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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홍룡폭포와 언양읍성

얼마 전에 블친님께서 홍룡폭포의 얼음기둥 사진을 멋지게 담아 올리셨었다 

그래서 다음날 갔었는데 거의 다 녹아서 실망을 하고 다음에 기온이 영하 7도

이하 되면 다시 찾겠다 다짐을 했었는데 오늘 아침 기온이 영하 8도다 

낮에는 기온이 올라가니 또 못볼 것 같아서 서둘러 8시에 출발을 했다(2/17)

천성산 홍룡사 일주문

기온이 1도가 더 낮았는데도 이정도다 내가 생각한 모습은 아니다

봄이 가까워지니 지열이 올라가 외부 온도가 낮지만 물이 차갑지가 않아서 

꽁꽁 얼지를 않은 것 같다 

지금까지 봄 꽃을 찾아다녔는데 오늘은 또 겨울 얼음을 찾아 나서게 됐다

요즘 날씨가 들쭉날쭉 요지경속이다

어쩔 수가 있나 이 정도로 만족을 하고 다음을 기약해야지

여기는 산이 조금 낮으니까 이 정도인데  조금 더 높은 신불산의 홍류폭포는 어떨까

집을 나왔으니 허당일지언정 한번 가보자

 

먼저 언양 읍성에 잠시 들렸다

남문인 영화루다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삼국시대 석축 성곽. 읍성. 사적.

사적 제153호. 지정면적 41,349㎡, 둘레 약 1,000m. 현재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언양읍성은 토성과 석성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토성은 삼국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둘레는 1, 498척, 높이는 8척이었다.

이후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李聃龍)이 돌로 개축하여 확장하였는데, 이때의 둘레는 3,064척,

높이가 13척이었다. 또한, 첩(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834개소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네 곳 있었는데

현존하는 석성은 둥글게 자리 잡은 성의 기초 위에 축조되어 있다.

보통의 성벽은 무사석(武沙石) 모양의 반듯한 돌 또는 산돌을 차곡차곡 쌓는 방식으로 축조하는 것이나,

이 성에서는 거대한 바위를 굴려서 면만 거칠게 다듬어 바르게 잡은 위에 역시 큰 돌을 떠다 얹어 큰 돌과의

사이에는 무수한 잔돌을 끼워 박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매우 견고하여 웬만한 충격에는 견디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상당한 부분이 잘 남아 있다.

성의 기초는 중간중간에 돌출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문지(門址)나 포로(砲樓)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방어에 상당한 경험과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의 설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읍성과 짝을 이루는 산성은 취서산(鷲棲山)의 단조성(丹鳥城)으로서, 유사시에는 방어하기에 유리하도록

축조되었다. 이 성의 축조방법과 배치는 거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것도 역시 조선 초기의 것으로 신라시대

이래 왜적 방어를 목적으로 한 기지였다.

언양읍 성도 경주 남산의 신성(新城)이나 문무왕 때에 축조된 부산성(富山城) 등의 석축 기법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신라 이래의 축성방법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지역은 경주·울산·밀양·양산과의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이 읍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언양읍성은 1966년 12월 27일 사적 제153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 6월 23일에는 남문 주변지역 132필지

26,997㎡도 사적으로 추가 지정 예고되었다.

해자(海子)로 성벽 외곽을 방어한 언양읍성

언양읍성(사적 제153호)은 울주군 언양읍 동부리와 서부리 일대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석축 성으로

네모반듯한 평지성이다. 둘레 1,559.7m으로 성벽의 현재 남아 있는 최고 높이는 4.85m이다.

읍성의 동서남북 성벽 중앙에는 옹성(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두른 성문이 배치되었다. 또한 각 성문의 좌우와 성벽이 꺾이는 모서리마다 성벽에서 돌출되게 쌓아 성 밑에

접근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인 7m~8 m×8m~10.4m 규모의 사각형 치성을 배치하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와 뾰족한 말뚝인 목이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조선시대 평지 읍성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성벽 둘레 1,427척, 높이 8척 규모의 토성으로 축조하였으며

군창이 있고 웅덩이 4곳과 우물이 2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성은

연산군 6년(1500년) 당시 현감이었던 이담룡이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이다. 고쳐 쌓는 과정에서

기존보다 더 넓게 쌓은 것으로 보인다.

 

읍성 내부에는 각종 관아시설이 있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1411년)의 기록에 의하면 언양 객사가

불에 타 수리하였다는 내용이 보이며, 동헌은 성종 21년(1490년) 6월 7일 자 기록에 의하면 언양현 관아가

불에 타버렸으며, 명종 4년(1549년)에는 언양의 관사를 신축한 내용이 적혀 있다.

축조 과학

성벽의 기초는 우선 생토층에 막돌이나 자갈돌을 깔아 지반을 다졌는데 북쪽 성벽의 경우 생토층에서

나무 말목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확인되어 성벽의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벽의 판돈 안쪽의 뒤채움 돌은 장대석을 길이방향으로 배치하여 면석이 무너져도 성벽 자체는

유지될 수 있도록 쌓았다.

 

내벽의 성 안쪽과 성벽 윗부분을 흙으로 덮어 마무리하였는데 이는 세종 20년(1438년)에 반포된 석성

축조에 관한 〈축성 신도〉의 전반적인 내용과 대체로 일치하며, 빗물로 인한 성벽 유실방지와 유사시

성벽 위쪽으로 병사들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벽의 석축 너비는 5.5m 내외로 그 안쪽 너비 1.5m의 흙으로 덧대어 다진 곳까지 치면 7m에 달한다.

외벽 바깥 바닥에는 성벽 기초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1.5~2m 정도 너비로 판석을 깔아 보축하였다.

성벽 안쪽으로는 지대석을 얹고 30cm 뒤로 물려 성벽을 쌓았는데 외벽 면석은 대형의 판돌로 세워쌓기와

눕혀쌓기 하였다.

 

외벽 면석에서 안쪽으로 2.5m 정도는 비교적 큰 돌로 채우고 있으며 내벽으로 갈수록

그 보다 작은 크기의 돌을 사용하고 있다. 내벽 석축의 성 안쪽으로는 너비 1m~1.5m 정도로 성벽 위까지

흙으로 경사지게 다져 마무리하였다. 성벽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하천 등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인 해자가 설치되었다.

오른쪽에 물줄기가 보이는데 해자의 형태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예성

가이드 줄이 처진 곳이 해자터이다

평지에 성이 있는 것은 순천에 낙안읍성과 여기 언양읍성이 전부인 것 같다

이렇게 언양읍성을 잠시 둘러보고 홍류폭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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