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역사 관제 2관은 제1관에서 2~300m 거리에 있고 이 부근에는 옛 일본인 가옥들이
지금도 남아 있어 외관으로만 보며 지나다녔다
구 동양척식 주식회사 목포지점(舊 東洋拓殖株式會社 木浦支店)은 전라남도 목포시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1999년 11월 20일 전라남도의 기념물 제174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농민의 수탈기관이었던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목포지점 건물이다.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한국 내에 설립한 회사로, 목포시에는
중앙동에 자리하고 있다.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으로, 현재 남한 지역에서는 부산과 목포밖에 건물이 남아있지 않다.
규모에서도 부산지점보다 크며, 당시의 공공시설물로는 이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있다.
1920년 경에 세운 것으로,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서의 아픈 역사성과 시대성을 지닌 건물이다.
전시관 내부
왼쪽 현상 공회의 소 앞길 우측은 현 중앙동 1가에서 본 2가 쪽
공동수도와 목포경찰서
목포소방서와 상무관
그시대 번화가 거리풍경
외달도 해수욕장
목포 상공회의소와 측후소
목포 공생원
1928년 기독교 전도사로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윤치호가 7명의 부모 잃은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 그는 1938년 봉사정신이 각별했던 일본인 여성 다우치지즈꼬(윤학자)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고아들을 보살피는데 전념했다. 1951년 광주에 식량을 구하러 갔던 윤치호가 행방불명되었으나
윤학자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공생원을 돌보았다. 그는 그 공로로 1962년 문화훈장을 받고 1965년 제1회
목포시민상을, 1968년 일본 황실에서 남수 포장을 받는 등 민간대사로써 한일 가교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생원은 한국 사회 복지의 뿌리가 되어 현재까지 4천 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랐다.
부립대 성원 와 전동 발전소
목포 금융조합과 조선은행 목포지점
호남은행 목포지점과 조선 식산은행 목포지점
동양척식 회사가 사용했던 금고
정토사/명조 유치원 지금의 정광 정혜원
목포 공립 심상 고등소학교와 목포 공립 보통학교 현북교초등학교
목포 공립 여학교와 목포 공립 상업학교
옛날에 정오에 쏘던 오포
옛날 일본의 가옥들
지금도 그때의 가옥들이 약간의 개축을 했지만 현존하고 있다
옛날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던 거리
옛 도심의 노른자위인 유달동 일대 일본인 거리에는 바둑판 모양의 큰길을 내고 반듯한 골목과
가옥들이 자리 잡았다. 유달산 아래 서민들의 삶 터였던 서산동, 온금동 달동네와는 갖춰진
모습이 사뭇 다르다. 1897년 일제에 의해 목포항이 본격적으로 개항하면서 일본인들은 유달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았다.
위. 아래 일본인 가옥을 개조하여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중앙 목포 화신 연쇄점. 시계방향으로. 구 목포 부림 병원 관사. 일본식 상가주택 2. 목포 해안로 붉은 벽돌 창고.
구 동아 부인 상회. 일본식 상가주택 3. 구 목포 일본 기독교회. 일본식 가옥 2. 목포 해안로 일본식 상가주택.
목포 상가주택. 목포 해안로 교차로 상가주택. 목포 부두 근대 상가주택. 목포 번화로 일본식 상가주택 1. 목포 번화로 일본식 가옥 1.
점심시간이 되어가는데 마땅히 찾아갈 집도 아는 집도 없는데 여기 명인집 한정식이 있다
지붕형태와 미닫이 문을 보니 50여 년(6~70년도) 전에 지어진 집 같다
댓돌 위에 있는 신발을 보니 만원사례일 것 같은 느낌
내부도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며 약간의 구조 변경만 했다
구석에 앉을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다 조금 늦은 사람들은 대기 상태로 들어간다
처음 나오는 음식이 코다리 찜과 샐러드
다음에는 반찬이 나오고
마른 민어탕과 돌솥밥 갈비와 게장도 나오는데 호남지방의 다른 집들보다
반찬 가짓수는 반도 안 되는 것 같다 이 밥상이 인당 2만 5천 원이다
강제 징용의 피해자들 누군가가 마스크를 씌워놨네
제1관 앞에서 목포 항구 버스킹 난타공연이 있어 잠시 구경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