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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갓바위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하루 해가 벌써 다 가고 있다

다른 곳은 모르지만 여기 갓바위는 보여주어야 될 것 같아 서둘러 갓바위로 왔다

여러 해 전에 흑산도 홍도 가거도 여행 때 야간에 평화공원과 음악분수대와 갓바위를

찾았던 일이 있어 부근이 낯익은 모습이다

갓바위로 들어가는 해변데크길

 

갓바위는 두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큰 것이 8m이고 작은 것이 6m 정도이다.

목포 8경의 하나이며, 2008년 4월에 영산강변을 따라 해상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어 바다 위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보행교는 298m 구간에 설치되어 있으며, 밀물 때 약 1m 정도 올라왔다가 썰물 때에는 바닷물을

따라 내려간다.

 

주변에는 목포 갓바위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입구에는 ‘갓바위’라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파도와 해류 등에

의해 바위가 침식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자연학습장으로 자연경관의 관광은 물론 교육적 활용도가 크다.

갓바위에 대한 설명문부터 읽어보고

해변데크에서 아래를 나려다 보니 학꽁치가 떼로 몰려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응회암과 퇴적암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코끼리 모형의 바위도 만나고

바로 이 바위가 갓바위다 아들바위와 아버지 바위

2009년 4월 27일에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갓바위는 서해와 영산강이 만나는 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풍화작용과 해식 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풍화혈(타포니, tafoni)이다.

갓바위 일대는 저녁노을이 비치는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다워 일찍이 입암 반조

(笠岩返照)라 하였다.

영산강 하구둑

영산강 하굿둑은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읍을 연결하고 영산강과 황해를 막는 하굿둑이다.

영산강 하구언은 길이 4,350m, 최대 높이 20m의 토석제(土石提) 방식으로, 배후 호수인 영산호는 저수량은

2억 5000만 톤이다. 영산강은 조석의 영향 차가 너무나 커 나주 부근까지 미쳐 연안 농경지에 하천 범람,

농토 침식 등의 피해를 주기 때문에 건설한 하굿둑이다.

영산강 유역 개발 사업 1단계인 장성, 담양, 나주, 광주호의 완공에 이어, 제2단계 핵심사업으로 1978년에

착공, 1981년에 완공되었다. 

2015년 야간에 봤던 음악분수

주차장 옆에 있는 조형물인데 설명문이 없어 무슨 의미의 탑인지는 모르겠다

갓바위를 돌아보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오래전에 기사에서 보았던 공생원이 생각나

이곳 공생원으로 왔는데 휴일이라 들어갈 수는 없고 겉에서만 둘러본다

공생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일본인 여자가 운영하였고 또한 장례를 시민장으로

치렀다고 하니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한번 보고 싶었다

목포 공생원은 1928년에 설립된 아동복지시설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설 중 하나이다.

현재까지 4,000여 명을 사회의 일원으로 배출하였으며, 의지 할 곳 없는 아동들에게 편안한

안식처와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 밝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 사회복지와 함께한 역사

공생원은 근대 한국 특히 사회복지 역사와 길을 같이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생원의 역사에는 사회복지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공생원은 1928년 고 윤치호 전도사가 설립한 아동복지시설이다. 윤치호 님은 1906년 전남 함평군 학교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작으로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빈농이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마을 서당에서 짧은 기간 한학을 공부했다.

 

그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과로로 사망하자, 그는 소년가장이 되어 행상이나 구멍가게 등을 하면서

가계를 꾸려나갔다. 어렵게 살아가던 윤치호 님은 1924년경 학교면의 옥동 예배당에서 시무하고 있던 미국인

여선교사 마틴(Jullia Matrin)을 만나 그녀의 조수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틴의 도움으로 그는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3년 후 학교를 졸업한 윤치호 님은 전남 최초의 교회인 목포 양동교회(1898년 벨 목사와 오웬 목사가 설립)를

다니면서 전남노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특히 겨울에는 그 숫자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윤치호 님은 거리를

배회하는 기아, 고아, 부랑아들을 보면서 사명감을 느끼고, 7명의 거지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1928년 10월 양동교회와 몇몇 인사들의 도움으로 목포부 호남동 18번지에 '같이 살아가는 집'

이라는 의미로공생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공생원은 주민들의 반발로 상락동, 무안군 삼향면 임성리, 영양리,

신안군 압해도, 그리고 삼호면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930년 4월 목포 유지들과 양동교회의 도움으로 대반동에

80평 규모의 목조 원사를 신축해 이사하고, 1932년 12월 15일에 정식으로 목포 공생원 설립인가를 받았다.

1937년 4월 총독부의 도시계획에 의해 유달산 아래 신안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목포시 죽교동(행정상으로는

대반동) 473번지에 200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원사를 신설하였다.

이후 윤치호 전도사의 부인이 공생원의 어머니이자 자랑스러운 목포인 윤학자 님이다. 윤학자 님의 본명은
다우치 치즈코(田內千■子)로서 아버지는 일본의 공무원으로 당시 목포에서 근무하고 계셨다.

 

7세 때 목포에 와 정명학교를 다니던 시절 윤치호 님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어 격랑의 세월을 거쳐 공생원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며 평생을 사랑과 봉사와 헌신으로 사신 분이다. 이 분에게는 훗날 목포에서 봉사하는 삶이

이미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들의 결혼과 활동이 순탄치는 않았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윤학자 님의 아버지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무원의 자제로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가정에서 식민지인 조선의 청년과

결혼한다는 것은 반대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힘이었는지, 운명이 그들을 묶어두었는지 끝내 결혼하게 되고 목포에서 뿌리를 내리고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 분들의 봉사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 나라 전체가 부
유하지 못해 누구를 위해 베푼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 할 일이었다. 게다가 윤학자 님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지 짐작이 된다.

 

일본으로부터 감시를 받는 데다가 돕고 싶은 조선 사람들에게마저 따가운 눈총을 받는 터였다.
해방 직후 윤치호 님은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려 많은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공생원이 20주년 되던 1948년에는 2m 높이의 '공생원 20주년 기념탑'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건립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후인 1950년 7월 24일 인민군 6사단이 목포에 진입했다. 공생원에도 7월 27일

최 중위라는 장교의 지휘 하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이들은 윤치호 님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구장(區長)을 한죄,

사회사업이라는 미 명하에 인민을 갈취한 죄, 그리고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것 등을 들어 인민재판에 회부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변호로 무죄로 풀려난다. 대신 더욱 인민들에게 봉사한다는 조건으로 대반동 인민위원장직을

맡게 되고, 대반동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공생원에 설치된다.

 

9월 말 목포에서 인민군이 후퇴한 후 그는 이번에는 국군 특무대에 의해 스파이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강점기 그의 도움을 받았던 당시 한 동운 대위의 도움과 임 기봉 의원 등 여러 인사들의 구명운동으로

그는 1951년 1월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된 지 며칠 후인 1월 27일에 식량을 의뢰하기 위해 전남도청 사회과를

방문하려고 광주로 갔다.

 

그는 수요일 저녁 중앙교회 목사를 만나 한국전쟁 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숙소인 한양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12시경 윤 치호 님은 세명의 청년과 동행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 후 공생원은 윤 학자님을 중
심으로 운영되었다. 이 사건이 윤학자 여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분은 공생원에서'여자'보다는 이무거운 짐을 질'어머니'였다.

이 슬픔과 위기를 내색하지 않고 공생원을 묵묵히 이끌어 나가야 했다.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채 그녀는

그렇게 목포의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아들이 폭증했고, 고아원 운영도 매우
어렵던 시절이었다. 윤학자 님은 국적이 일본인으로 되어 있어서 관청의 도움마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녀는 이중호 목사를 대리 원장으로 세워 활동을 계속했다. 그녀는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생원을 1954년 6월 C.C.F.(세계 기독교 아동 복리회, 현 한국 어린이재단)에 가입시켰다.

 

이때 수용인원은 160명이었다. 고, 법인화 작업을 추진해 1956년 12월 26일 법인 설립허가를 받았다.

1956년 공생원 조선소를 설치하였다. 제주도에는 목장 축사를 설치하여 1957년 미국에서 젖소 20두를 기증받았다.

1957년 당시 수용 고아는 228명이었다. 그 후 1961년 10월 공생원 영아 분원이 설립되었고, 1964년 10월에는

일본에서 후원회가 발족하였으며, 1967년 5월 일본 오사카 소재 박애사(博愛社)와 자매결연도 맺게 되었다.

공생원은 비교적 안정을 찾고, 본격적인 육아 복지시설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윤학자 님은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 등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1967년 10월 과로와 시력장애 및 과거에 앓은 폐렴 등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68년 10월 말 57세의 나이로 그녀의 일생이 담긴 공생원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는

목포역 광장에서 시민장으로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치러졌다. 당시 장례식을 보도한 한 신문은 그녀의 죽음을

"목포를 울린 장례, 3만 조객 흐느낌을 받으며 '고아의 어머니'윤학자 여사 떠나시다"라고 추모하고 있어
다. 어렸을 때 그렇게도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 윤기님 앞에서 윤학자 여사가 남긴 한마디는

매실장아찌(우메보시)를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한다. 평생을 한국에서 봉사한 삶이었으나 윤학자 님도 역시

고향을 잊지는 못했나 보다.

과거를 넘어선 사랑의 실천

아들인 윤기님은 26세의 젊음으로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공생원을 탄탄한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목포 고하도에 정신지체아를 위한 사랑의 집을 설립하였고, 제주도에는 부랑아 시설을 위탁 운영하였으며,
서울에서는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불우한 이들의 취업을 도왔다. 또한 현재는 일본 사카이 오사카 고베 등지에서
제일 한국 노인들을 위한 고향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공생원의 따뜻한 사랑의 물결이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또 '사랑의 묵시록'세계로 보내기 회를
창립하여 공생원의 정신을 세계로 전하는 데노력하고 있다.





지금 공생원은 윤학자님의 손녀인 윤록님의 손을 거쳐서 외손녀인 정애라님이 맡아서 운영하고 있다.

3대 째에 걸쳐서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공생원은 어두웠던 한일관계를 밝히는
민간외교의 공간이 되고 있다. 윤학자님의 사랑의 탑을 세워서 그의 봉사와 헌신의 삶을기리고 있고, 많은
일본 관광객이 공생원을 방문하여 숭고한 사랑의 의미를배워가고 있다.

일본 강점 이후 아무 것도 한국에게 베푼 것이 없는 일본이지만 민간 차원에서의 사죄와 봉사는 공생원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공생원의 앞뜰에는 일본총리가 증정한 매화 20그루기념석이 있고 현재
공생원생들이 기거하는 숙사는 일본항공(JAL) 회장이 증정 건축한 것이다.또한 윤치호님과 윤학자님의 일생을
다룬 영화 "사랑의 묵시록"은 일본 문화 개방 이후 수입된 최초의 일본영화이다. 일본내에서는 많은 사람이 관람
하고 그들의 숭고한 봉사정신을 기렸으나 한국에서는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공생원교회에는 일본 방문객이 남긴 크고 작은 선물들이 진열되어있다. 과거 한국과 일본 사이에 깊게 파였던
감정의 골을 윤학자님의 봉사와 사람의정신으로 메우고 있는 것이다.
70여년이 훨씬 넘게 목포와 함께 한 공생원은 지금은 설립할 때와 달라진점이 많다. 예전과 달리 아동학대,
이혼 등의 사회문제로 인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몸의 상처보다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옛날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고, 대학생들이 봉사활동으로 이 곳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 외에 3700여명의 이곳 출신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도 매우 크다. 가끔 관광차 일본에서오시는 분들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반가운 손님이다. 이제는 목포부근을 오면 꼭 이곳을 방문하여 아동들을 격려하고, 많은
단체와 기업들이 관심을가져주고 있다.목포 역사의 한부분인 공생원은 20년대부터 일제시대 한국전쟁 60년대
70년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목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한굴곡 많은 역사를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견디고 또 그 정신을 확대하고이어가려는 삶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알 수 있다.
오래된 건물과 눈앞에 펼쳐진 은빛 바다가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불혹이라네 님 글에서

다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목포라는 곳을 어느 정도 알게 됐고 다음에 한번 정도 더 오면

그동안 미비했던 것들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는 못다 한 신안 여행을 하면서 돌아볼

기회가 있길 바라면서 내일 있을 시제 장소로 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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