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을 돌아보고 후원(비원)으로 이동을 하려 했더니 12시부터 입장을 한다고 해서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갈 곳도 마땅찮아 전에 돌아봤던 창덕궁과 낙선재를 잠시
돌아보기로 한다
희정당과 선정전
국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하는 공간인 치조(治朝)는 공식적인 행사를 거행하는 정전 영역과 국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편전으로 구성된다. 창덕궁 편전은 인정전 동쪽편에 세워진 선정전이며,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이 법궁역할을 하면서 좁은 선정 전을 보완하기 위해 침전이었던 희정당을 크게 중건하여 신하들과
경연을 하거나 정치를 논할 수 있는 편전으로 활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선정 전은 청색 유리기 와를 하고
있는 크지 않는 규모의 건물이다. 희정당은 침전 건물을 편전으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원래는 앞면 5칸 규모의
경복궁 사정전과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현재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된 것을 중건하면서 서양식
건물의 특징이 반영하고 있으며, 앞면 11칸에 부속건물들을 연결하여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성정각 일원은 세자가 일상생활을 하던 동궁(東宮)이 있던 곳으로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에는 중희당(重熙堂)이 있었고,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차 답사시에는 희우루(喜雨樓) 앞에서 때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기쁨을 주는 비는 아니었다.
좌측 건물들은 선정전과 희정당 우측 건물은 동궁전
성정각 오른편에는 사대부 사랑채나 정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누마루를 세워 놓고 있다.
앞면 1칸 옆면 3칸의 건물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라고 현판을 달았다.
여름 동안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경연이 열리거나 손님을 맞는 장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추리
붓꽃
.물싸리
작약
선정전(宣政殿)
선정 전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위치한 건물로 창덕궁의 공식적인 편전이다. 이곳에서는 3품 이상
당상관들이 국왕과 함께 정치를 논하는 곳이다. 국왕이 이곳에서 신하들과 정치를 논할 때 사관이 국왕의
좌. 우에서 사초를 기록하였 하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아래에 있던 ‘인경궁’ 건물을
헐어 중건한 것을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건물이라고 한다. 선정 전은 또한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색 유리기 와를 얹은 건물인데, 중국에서 ‘회회청’이라는 안료를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3칸으로 다포계 공포에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으며, 출입문과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희정당(보물 815호)
원래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좁은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편전으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의 화재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건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전면에 자동차 승하차를 위한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인정전
창덕궁 인정전은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순조 3년 선정전 서행각에서 난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 후, 철종 7년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은 정조 6년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낙선재와 창경궁으로 가는 문
낙선재
조선 제24대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다.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며 창살과 벽체의 무늬,
평원루(平遠樓)의 건축양식 등에서 청나라의 영향이 엿보인다.
낙선재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썼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수렴청정이 끝난 순원왕후를 모시던 곳이다. 후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기거했던 곳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순정효황후가 기거하던 곳이다
수강재에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제23대 순조의 왕비)가 거처하였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대한제국의 덕혜옹주가 말년에 폐인이 되어 귀국하여 한 많은 여생을 마친 곳이다.
낙선재 화계 뒤편에는 칠분서, 삼삼와, 승화루와 중국품의 육각형 정자인 상량정이 있다.
이들 건물들은 낙선재 뒷편에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에 속한 건물들로 서적 등을
보관하고, 학문을 논하던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좌측은 후원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창경궁으로 가는 길이다
12시 10분 전에 도착 대기하다 들어갔다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쪽동백이 있어 담아보고
무엇보다 창덕궁의 백미는 바로 '후원(後苑)'이다. 창덕궁 후원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했는데, 명칭은
‘후원’이 가장 많고 이외에도 ‘금원(禁苑)’, ‘북원(北苑)’ 등이 있다. ‘금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원의 이름을 두고 갑론을박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秘苑)’이기도 했다. 이름이야 어찌 됐든, 후원은 현재도 입장이 까다롭다.
부용정
후원 매표소에서 티켓을 발급받고, 완만한 언덕을 넘으면 연꽃을 의미하는 연못 ‘부용지’가 보인다.
'창덕궁 달빛기행' 때, 나오는 단골 사진이기도 한 이곳은 네모난 연못 가운데 소나무가 인상적인
동그란 섬이 있다. 1792년에 정조는 이곳을 '부용정'으로 이름을 명명했고, 시를 짓고 읊었다.
때로는 꽃구경과 낚시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순조는 문무 신하들의 시예를 겨루게 했는데,
후원은 단순히 왕의 휴식공간을 넘어 과거 시험이 열리기도 했고, 왕과 중전이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고자 농사를 짓기도 했다.
부용지와 부용정
부용지는 길이 34.5m, 폭 29.4m의 장방형 연못으로, 가운데에는 도가 사상을 상징하는 직경 9m의 원형 인공섬이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이 섬에 현종 때 지은 청 서정(淸暑亭)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을 사각형으로 만들고
그 안에 둥근 섬을 두는 것은 천 원 지방(天圓地方)이라는 동양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의 물은 지하수로 공급되지만 비가 올 때는 서쪽 계곡의 물이 용머리 모양의 입을 통해 들어오고 동쪽의
수구를 통해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부용지를 둘러싼 장대석 중 부용정 쪽 한 부분에는 물고기가 조각되어 있다.
부용정은 크게 보아 十자형 평면을 가진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남쪽 면에 모양을 내기 위해 다각(多角)으로
접었기 때문에 복잡한 형상을 지닌다. 북쪽 면은 부용지 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육각형 돌기둥을 세운
후 그 위로 건물을 얹혔다. 돌기둥 위에 올라서 기둥의 바깥으로는 계 자각 모양으로 장식을 했다.
연못에 떠있는 부분은 다른 곳보다 바닥을 높게 하였다. 평면의 둘레를 한 바퀴 돌아 쪽마루를 설치해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기둥은 가는 원기둥을 사용했고 주두는 육각형 모양으로 얹었으며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가 올라간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평면의 형태에 따라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다. 창호는 사방에 모두 사 분합 세살문을 달아 전체적으로 개방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보물 제1763호. 창덕궁 부용정은 주합루 남쪽 부용지(芙蓉池)에 면한 누각이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한다.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부용정은 원래 숙종 33년(1707) 택 수재(澤水齋)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 초입에 천 원 지방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대표적 연못인 부용지에 지은 마루식
정자이다. 연못에 인접하여 자연의 선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 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다. ‘十(십)’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 공간 구성, 건물의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로
건물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역사적·예술적·건축적으로 보존가치가 높다.
오른쪽 물가에 있는 사정기 비각이다. 비석에는 부용지를 만들게 된 배경과 과정이 새겨져 있다.
세종 6년에 영순군과 조산 군을 시켜 우물을 찾게 했는데 그때 찾아낸 4곳의 우물에 마미. 파려. 유리.
옥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좌 규장각 각신들이 근무했던 서향각. 중앙 어수 문과 주합루. 우 영화당
주합루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2층 누각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형태인 건축 양식이다.
1층은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奎章閣)이고 2층은 열람실이었는데, 이 열람실을 주합루(宙合樓)라고 한다.
지금은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합루로 오르기 위한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철학을 보여준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규장각을 설립했다. 정조실록에 나온 "1776년 9월 25일 정조대왕 즉위 년에 규장각을
창덕궁 후원의 북쪽에 세우고 제학, 직제학 등의 관원을 두었다"라는 기록을 보면 정조는 이미 세손 시설부터
규장각 건립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 정조는 규장각에 대한 애정이 이토록 남달랐을까?
정조에게는 규장각이 선대왕들의 어필을 보관하는 단순한 왕실 도서관이 아니었다.
당시 조정은 군사권을 쥐고 있는 병조부터 최고 인사권자인 이조판서 등 거대 여당은 노론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조의 왕위 등극을 끝까지 방해한 주역들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정조에게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시켜줄 새롭고 젊은, 그러면서도
현 정치에 물들지 않은 젊은 인재 양성이 매우 중요했다.
정조는 많은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 나이에 관계없이 전국의 유능한 인재들을 뽑았다.
그리고 그렇게 뽑은 인재들은 노론 세력들이 우글거리는 창덕궁 인정전 근처가 아닌 깊은 후원의 명당자리에
규장각을 건립해 연구를 시켰다. 신하들이 볼 때 규장각은 그저 젊은 학자들이 연구하는 곳이겠지 생각을
했겠지만 정조에게 규장각은 개혁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200여 년 전 이 규장각에서 밤을 새우며 일했던 학자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신분제도 같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 이념이 아니라 실제 백성이 배불리 먹고사는 세상이었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북학파 학자 또는 실학자라고 부른 사람들이다. 박지원은 당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였다.
박제가, 유득공 같은 최고의 실학자들이 제자이었으니 실학의 대부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가 정조의 명으로 1780년(정조 4) 북경을 갔는데 이때 청나라 황제가 피서를 떠나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 지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되는데,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여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정치, 경제, 병사, 천문, 지리, 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서술하며 실학사상을 소개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당시 농촌 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는데, 그는 기본 생산 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 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당시의 농업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한다.
이는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양반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개혁론이었다. 그러나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그는 유배생활 동안에도 정조와 규장각 그리고 부용지(연못)에서의 추억을 떠 올리며 지인들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자주 얘기를 해주었다고 한다. 대자연님의 글에서
영화당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2년(1692)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화당은 서쪽에 연못이 있고 동쪽에는 널찍한
춘당대(春塘隊)가
있어 역대 임금이 이곳에서 많은 행사를 베풀었다
영화당
영화당은 경복궁 경회루처럼 국왕이 신하들을 비롯하여 일반인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열거나,
특별 과거를
실시하고, 활쏘기 대회나 춘당대에 있던 논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였던 곳이다.
애련지 부근에는 순조의 아들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가 조용히 공부하기 위해 조성한 작은
공간인의두합을 볼 수 있다.
의두합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금마 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금마 문은 중국 한나라 때 미앙궁에
있던문으로 왕세자가 있음을 상징한다.
애련지(愛蓮池)와 의두합(倚斗閤)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1809~1830)는 총명하고 인품이 높아 18세에 순조를 대리하여 정치를 지휘하다
22세로 요절한 왕자였다. 이곳에는 숙종대에 건립한 애련정이 있었고, 효명세자는 1827년부터 여러 시설물을
세워 새로운 정원을 만들고 학문을 연마하며 정치를 구상했다. 그가 공부방으로 사용하였던 의두합은
단청을 하지 않아 단출하고 소박하며, 또한 독서와 사색을 위하여 궁궐 내 유일한 북향 건물로 되어 있다.
단칸의 아련정 역시 작지만 애련지 연못에 반쯤 걸친 모습은 경쾌하며 정자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절경을
이룬다. <출처:문화재청>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독서를 하기 위해 지은 공간으로 앞면 4칸에 누마루가 있는 사대부 사랑채 형태를 하고
있는 기오헌(寄傲軒)과 이에 딸린 1칸 반짜리 작은 건물인 운 경거(韻磬居)를 볼 수 있다.
궁궐 전각 중 낙선재나 연경당처럼 단청이 없는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건물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의두합이
가장 소박하고 검소해 보이는 장소이자 건물이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 청정하던 시절 조용히 독서를 하던 장소였던 기오헌.(좌측 건물)
기오헌 옆으로 궁궐 건물 중에서도 가장 작은 건물인 운 경거가 있다. 앞면 1칸 반의 아주 작은 건물이다.(우측 건물)
불노문
의두합 옆 공간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특이한 출입문인 불로문’不老門’을 볼 수 있다.
애련지
창덕궁 후원 두 번째 공간은 숙종대에 조성한 작은 연못인 애련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다.
애련지는 일반적인 연못과는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네모난 연못으로 사방에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한쪽 편에는 숙종대에 조성된 앞면 1칸짜리 정자인 애련정이 있다. 이 공간은 주로 순조의
아들로 정조를 본받아 개혁정치를 꿈꾸다 어린 나이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손길이 많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아련정
아련정(愛蓮亭)에 숙종대(1692년)에 연못가에 지은 것으로 앞면 1칸, 옆면 1칸에 사모 지붕을 하고 있는
소박한 정자이다. ‘애련(愛蓮) 중국 송의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용정과 마찬가지로
기둥 초석 2개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연경당 앞마당에서 보이는 애련지.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애련지 안쪽으로는 낙선재와 함께 단청이 없는 사대부 저택처럼 지은 이궁(離宮)인 연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운 산, 풍요로운 숲, 그리고 연못과 정자가 이루어내는 이상적인 환경 속에 자리 잡은 이 집은 건축적으로도
뛰어난 짜임새와 만듦새를 보여 주고 있다.
건축의 향은 정남향으로 하고, 북·동·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 막힌 곳에 북서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남쪽, 즉 집 앞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물길을 내어 풍수적으로 명당을 형성한 다음, 방위에 맞추어 직각으로 건물군을
배치하였다.
배치 형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예에 따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르고, 중문(中門)이 있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을 좌우로 벌려 냈다.
궁궐의 후원 안에 지어졌으면서도 사랑채·안채·안 행랑채·바깥 행랑채·반빗간·서재·후원·정자 및 연못을 완벽하게
갖춘 주택건축이다. 이른바 99 칸집이라 불리고 있으나 현재 건물의 실제 규모는 109칸 반이다.
연경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자 집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유교의 내외 법(內外法)에 따르면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사랑채와 안채 사이를 담으로 막고
출입문을 설치하는데, 연경당에서는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은 사잇담을 설치하여 구분하고 있지만, 건물은
붙여지어 사랑채 내부에서 안채 내부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 안 동쪽에는 누마루를 두었고, 그 동쪽 마당에 선향재(善香齋)라는 서실(書室)을 배치하였으며,
선향재 후원에 높다란 화계(花階)를 쌓아 정원을 만들고 그 위쪽 언덕에 정자를 지어 휴식처를 마련하였다.
안채의 뒤쪽으로는 담을 쌓아 독립된 구역을 만드는 한편 바깥 행랑채 동쪽 부분에는 마구간과 가마 두는
곳도 마련하였으며, 이곳의 바깥벽은 나무판자로 막아 집의 전경에 변화를 주는 의장적 요소로 삼았다.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한껏 갖추고 있는 데 비하여, 이 집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농수정(濃繡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납도리집이다.
그러나 문·창문·담장 쌓기·문양전(文樣塼)의 벽이나 기단·주춧돌·기둥·보·서까래 등에서 보이는 다양하면서도
세련되고 섬세한 기법은 일반 사대부 주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모습이다.
더구나, 농수정 주변의 연잎 동자기둥을 갖춘 돌난간, 사랑 마당에 단정하게 배열된 괴석(怪石),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長陽門) 앞 양쪽에 놓인 궁정 양식의 정료대(庭燎臺) 등은 여염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집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창덕궁 연경당은 1828년(순조 28)에 창건되었으며,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하여 세자
(1830년에 죽은 뒤 익종으로 높임)가 왕께 요청한 것이 건립동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비고』·『궁궐지』·
『순조 무자 진작의궤부편(純祖戊子進爵儀軌附編)』·『순조실록』·「동궐도」 등을 종합하여 해석하여 보면, 연경당은
1827년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되었으며, 짓게 된 동기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 의식을 맞아서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연경(演慶)’이라는 이름도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헌종 12년(1846) 초에 연경당이 신건(新建) 되었다는 기록과 고종 2년(1865)에 수리 공사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현재와 같은 주택으로 완성된 시기는 고종연간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도 현존하는 연경당에 대한 사료로는 1890년대 이후에 제작된 『궁궐지』와 「동궐 도형(東闕圖型)」및
건물의 기둥에 걸어놓은 주련(柱聯) 등이 남아 있어서, 원래의 연경당이 언제, 왜 주택건축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데 기초자료의 구실을 하고 있다.
기미 헌
창덕궁 후원
태종의 창덕궁 당시에 조성되어 창덕궁과 창경궁의 공동 후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정자가 불타 버리고, 1623년 인조 때부터 역대 왕들에 의하여 개수.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삽입시켜, 최소의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서 자연을 더 크게 완성시킨 절묘한 솜씨를 자랑한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드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결국은 큰 자연인 뒷산 매봉으로 연결된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인데 비해, 창덕궁 후원은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 정원이었다. 또한 여러 복합적인 기능을 수용한 장소이기도 했다.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사색에 잠기던 곳이었고 때로 연회를 열고 활쏘기 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왕이 참관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행해졌고, 왕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를 짓고 누에를 치기도 했다.
백당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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