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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주.탄금대공원

탄금대로 가기 전에 악어봉에 한번 들려볼까 하고 네비 양에게 부탁을 했는데 길거리에

목적지 도착이라 하는데 사전 정보가 없이 왔기에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주차하고 찾아볼 수도 없고 오면서 보니 게으른악어라는 카페가 있어

유턴해서 일단 게으른악어 카페에 왔다(2/21)

카페 앞에 악어 전망대가 있는데 호수만 보일뿐 악어 같은 형상은 없다

산길을 따라 올라야 악어 봉이 나오는 것 같은데 다음에 정보를 가지고 오기로 하고 일단 포기를 한다

캠 처한 사진으로 대리 만족하고 탄금대로 향한다


탄금대 공원에 주차를 하고 길 따라 전진하는데 아뿔싸 길을 잘못 선택을 했다

국궁장 위 출입금지 구역이다

아마 활을 쏘기 때문에 위험해서 통행제한을 하는데 모르고 접근을 했다

급히 국궁장을 벗어나 아래 강가로 가본다

저기 왼쪽에 보이는 것이 탄금대교인 것 같다

이 카페는 시설도 잘해놓은 것 같고 정원도 잘 꾸며 놓았는데 코로나로 방문객들이 적어

영업중지를 하고 있는 듯 문이 잠겨있다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

신립장군

신립은 임진왜란 때 충주성 밖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567년(명종 22) 무과에 급제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순변사가 되어 선조로부터 보검을

하사 받고 김여물 등의 군관과 함께 모집한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로 출전했다.

 

충주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이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6, 7리 떨어진 단월역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왜군의 동향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사실을 보고한 안민 등을 군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목을 베었다.

 

왜군이 충주로 진격해오자 김여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에게 밀린 많은 군사들이 퇴로가 막혀 익사하면서 전투는 참패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성룡이 한 말 왜군은 조총이라는 총을 가지고 있는데 대비책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을 때 심사숙고를

했어야 하는데 자기 자신을 과신하다가 낭패를 본 패장이다 영의정에 추존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웃기는 것이다

가야금은 우리의 고유한 악기다. 본래 대가야연맹을 상징하며 가야인의 천문 의식을 담고 있다.

가야금은 위가 둥글고 아래가 평평한데 이것은 천원지방의 천문관을 나타내며, 12개의 줄은 1년 12달을 상징한다.

가야금은 가야국이 예악(禮樂)을 중시한 문화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악으로서 백성을 통치하고자 했던

가야의 높은 문화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에서 만들어진 가야금은 고국을 떠나 충주에서 탄금대라는

장소와 결합하여 장소적 의미를 취하게 된다. 가야국보다는 오히려 충주가 가야금의 고을이 된 것이다.

우륵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 악성(樂聖)으로 불린 우륵(于勒)은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반기며 국원(충주)에 거주하게 했다. 그리고 신라의 청년인 법지, 계곡, 만덕을 선발해

악(樂)을 배우게 하고 우륵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런 연유로 우륵은 만년에 멸망한 가야국을 떠나 충주에 우거 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은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우륵은 이곳의 풍치를 탐미하여 산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야금을 탔다.

이곳이 바로 우륵이 금(琴)을 탄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탄금대(彈琴臺)’다.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의 미묘한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고 곧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탄금대 주변에는 지금도 가야금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칠곡리(칠금동), 금 뇌리(금능리), 청금리(청금 정) 등의 마을 명칭은 모두 가야금과 관련된 것이다.

탄금정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예전에 있던 것을 고처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열두 대 내려가는 길

탄금대는 충주시 근처에 있는 대문산(108m)의 정상을 지칭한다.

산 아래로 남한강이 흐르는데 강변에 기암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어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절벽을 따라 강물이 휘감아도는 탄금대는 남한강과 너른 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강줄기의 모습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벼랑에 위치한 열두 대에서 가장 잘 보인다.

정상부에는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탄금정이 있고, 동쪽으로는 계명산과 남산이 솟아 있으며 아래로는

충주 시가지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탄금대는 신립장군이 퇴로가 막혀 왜군과 싸우다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열두대

탄금대 북쪽 절벽에는 열두 대가 위치하고 있다. 열두 대의 지명에 관한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바위의 층계가 12개이기 때문에 열두 대라 하기도 하고, 절벽 아래 물이 12번 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교전 중 달구어진 화살을 식히느라 12번을 오르내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열두대 아래는 깊은 소가 있는데 이를 양진명소라 한다. 이곳에 뱃길을 관장하는 수신(水神)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선주, 선박 상인들은 양진명소에서 안전과 번영을 빌었다고 한다.

탄금대교 쪽 풍경

충주호 쪽 풍경도 담아보고

환경문제가 아니라면 저 섬을 개발하면 대박 날 것 같은 느낌

탄금대 비석을 뒤로하고 공원 쪽으로 가는데 돌의자들이 보이는데 옥관자라는 글이 보인다

돌의자에 새겨진 옥관자 이야기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다 남한강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전쟁 후에도 신립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했는데 어느 날 한어부가

큰 잉어를 잡아 배를 가르다가 옥관자 하나를 발견했다

옥관자는 조선시대 당상관 이상의 관리들이 망건에 달고 다닌 장식품이었다

이옥 관자의 주인을 관아에서 알아봤는데 신립장군의 것이라고 밝혀졌다

그래서 그 자손들이 옥관자를 시신 대신 묻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중원의 꿈/김영원

별빛 속에 이야기/유영준

탄금대 대흥사

 

야외음악당

조웅 장군 기적비

탄금대 사연 노래비

탄금대 사연/ 주현미

 

탄금정 굽이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

열두 대 굽이치는 강물도 목메는데

그 님은 어디 가고 물새만이 슬피 우나

 

송림이 우거져서 산새도 우는가요

가야금이 울었다고 탄금인가요

우륵이 풍류 읊던 배문산 가는허리

노을 진 남한강에 님 부르는 탄금 아가씨

(이병환 작사 백 봉 작곡)

충혼탑 가는 길

캡처한 사진

 

감자꽃/권태응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마나 하얀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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