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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주.고구려비 2

야외 전시장을 돌아보고 실내 전시장으로 왔다

고구려비를 비각을 만들어 보호하다가 실내로 옮겨 전시를 하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는 5세기 말 고구려가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남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세운 비석입니다.

 현재 국보 20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203cm, 너비는 53cm 크기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하게 비석의 사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1500여 년 전에 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비, 바람으로 인해 글자의 마모가 심해 500여

자 중에 200자 정도만 해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밝혀진 200자로 인해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을

점령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증명이 됩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 아마추어 답사팀이 ‘입석마을’이라는 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입석마을’ 앞에 있던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고 생각하였지만 전문가들이 조사해보니

진흥왕 순수비가 아닌 이 보다 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고구려 비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덮여 있던 이끼를 제거하고 탁본을 한 후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을 조사해 보니 

‘고모루성(광개토대왕이 정복한 백제 성 중 하나)’, ‘신라 토대 당루(고구려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다는 의미)’,

‘고려태왕(고구려 왕을 이르는 말)’이라는 글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를 통해 이 비석이 고구려의 비석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중국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비석으로 그 가치가 높습니다.

충주 고구려비의 의미

1.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2,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있다.

3, 3국 간의 정치적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알 수 있다.

4, 고구려의 관등 조직이나 인명 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5. 고구려에서도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5월에 고려 태왕(高麗太王)의 상왕 공(相王公)과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7],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 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 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 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이 다스리는) 땅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共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 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 매금의 사람들이 우 벌 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前部)의 대사자 다혜 환노와 주부 도덕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귀도(貴道) ……

와 개로(盖盧)가 함께 신라 영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였다.

원문:五月中高麗太王相王公□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東來之寐錦忌太子共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道德□□□安□□去□□到至跪營□太子共□尙□上共看節賜太翟?□食□□賜寐錦之衣服建立處用者賜之隨者節□□奴客人□敎諸位賜上下衣服敎東夷寐錦遝還來節敎賜寐錦土內諸衆人□□□□王國土大位諸位上下衣服兼受敎跪營之十二月廿三日甲寅東夷寐錦上下至于伐城敎來前部大使者多亐桓奴主簿□□□□境□募人三百新羅土內幢主下部拔位使者補奴□□奴□□□□盖盧共□募人新羅土內衆人拜動□□

신유년(辛酉年) …… 十 …… 태왕 국토(太王國土) ……(행 전체 마모)上有 …… 酉 …… 동이 매금의 영토…… 方 ……

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 벌 성(于伐城)에 이르렀다.

……고모루 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야□(耶□)

  • 원문:□□□中□□□□城不□□村舍□□□□□□□沙□□□□□□□□□班功□□□□□□□□節人
  • □□□□□□□□□辛酉年□□□十□□□□□太王國土□□□□□□□□□□□□□□□□□□□
  • □□□□□ □□□□□□□□□上有□□酉□□□□東夷寐錦土□□□□□□方□桓□沙□斯色□□
  • 古?加共軍至于伐城□□□古牟婁城守事下部大兄耶□…… 中 …… 城不 …… 村舍 …… 沙…… 班功 …… 節人 ……

남한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

국원성 충주의 1500년의 흔적

고구려 지명으로 보는 국원성의 역사

삼국은 국원성(충주)을 중심으로 대립. 융합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의 문화가 공조하는

중원 문화권을 형성했다. 그중 고구려의 흔적은 충북의 지명을 통해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다.

제천의 고구려 지명인 내토(奈吐 )는 '큰 둑'이라는 의미, 신라도 삼국통일 후 제천을 내제(奈堤 )로 표기한

것을 보아 모두 의림지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음성의 고구려 지명은 잉홀(仍忽 )인데

'잉'은 움푹 파인 지형을 뜻하고, '홀'은 '고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진천의 고구려 지명인 금 물니(今勿奴 )는 '검고 부드러운 흙을 가진 땅'이라는 뜻이다.

이는 땅이 비옥하고 철이 많이 났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 추정한다.

철의 고장 충주

삼국시대에는 충주를 차지하는 나라가 패권을 장악했다. 한강유역의 교통로를 확보하기도

하지만 충주가 철의 주요 산지였기 때문이다.

백제 근초고왕 무렵 충주는 최고 수준의 철기를  생산하고 있었고, 일본에 하사한 칠지도는

충주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국의 비를 설명

웅혼한 고구려비. 세련된 백 제비. 소박한 신라비

장수왕의 꿈

개마무사

광개토대왕비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구려의 역사와 함께 상징인 삼족오 문양을 볼 수 있는데요.

그 옆에는 고구려를 대표하는 유물인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비석의 높이가 6.39m에 달한다고 하는데 탁본만으로도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장군총

안악 3호분 (북한 보물 제28호)​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잘 볼 수 있는 고분이다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이른 시기인 357년에

발견되었으며. 규모 또한 고구려 고분 중 가장 크다

마구간. 우물. 부엌 등의 생활공간과 250여 명으로 구성된 대행렬도 등이 장관을 이룬다

​마구간, 부엌. 고깃간. 차고의 벽화가 선명하다. 특히 부엌과 고깃간에 걸린 고기의 벽회는

검붉은 육고기 빛깔이 선명해서 리얼감이 있다

묘주인인 남자는 정면을 바라보고. 묘주의 부인은 비스듬히 시중을 받고 있다.

높은 지위는 크게, 낮은 지위는 작게 그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안악 3호 고분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고구려의 벽화고분인 동수 묘는 랴오둥 지방에서 넘어온 동수의 무덤이다.

그것은 중국의 한·위진(魏晉) 대의 벽화고분의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고구려 영토 안에 세워진 최초의

중국계 벽화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묘실 평면·모줄임천장·돌기둥·벽화 내용 등 여러 면에서 그 뒤 고구려

벽화고분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발생과정에서 중국 벽화고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을

연결하는 과도기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안악 제3호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동수 외에도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보는 주장이 북한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동수 묘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묵서 자체는 동수에 관한 것으로 인정하지만 묵서가

묘 주인공의 주변이 아닌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 있기 때문에 동수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묘지기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안악 3호분은 동수가 장하독 생활을 한 고국원왕의 무덤이거나

또는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수렵도

무용총은 고구려 벽화 고분의 하나로, 묘실의 벽과 천장에 백회를 바르고 그 위에 인물 풍속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 벽화 색채는 황색과 갈색 등 따뜻한 느낌의 색으로 되어 있다.

널방의 서북벽에는 화면 오른쪽 2/3 지점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경계로 하여 그 왼편에 수렵도를 그렸다.

도안화된 산악과 나무들 사이로 새 깃털로 장식된 관과 검은 두건을 쓴 기마 인물들이 사슴과 호랑이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수렵도는, 기교가 없고 소박한 기법에도 불구하고 시원스러운 공간 배치와 생동감 있는

필치로 인하여 고구려 고분 벽화 초기의 대표작이다.

무용도

고분벽화는 고대 무덤의 내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말한다. 왕과 귀족 등의 지배층 무덤에 그려졌으며, 죽은 사람의

사후세계를 위해 제작되었다. 무용총은 고구려 시대의 벽화고분으로 내부에 14명의 남녀가 대열을 지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가무도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 이 벽화고분을 무용총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 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네 벽과 무덤 속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 천장에 그려져 있다.

널방 입구에는 각각 나무가 1그루씩 그려져 있다. 널방 동남벽에는 기마인물을 중심으로 그 오른편에는 주인의

출타를 노래와 춤으로 전송하는 가무대를 묘사했고, 왼편에는 음식을 나르는 여인들을 그렸다.

벽화 색채의 주조는 황색과 갈색 등 난색 계동이다.

고구려는 풍류와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

마상 묘기와 검술. 격투를 벌이는 사람 등의 화려한

공연예술과

왕산악이 지었다는 천상의 음악.

생동감 있는 무용단들의 춤사위는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사신도

사방의 별자리를 상징적인 동물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동쪽에 청룡, 서쪽에 백호, 남쪽에 주작, 북쪽에 현무를

그렸다. 중국에서는 한대와 남북조시대에 풍수지리설과 신선사상 등과 연결되어 유행하여 무덤과 석관·석비

등에 사방의 수호와 벽사를 목적으로 장식했다.


우리나라에는 한대에 전래되었으며, 고구려 무덤의 수호신으로 적극 수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사신도는 도상과 화법의 변화에 따라 크게 3기로 나뉘어 발전했다. 약수리 고분과

삼실총 등의 초기 사신도들은 초보적 상태를 보이나 무용총과 고산리 1호분 등에는 보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강서대묘, 강서중묘, 통구 사신총, 진파리 1호분, 통구 4호분, 통구 5호분 등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입석마을은 삼국시대의 최대 접전 지였다

한두 시간에 고구려의 역사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의 치열했던 접전지 입석마을

고구려비를 살펴보고 고구려의 역사를 잠시 익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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