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돌 아들바위공원
강릉시 북쪽의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언덕 끝자락의 주문진의 하얀 등대 너머 위치한
소돌 아들바위공원에서는 바람과 파도에 깎인 절묘하고 기괴한 모습의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도로 쪽에서 보면 거무튀튀하고 날카롭게 각진 바위가 마치 힘센 수소를 연상케 하며, 코끼리바위 등
자연 형성된 신기하고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소돌 바위는 일억오천만 년 쥐라기 시대에 바닷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부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 6리와 12리에 있는 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소 모양으로 생겨서 ‘소돌’이라는 지명이 되었다.
소형 상의 지형은 풍수지리에서 풍요와 자손의 번창을 가져다준다고 믿으며, 돌은 영원히 변치 않는 성질의 상징이다.
소돌 바닷가에 있는 아들바위는 원래 삼치 바위였는데, 1990년대에 아들을 낳게 해 준다는 소문이 돌면서
아들바위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소돌마을은 약 400여 년 전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담한 항구 마을이다.
마을 모양이 소처럼 생겼다고 ‘소돌’이라고 불리었는데, 그보다 가운데 구멍이 ‘뽕’ 뚫린 신묘한 모양의
아들바위 덕분에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소돌항 표지석을 뒤로 하고 소돌아들바위공원으로 들어서면, 바다 위로 힘껏 솟아 나온 바위들이 반겨준다.
1억5000만 년 전 쥐라기 시대, 바다 아래 있던 바위가 지각 변동을 겪으며 수면 위로 솟은 것이란다.
아들바위를 중심으로 아담하게 꾸며놓은 소돌아들바위공원
코끼리바위, 소원바위라고도 불리는 아들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먼저, 오래도록 자식이 없던 부부가 백일기도로 아들을 점지 받았다는 전설이다.
또 다른 전설은 조금 슬프다.
신라시대, 가난한 어부 부부의 3대 독자 아들이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이미 전사했지만, 그 소식을 듣지 못한 부부는 매일같이 용왕에게 아들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의 꿈에 용왕이 나타나 ‘소돌 바다의 큰 바위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기원하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부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소돌 바다 바위에 빌고 또 빌었고, 어느 날 큰 바위에 구멍이
나면서 아들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는 꿈이었다.
다행스럽게 부인은 얼마 후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생김새가 전장에 나갔던 아들과 닮았다.
사람들은 부부의 정성에 용왕님이 아들을 환생시킨 것이라 믿었다.
아들바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연유다.
지척의 해안초소에 오르면 아들바위공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바다전망대와 성황당도 빼놓으면 아쉽다.
소돌아들바위공원은 군사지역인 관계로 오후 7시(4~10월) 이후 입장할 수 없으니 기억해두자.
소돌 포구에 있는 수산물 배양장 옆 죽섬[竹島] 주변으로 물이 통해 있어 목선이 드나들 수 있는 해로가 있고
유지공장 뒤 소나무 밑으로 내려가 뚝 떨어진 곳에 아름드리 말뚝 바위가 있었으나 지금은 깨뜨려져 없다.
이곳은 소를 매어두는 말뚝이다.
또 배양장을 돌아가면 조그마한 샘이 있는데 이곳은 소의 눈에 해당하는 곳이고, 소젖에 해당하는 곳에서 조금
더 돌아가면 산이 움푹하게 들어갔는데 그곳이 소의 앞다리 부분이고, 이곳에서 고개를 넘으면 쇠똥 골이 있다.
이곳은 소의 뒷부분으로, 그 형상을 보면 소가 동쪽을 향해 누웠다고 한다.
옛날 소돌마을 서낭제 때 쇠똥골 우물을 가져다 쓰면 풍년 풍어가 들며 모든 질병이 없어지고 건강하게
살았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두 번에 걸쳐 해당화를 신목으로 모시는 해당화 서낭당에서 서낭제를 지내고,
3년에 한 번씩 풍어굿을 올리는 전형적인 해안 마을이다. 마을은 마치 소가 옆으로 누워 있는 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마을이 소 형상이기 때문에 마을제사를 지낼 때 소고기를 쓰지 않고 닭을 쓰고 있다.
풍수에서 소 형상의 마을은 풍요와 자손의 번창을 이뤄준다고 한다.
소돌마을 사람들이 소와 돌을 가져다가 마을의 이름을 지은 것은 마을을 이상향으로 가꾸고자 한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자로는 소 우(牛) 자에 바위 암(岩) 자를 써서 우암이라 부른다.
소돌 아들바위를 뒤로하고 이곳 무릉계곡 입구에 왔다
삼화사 쪽으로 가면서 바라본 청옥산 어제 아침에 비가 내렸는데
이곳 높은 산에는 눈이 내렸다 4월에 눈이 내린 것은 처음 보네
무슨 나무인지 자세히 보지는 않았는데 빨간 잎이 돋아나고 있다
두타. 청옥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금란정
무른 반석의 많은 암각서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
삼화사 다리에서 바라본 상하 계곡
구름 폭포
구름 폭포를 바라보며 오르는 학소대로 가는 길이 경사진 곳이 나타나니까
학소대까지만 가자해도 모두들 포기를 한다
내 생각 같아서는 베틀바위까지 갔으면 하는데 이번에도 베틀바위는 못 갈 것 같다
베틀바위 가본 지가 20년이 넘는데 이러다 영영 다시 못 오를 것 같다
삼화사 12 지신 상
삼화사 대적광전은 지금 보수 중
대적광전에 모셔진 노사나불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이다.
처음엔 약사불로 불렸는데 불상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긴 명문 161자가 뒤늦게 판독되어 이 철불은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 임이 밝혀졌다.
총 10행으로 161자의 양각으로 새겨진 글자를 판독한 결과 880년 경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의 가르침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161자의 글자가 한자를 우리말 어순에 따라 배열한 이두문이다. 10세기 이후까지 사용된 이두문의
실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어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 불상이다.
이 불상은 1998년에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되었다.
후삼국 통일을 기원한 왕건의 기도처
삼화사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처음에는 흑련 대라고 했으나 864년 범일국사가
중건하면서 삼공 암이라 부르며 사찰의 성격도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었다.
삼공 암은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다. 왕건은 이곳에서 후삼국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후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자 그동안 고려와 후백제, 신라가 가졌던 증오와 갈등을 끝내고 화합의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로 절 이름을 삼화사로 바꾸었다.
이성계는 고려 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할 때 공양왕과 그 마지막 추종세력을 모두 삼척 앞바다에 수장했다고 한다.
그 원귀들을 천도하기 위해 조선 개국 이후 삼화사는 수륙재 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 1747년에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지었지만 1820년에 다시 화재가 나자
1824년 재차 중건했다고 한다.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일본군들이 방화해서 대웅전과 선방 등 200여 칸이 소실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삼화사 주위에는 많은 유적과 설화가 전한다. 고려 말에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는 삼화사 주변에 용안당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를 저술했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탐독하다가
자신이 살던 용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해서 간장암이라는 암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삼화사 삼층석탑
삼화사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 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 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 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 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 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
전전날부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더니 청옥산에는 눈이 내렸나 보다
아래에는 이렇게 금낭화가 피어 있는데......
금낭화
시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10㎞ 지점에 있으며, 계곡 입구의 삼화사에서 상류 쪽으로 약 2㎞ 구간에 걸쳐 있다.
1977년 국민관광지 제1호로, 2008년 명승지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산수의 풍경이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무릉도원과 같다 하여 무릉계곡이라 부르며,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시의 동쪽에 솟아 있는 두타산(1,353m)·청옥산(1,404m)·고적대(1,354m) 등에서 발원한 소하천들이 계곡을
흘러 전천을 이룬다.
계곡에는 태암·미륵암·반학대·능암·쌍 현암 등의 기암괴석과 시인·묵객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무릉반석 및
금란정이 있다. 이 계곡 위쪽에는 3단으로 되어 있는 용추폭포가 있다.
산곡을 따라 나 있는 도로 양안에 취락이 밀집해 있으며, 시내버스가 삼화사 입구까지 수시로 운행된다.
동해시의 유명한 관광지로서 4계절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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