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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주.장미산성.반곡역

목계나루를 둘러보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장미산성으로 왔다

중원에 백제가 남긴, 장미산성

장미산성(사적 제400호)은 충주시 북서쪽에 자리한 장미산의 능선과 계곡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돌로

쌓아올렸다. 보련과 장미라는 남매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남동생인 장미가 이기게 되어 그 이름을 따

장미산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 오르면 남쪽과 동쪽으로는 한강과 합류하는 달천이

한눈에 보이며 서쪽과 동북쪽으로는 고갯길들이 쉽게 볼 수 있다.

 

주변에는 충주고구려비와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을 비롯한 충주 누암리 고분군 등이

있어 삼국간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장미 산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모습을 보이는데, 그 모양에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전체 2,040m에 이르는 웅장한 성벽을 통해, 장미산성이 옛 중원지역에서 가졌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조사 결과 성벽과 치성, 배수로, 공격용 돌을 보관한 석곽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4세기 이후의 한성백제토기이다.

성벽의 둘레는 932m인데, 서쪽과 서남쪽 성벽은 원래의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벽은 높이가 4∼6m로, 아랫돌보다 윗돌을 조금씩 물려쌓아 안정감이 있으며,깬돌〔割石〕을 대강 다듬은 뒤

네모난 면을 바깥쪽으로 두고 정연하게 쌓아 올렸다.

성벽의 대부분은 장미산의 비탈진 경사면을 최대한 이용하였으나, 성벽 안쪽이 능선과 나란하고, 골짜기

부분은 성벽의 윗부분이 무너져 특수한 시설이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충북 충주를 흔히 '중원(中原)' 이라고 부른다.

한반도 정중앙, 그러니까 '나라의 중심'이라는 얘기다.

한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중원은 삼국시대부터 서로가 탐내던 뜨거운 땅이었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의 패권을 쥐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바꿔가며 이 땅을 차지했다.

먼저 백제가 이 땅의 주인이었다가 5세기 말 고구려에 넘겨줬고, 삼국통일로 신라의 영역이 됐다.

충주는 백제 영토로 450여년, 고구려 영역으로 150여 년, 신라의 땅으로 550여 년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덕왕 16년에 충주를 중원으로 삼고 통일신라 영토의

한 가운데임을 선포하기도 했다.

남한강 줄기

충주시내가 가까이 보인다

산성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이길도 성의 일부였을 것 같다

조선시대의 전주 이 씨의 무덤이다

산불 감시초소

축조 과학

장미산성의 성벽은 흙을 다져 올리고 나서 그 위에 돌로 쌓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성벽은 성벽을 축조할 곳에 계단과 같은 모양으로 암반을 정리하여 맨 아랫 기단부터 쌓아 올렸다.

안쪽으로 양쪽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형태의 북돌을 넣고 빈틈에는 작은 돌들을 채워 올리다가 지형의 안과

밖이 수평이 되는 지점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쌓아 올리면서 그 사이에는 다시 북돌을 가지런히 채워 넣었다.

 

이러한 성벽 쌓기 방법은 외벽이 붕괴되어도 내부의 북돌이 견고하게 남게 되어 성벽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한, 성벽 안쪽에 빈 공간에는 찰진 흙으로 다져 넣어 누수로 인한 성벽의 붕괴

가능성을 낮추었다.

백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을 건축했던 많은 경험을 통해 인문 지리적 요소에 맞는 성 쌓기 기술을 익혔다.

그 축적된 기술이 장미산성을 통해 삼국의 각축장으로 대변되는 중원지역에서 발현된 것이다.

장미산 봉학사

차가 장미산 봉학사까지 진출할 수 있어 쉽게 산성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충주의 마지막 여정을 마치고 원주로 가 숙소에 들것이다

오전에 일찍 숙소에서 나오니 11시 약속시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어 주변에 검색하니 폐역이 된

반곡역사와 원주 감영이 부근에 있어 돌아보고 소금산 출렁다리로 가도 되겠다

폐역의 흔적들

반곡역(Bangok station, 盤谷驛)은 강원도 원주시 반곡동에 위치한 중앙선의 철도역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 소규모 지방 역사의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근대기에 수입된 서양 목조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고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임이 고려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07년부터 여객취급이

중지되었으나 이 역 인근에 강원혁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출·퇴근 수요에 따라 2014년 8월 18일부터

상, 하행 2회의 무궁화호가 다시 정차하였다. 2021년 1월 5일서원주 - 제천 구간 복선 전철화

완료되어 폐역 되었다.

1941년 개통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반곡역의 역사(驛舍)는 그 건축적·철도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원주 반곡역사’라는 명칭으로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제165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이국적 분위기의 역사와 시골 간이역의 정취가 어우러져 영화·드라마의 촬영지로 자주 이용된 곳으로

관광객들도 많이 다녀가는 곳 그런데 역사에는 갤러리로 사용한 흔적이 여기저기 있는데 지금은

문도 잠겨있고 갤러리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야외에는 이런 사진들이 아직 남아 있는데 안에는 문이 잠겨 있고 갤러리의 기능을

상실 한지 오래되는 것 같다

관광지로써의 면모를 갖추던지 아니면 삭제를 해서 나 같이 일부러 찾아와 실망을 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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