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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만인의총

 

만인의총

만인의총 정문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에 대해서 알기 쉽게 만화로 구성을 해 놓았다

만인의총 순의탑

2000년 12월 건립된 만인의사 순의탑은 정유재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1만 의사의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조형물이다.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모습

1597년(선조 30) 화의의 결렬로 재침한 일본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28일부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조선·명 연합군도 남원을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여겨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 남원부사 임현의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군사 3,000여 명이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8월 13일 일본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동문은 양원,

서문은 모승선, 남문은 장표, 북문은 이복남이 지켰다. 14~15일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16일에

중과부적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50기(騎)를 이끌고 탈출했으나, 접반사 정기원·이복남·오응정·김경로·신호·임현,

통판 이덕회(李德懷),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진안 현감 마응방과 명군 이 신방(李新芳)·장표·모승선 등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성을 방어하던 병사와 주민들 1만여 명이 전사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했고,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세워 8 충신을 제향 했다.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1971년에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1979년 완공했다

홍살문

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태극 문양은 네 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삼태극 이태극  및 빛을 넣는 삼태극 등으로 표현되어 있고,

태극 문양 위의 지창(枝槍)은 2지 창과 3지 창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이 홍살문이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해서 세워지게 되었는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세워진 장소로 보아서는 경의(敬意)를 표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나 생각될 뿐이다

 

외삼문인 충의문

외삼문

외삼문(外三門)은 홍살문에서 대성전의 정면에 세운 솟을대문으로 향교의 정문이다.

문은 3문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운데 문(中門)은 신(神)이 다니는 문이고, 우측 문은 들어갈 때 사용하는

문이고, 좌측 문은 나올 때 사용하는 문이다. 외삼문은 평소에는 닫아 놓고, 제례를 봉행할 때 열어 놓는다.

내삼문인 성인문

내삼문

내삼문(內三門)은 강학 공간인 명륜당 일원과 제향 공간인 대성전 일원과 사이에 있는 문으로 명륜당

뒤편에서 북향으로 층계 위에 있는 세운 문이다. 이 문에 들어가면 바로 대성전이 나타난다.

이 문도 3문이며 솟을대문이다. 3문의 역할은 외삼문과 같다.

 

외삼문과 내삼문은 균형미를 잘 갖추고 있다. 같은 점은 두 건물 다 같이 태극 문양이 있다.

차이점은 외삼문은 기둥이 원형이고, 내삼문은 4각 기둥이다. 주춧돌이 외삼문은 높고 크고

내삼문은 낮고 작다.

사당인 충렬사

충렬사에는 50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을 올려,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남원성 순절만인 지위(위패)

남원 만인의총(萬人義冢)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왜적과 맞서

항전하다가 전사한 군, 관, 민을 합장한 무덤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한다.

1981년 4월 1일에 사적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8 충신 사적비

사당에서 내려와 기념관으로 집 입을 한다

남원부사가 집 무시 입었던 관복으로 원형을 재현한 의상이다

왼쪽 목화:조선시대 문관들이 집무시 신었던 목화다

요대:정기원 접반사가 사용한 것으로 가죽과 우각으로 장식되었고 길이 110cm 폭 3.5 cmdls dbanf

관모: 머리를 보호하고 장식하기 위하여 또는 신분이나 의례에 따라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물건

탕건: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조익겸 충신의 유물

전투에 사용했던 무기들

아군 무기 총통

정유재란 때 사용했던 무기들

갑주

기증자: 국민은행 남원지점장 정일훈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장군들이 전투 시에 입었던 갑옷과 투구로써 모조품으로 제작된 것

교지

조선시대 국왕의 말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국왕이 관직 및 과거 합격 증서, 토지나 노비, 기타 특권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군을 통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1435년(세종 17)에 교지를 사용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교지라고 지칭된 문서는 관직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백패(白牌),

추증 교지(追贈敎旨), 시호 교지(諡號敎旨), 면역 교지(免役敎旨), 사패 교지(賜牌敎旨) 등이 있다.

새로운 시설을 다시 짓고 있는 공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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