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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충주.고구려비 야외전시장

중원탑 공원에서 고구려비까지는 지근거리다

고구려비 하나를 전시하면서 전 고구려의 시대상을 미로처럼 담을 쌓고 모자이크 벽에

역대 고구려왕의 활약상을 나열해 놨다

실내전시관 전경

동명성왕과 유리왕

동명성왕

고구려의 제 1대 왕이자 고구려를 창건한 인물로 성은 고, 이름은 주몽. 해모수가 유화에게 잉태하게

하여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고구려를 창건하고 비류국, 행인국 등의 여러 성읍국가들을

정복하여 연맹국가로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여 국가기틀을 마련했다. 이름은 주몽, 추모, 추몽 등으로

기록되었으며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았다고 전한다.

대무신왕부터 신대왕까지

대무신왕

고구려의 제 3대 왕이자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무휼. 15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동안 동부여와

개마국, 구다왕국을 정복하고 낙랑을 정벌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중앙집권체제의 기초도 대무신왕 때에 마련되었다. 44년 4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고국천왕에서동천왕까지

고국천왕

진대법을 실시와 왕권 강화를 위해 힘쓴 고구려의 제9대 왕으로, 이름은 남무.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며

첫째 아들 발기를 제치고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서 기존 귀족출신이 아닌 한미한 출신의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여 국정을 안정시켰으며, 몰락한 농민들이 귀족들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하는 등 왕권 지지기반을 확대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중천왕에서 고국왕까지

동천왕

고구려의 제11대 왕으로, 이름은 우위거, 위궁, 소명. 산상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관노부 주통촌 출신의

산상왕 소비로, 213년에 태자에 봉해졌으며 부왕인 산상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다.

왕은 위나라가 화친을 희망해오자 위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238년에는 위나라를 도와 공손연을 토벌,

위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위와의 긴장이 고조되어 242년 위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했다. 245년 신라를 공격했다가 248년에는 화친했다. 246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환도성에 쳐들어와 성이 함락되었고, 동천왕은 남옥저 방면으로 피신, 다시 북옥저 지방으로 피난했다.

후에 국토를 회복했으나 247년 서울을 동황성으로 옮겼다.

소수림왕과 광개토왕

광개토대왕

정복사업으로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킨 고구려의 제 19대 왕으로 이름은 담덕. 제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하여,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했으며,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391년 즉위 초부터 예성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던 백제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396년에 광개토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해서

58성 700촌락을 쳐부수고, 백제의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고 많은 전리품과 백제왕의 동생을 비롯한 인질들을

잡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백제와 그 연합세력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고 신라와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수왕

고구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가졌던 고구려의 제 20대 왕.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408년에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413년 광개토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고 광개토왕이 이룩해놓은 업적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외교를 추진하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북으로 부여성, 남으로는 남한강 유역, 서로는 요동, 동으로는 훈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자명왕에서 보장왕까지

그시대의 생활상을 양쪽 벽면에 그림으로 표현

농경생활

귀족의복

왕족의복

말발굽 제작과정

사냥하는 모습

동천왕과 어머니의 관계를 설명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

광개토대왕의 활약상

장수왕의 활약상

살수대첩이야기

589년 수나라의 중국 통일 후 고구려는 수나라와 대결하게 되었다. 598년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자 612년 양제가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우중문·우문술이 30만 명의 군사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자 을지문덕이 우중문을 희롱한 시를 보내면서

거짓 조회 약속으로 수나라군은 철수하였다. 고구려군은 곧 추격전을 벌였고, 수나라군이 살수를 건널 때

맹공을 가하여 궤멸시켰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도착한 수군의 수는 2,700명에 불과했다. 참패를 만회하기 위해 613, 614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거듭된 원정으로 일어난 반란으로 이어짐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벽화

삼족오 

'삼족오'는 3개의 다리가 달려있는 까마귀를 의미한다.

그 이유를 들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태양이 양(陽)이고, 3이 양수(陽數)이므로 자연스레 태양에 사는

까마귀의 발도 3개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 즉 천(天)·지(地)·인(人)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또 고조선 시대의 제기로 사용된 삼족정(三足鼎)과 연관시켜

‘세 발’이 천계의 사자(使者), 군주,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삼족오의 발은 조류의 발톱이 아니라 낙타 같은 포유류의 발굽 형태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이야기

안시성 전투 이야기

안시성전투

644년 11월 당은 약 10만 명의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고구려의 요동공격을 시작했다.

당군은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태종은 안시성을 우회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중앙정부는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은 완강했다. 계속 안시성을 공격한 당군은 성 안을 공격하기 위해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았다. 그러나 흙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하지 못했다. 당군은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실패했고,

이로써 당의 1차 고구려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야외 전시관을 먼저 돌아보고 실내전시관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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