길 용머리까지 그리고 목포대교

고하도는 이순신장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낚시 금지구역인데 어느,분이 낚시를 하며 이렇게 큰 붕장어를 낚았다

고하도 해안데크
총 연장 1,080m로 전체구간이 해상에 위치하여, 고하도 해안 자연절경인 해식애와 목포 해안을 동시에

조망 할 수 있으며,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바다와 높이 해발 228m 목포를 대표하는 유달산, 다도해의

관문 낭만항구 목포항 그리고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야경명소인 목포대교를 전망으로 바다위를 걷는듯한

해안데크를 따라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해안절경을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감상이 가능한 고하도

용오름길 해안데크가 개통이 되었다.

용머리

용의 비상

풍수지리적으로 지형이 용을 닮아서 용섬이라 불리기도 하는 고하도

목포에 희망을담아 하늘에 오르다

저곳은 해양경찰 기지 같다

오른쪽 바위는 모아이상 같고 아래는 사람 얼굴 같은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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