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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주.목계나루

남한강 수운 물류 교역의 최대 중심지

목계는 예로부터 수운과 육로의 요충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의 문물이 집산되던 곳이다.
목계나루는 1930년대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이기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 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의 내륙항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일부의 지역과 연계 소통하며 성황을 이루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나루이다.
쌀이나 소금 등을 실은 배가 수시로 드나들고, 배가 들어와 강변장이 설 때면 각지에서 장꾼과 갖가지

놀이패와 들명이들이 왁자하게 몰려 난장을 벌이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의 5대 하항중 하나라 해서 오목계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800여 호에 이르는 주민들이 상업 활동에 전념할 정도로 번성했으며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현재 계승되고 있다.

지금은 그 흔적도 볼 수 없고 고속도로와 지방도로만 지나가고 물길은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이곳이 목계나루라는 것을 알기나 하겠는가

목계솔밭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저우네> 마을 아래편으로 솔 무더기가 있는 곳이 옛 명칭으로 목계나루의 목계솔밭이다.

이곳은 남한강변으로서 제천~장호원간 국도 38호선이 지나고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목계솔밭에는 100~200년생

소나무가 80여 그루 자라고 있으며 여름철에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이 목계솔밭은 소나무로만 이루어진 3,800여 평 숲으로 충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강 배 체험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의 중심지
목계나루 속 “강 배 체험관” 충주는 예로부터 문화의 도시로 다양한 문화의 집결지 역할을 톡톡히 해낸 도시다. 특히 중원의 문화는 건축, 예술, 생활에 할 것 없이 그 역사적 가치와 파급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원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요소들 사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교통’이다. 충주는 수운 교통은 물론이고 육로교통에 있어서도 남부와 북부 동과 서를 연결하는 요충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목계나루”가 있었다.

목계나루는 과거 목계의 이런 문화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자는 취지에서 설립된 목합 문화공간이다. 9월 4일 개관한 목계나루는 강 배 체험관과 주막, 저잣거리, 수상체험 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 배 체험관에서는 그 옛날 목계나루를 가득 메우던 배를 모티브로 강배들을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소원 종이배 만들기, 제 머리 마빡(꼭두각시 인형) 놀이 등은 인기를 끄는 체험거리이다.

조선시대 주막촌과 저잣거리 형태로 조성을 하여 숙박시설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별궁

목계나루의 옛 모습들

목계나루의 옛 모습

목계나루의 기록

1960년대 목계 1구 마을 모습

1943년 소풍 나온 아이들과 돛배

무녀의 복장

마빡이 인형

마빡의 전설

줄다리기

목계 별신굿

그 시절 운용됐던 소형 배들

남한강 물길과 나루

목계 상선

목계 장터/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돼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돼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

신경림은 이곳 중원 군 출신이다

한강 강 배

 

 

목계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태백준령의 지맥인 부흥산에 이르러 솔밭과 강변이 아우러져 태고 때부터

큰 마을이 형성되어 뱃길로는 서울(京都)에, 뭍으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며 내륙 항구로

물화와 사람의 내왕이 끊이지 않아 큰 저자를 이루니 팔도에 살기 좋은 고장의 하나라 오목계라 불렸고 경도와

해외의 신문화를 유입하던 곳으로 중원문화의 발상지였다.

조선 후기 5대 하항 중의 하나였던 목계는 전성기 때 가구 수가 800호 이상 되었던 큰 도회지로서, 100여 척의

상선이 집결하던 곳이다. 1948년 하항의 기능이 소멸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마포 다음 가는 한강의 주요

항구였다. 번성했던 목계장터는 1920년 후반 서울에서 충주 간 충북선 열차 개통으로 남한강의 수송기능이

완전히 끊어지면서 규모가 크게 작아졌다. 1973년에 목계교가 놓이면서 목계나루의 나룻배도 사라져 목계장터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직 목계 교회·목계 반점·목계 슈퍼 등 상호만이 남아 그 옛날의 목계나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목계나루는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인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이었다.

문경의 조령을 넘어 충주의 가흥창에 임시로 적치해 두었다가 한양의 마포나루에 내리는데 필요한

임시 창고 역할을 했다.

 

김용림의 목계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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