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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과 김우진거리

케이블카로 고하도로 바로가 고하도를 돌아보고 다시 유달산 스테이션으로 와서 유달산에 오른다

여기는 이제 단풍이 들기 시작 일주일 이상 있어야 될 것 같다

일등바위와 마당바위 관운각

관운각

목포신항과 신안비치호텔 고하도

높은 곳이기도 하지만 지난번 냉해로 단풍잎이 말라가고 있는 모습

마당바위 아래에는 1931년경 일본인들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동 명왕상과 일본 불교 선각자 홍법 대사상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유달산에 88개의 불상을 배치하여 순례하고 맨 마지막에 이곳

홍법 대사상 앞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마당바위

층꽃나무

나막신바위

일등바위

유달산 정상 표지석

노령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곳, 유달산은 면적 140ha, 높이 228.3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노령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예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이라 불렸으며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을 일깨우고 있다.


'호남의 개골' 이라고도 하는 유달산에는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등의 5개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으며,

산 아래에는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기념비 등이 있다. 1982년 발족된 추진위원회의 범시민적인

유달산 공원화 사업으로 조각 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으며

산 주변에 개통된 2.7km의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달리며 목포시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유달산 일등바위 

유달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이며 사람이 죽어서 영혼의 심판받는다 하여

율동 바위라고도 함

일등바위에서 바라본 2등 바위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해발 228m의 일등바위(율동 바위)와 심판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 바위)로 나뉜 유달산은 갖가지 기암괴석과 병풍처럼 솟아오른

기암절벽이 첩첩하며 그 옛날 소식을 전하기 위해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신안 천사 대교

압해대교

목포시가지

10개의 기둥에 팔 짝 지붕 구조이다.

유달산 정각 중 제일 유려한 구조를 갖고 있다.

유선각 시비로 차재석이 쓴 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유선각
흰구름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세 마리의 학이 고이 잠든 푸른 바다의 속삭임을
샛별과 함께 기울이고 있습니다
유선각 시비의 작가는 차재석으로 목포의 극작가 차범석의 동생이다.

차범석은 차성 술의 아들로, 차성 술은 차문석, 차범석, 차재석, 차순희의 자녀를 두었다.

차성술은 무안군 삼향 지역의 부호로 알려지고 있고, 자녀 차남진, 차남수 모두 목포에서 내로라하는

명망가로 성장하였다.

차남수는 대한민국 최초의 외과의사 면허를 취득하였다고 전해진다.

유선각은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해 건립했으며, 처음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콘크리트로

개축했다. 또한 이충무공 동상, 어린이 헌장탑과 놀이터, 4·19 기념탑, 충혼탑,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앞에 보이는 게 삼학도

현재는 매립하여 섬이 아닌 육지가 됐다

멀리 노적봉과 시민의 종이 보인다

시민의 종..

유달산 노적봉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시민의 종은 새로운 21세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목포시의

새천년 출발 기념사업으로 98년부터 기획·추진하였고, 2000년 10월 1일, 3년 만에 제작을 완료하고

종각의 건립과 함께 설치되게 되었다.

노적봉

노적봉(露積峯)은 해발 60m의 바위산에 불과하지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담겨있다.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조선 군사와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하여 바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함락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의 노적봉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전술을 펼쳤다.

노적봉 바위를 이엉(볏짚)으로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많이 보이게 하고 새벽에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옆지기 무릎 아프다고 가지 않겠다 하여 못 갔는데 빌려 온 사진으로 대신함

목포에 눈물 노래비(빌려 온 사진)

노적봉 정상에 오르게 되면 목포의 오포대가 있다.

오포대가 1908년 4월 1일 일본 통감부가 한국과 일본의 1시간의 시차를 무시하고 오전 11시에

일본의 정오 12시에 맞춰 정오로 정하고 11시에 포를 쏘아 올리는 정오(12시) 를의 정오를 알리는 

포다

한국의 오포로는 서울의 보신각종 평양의 평양종 전주 사대문에 커다란 종

개성의 신호종으로 사용 수원 화성 사거리에 종루를 지어 종을 사용하였는데

목포만 포로서 정오를 알렸다는 게 특이한 방법이다.

목포 오포대는 1986년 11월 유달산 오포대를 지방문화재 자료 제138호로 지정하고

1988년 12월 12일 복원하였다 

북교동 성당

북교동 성당(김우진 문학의 산실)
 무안 감리로 지낸 김성규의 대저택 '성취원'이 있던 곳이다.

김성규는 장성군수로 지낸 후 목포로 왔기 때문에 인근 사람들은 이곳을 '김장성 댁'이라 불렀다.

김성규의 큰아들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 근대극을 연구하고 직접 무대에 올린 김우진(1897~1926)이

이곳 성취원 내 양옥 건물인 '백수재'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을 집필하였다.

이후 성취원 자리는 천주교 교구에 기부되어 1958년 현 북교동 성당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광 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 (조선지광, 1926 발표)
  김우진은 논문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문인 이광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문(美文)이 아니오, 재화(才華)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다"라면서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드는 생명력,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라고

계몽적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초정 김성규(1863~1936)

호(號)는 초정(草亭), 자(字)는 보형(寶衡),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으로 조선 후기의 문선이며 학자이다.

근대 천재 극작가 김우진의 아버지로 농업과 사회개혁의 선구자로 주목받고 있는 구한말 관료인 초정은

1887년 광무국(鑛務局) 주사(主事)로 관직에 입문하여 고창군수, 장성군수, 무안 감리를 거쳐 1905년 강원도

순찰사(巡察使)의 임무를 마칠 때까지 18년간 관계에서 활동하였다.

1903년 무안 감리(監理)를 지낼 당시 목포, 장성 등지에 학교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는 교육사업에 힘썼으며,

목포 부두 노동자 파업과 관련하여 일본 영사관 상인들과 대립하였으며, 지역유지로서 많은 사회활동을 펼쳤다

김우진은 장성군수 성규(星圭)의 아들로, 할아버지도 헌관(獻官)이었으며 지주였다.

장성군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 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목포로 귀향해 영농 사업체인 상성 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창작활동에 몰두, 시(50편), 희곡(5편), 소설(3편), 평론(20편) 등 총 78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후 1926년 8월 4일 동갑내기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 정사, 당시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졌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 씨와 1남(방한, 2살), 1녀(진호, 8살)가 있었다.

 

외아들 김방한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2001년 작고) 아버지 시신은 찾지 못했으나 무안 청계에 초혼묘를

해 놓아 아들 된 도리를 다했다.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극작가 김우진!

1926년 30의 나이였다

목포 성취원

김성규의 대저택 성취원이었던 곳 김우진이 성취원 내 양옥 건물인 백 수재에 머물면서

여러 작품을 집필했다 천주교구에 기부 현재는 북교동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만리향이라 부르는 은목서(은목서와 구골 목서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유달산에는 여러 유적지가 있으나 돌아볼 곳이 많아 이 정도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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