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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왕곡마을

화진포에서 이곳 왕곡마을로 왔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봐왔던 왕곡마을을 

드디어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여러 민속마을을 둘러봤지만 강원도 쪽은

처음이 아닌가 생각이된다

왕곡마을 저작거리는 운영을 중단하고 있다

왕곡마을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5㎞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닷가 쪽으로 약 1.2㎞ 떨어진

곳에 석호(潟湖)인 송지호가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는 금강산이, 남쪽으로는 설악산이 위치해 있으며,

마을 주변을 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분지형태의 마을이다.

과거에는 송지호 서쪽 길을 이용했으나, 동해안의 국도 7호선 개통 이후 이를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도보로 약 20분 내외가 소요된다.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분인 양근 함 씨(楊根咸氏) 함부열(咸傅烈)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인근 간성 지역에 낙향하였고,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마을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현재는 19세기 전후에 걸쳐 지어진

기와집 및 초가집 50여 채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주요 성씨로는 양근함씨 및 강릉 최 씨(江陵崔氏)가 있으며 이밖에 다양한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2000년 1월 7일 중요 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메밀전병. 꼬물이 만두. 비빔밥과 막걸리로 점심식사를 했다

송지호 북쪽에 들어선 왕곡 전통마을은 강원도 북부 해안 지방으로 피서여행을 갈 때

꼭 한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해변과의 거리는 불과 1.5km인데 묘하게도 마을에서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다.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들이 마을 둘레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덕에 한국전쟁 때에도 대부분의 집들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고택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전통마을 분위기를 잘 간직하게 된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순천 낙안읍성 마을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번듯한 외관을 갖춘 집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일단 마을 안에 들어서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 빠져든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은 총 50가구이고 기와 32동, 초가 9동이 있다. 이 동네가 그리 부자

동네도 아닌데 기와집이 제법 많았던 것은 더 안쪽의 구성리 마을에 기와를 만드는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기와집들은 방과 마루, 부엌과 외양간이 전부 한데 붙은 강원 북부 지방의 고유 가옥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구조는 추운 겨울이 긴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

앞에 보이는 것처럼 이곳 한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본체에 지붕을 덧대어 만든 외양간이다.

이런 지붕을 가적 지붕이라고 하는데, 강원도에서만 볼 수 있는 지붕 형태다.

마을 위쪽에는 양근 함 씨, 아래쪽에는 강릉 최 씨가 집단으로 모 여사는데 함 씨가 최 씨보다 조금 더 많다.

그밖에 전 씨와 김 씨 성을 가진 이가 각각 2가구, 박 씨가 1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효자각이 2개나 있는 효자 마을이기도 하다.

예스러운 분위기를 간직한 마을이라 때때로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무대로 등장한다.

TV 문학관 - 홍어를 비롯 배달의 기수 등 다수의 반공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엑스트라로 나선 경력들을 자랑하기도 한다.

왕곡마을 사람들의 주업은 논농사. 작게는 1천 평, 크게는 1만 평 정도의 논농사를 짓는다.

4년 전만 해도 감자를 많이 경작했지만 판로가 없어 지금은 식구들 먹을 정도로만 재배한다.

해풍이 불어오는 데다 일교차가 심한 기후 탓인지 잡곡 농사도 잘 안 돼서 밭에서조차 밭벼를 재배한다.

마을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대문이 없으며, 따라서 앞쪽에는 담장도 만들지 않았다.

겨울철 바람과 눈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것인데, 충분한 일사량을 확보하는 한편, 많은 적설량으로

인한 외부와의 고립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다.

 

겨울철 추운 날씨 때문에 부엌에 외양간이 붙어 전체적으로 ㄱ자 형태의 평면을 보이고 있으며, 안방과 도장방,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한 건물 안에 나란히 배치하여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산간지방에서의 겨울철을

가옥 내부에서 지낼 수 있게 배치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가옥에서는 높은 기단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많은 적설량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중요 민속문화재 제235호. 마을은 중앙의 개울을 따라 이어져 있는 마을 안 길을 중심으로 산을 등지고 있고,

그 내부에 가옥들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형태이다.

 

가옥과 가옥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텃밭이 있어서 이를 경계로 가옥들이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 도장방, 사랑방, 마루, 부엌이 한 건물 내에 수용되어 있으며, 부엌에 외양간이

붙어 있는 함경도·강원도·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양통 집 구조이다.

 

마을 안길 과 바로 연결되는 앞마당은 가족의 공동작업 공간 역할을 하면서 외부인에게 개방적이었던 반면에,

비교적 높은 담으로 둘러 쌓인 뒷마당은 여성들만의 공간으로 폐쇄적이다.

이런 배치는 뒷마당은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이도록 하여 여성들의 가사 및 노동활동을 배려한 구조이다.

 

왕곡마을은 집집마다 굴뚝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는데, 이 중 특이한 것은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

올리고 항아리를 엎어 놓아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시설한 것이다.

 

안방의 난방은 부엌에서 하도록 시설하였지만, 부엌을 기준으로 사랑방까지의 거리가 멀어 사랑방은 별도로

외부에서 난방을 할 수 있도록 별도의 아궁이를 시설하였다. 이 아궁이 위로는 가적(집의 측면 벽에 달아

외쪽지붕으로 꾸민 것)을 달아 비나 눈을 막아 아궁이에 물이 차는 것을 방지하는 등 원활한 난방을 도모하였다.

 

외양간은 부엌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고 부엌 앞으로는 외양간을 붙여 온기를 유지했다.

부엌에서 통하는 뒷마당은 여성들의 공간으로서 외부의 시선 차단과 겨울의 북서풍을 막기 위해 비교적 높은

담장을 만들었으며, 일부에서는 산죽(대나무)을 이용하여 시설하기도 하였다.

함부열은 인근 마을인 금수리로 들어갔지만, 이후 함부열의 둘째 아들인 함영근(咸永近)이 지금의 왕곡마을에

들어오면서 양근 함 씨의 동족마을이 시작됐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한옥마을은 거의가 양반 마을이지만,

왕곡마을은 그렇지 않다. 조선 시대 내내 누구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탓이다.

이 때문에 도무지 뜻을 짐작하기 어려워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당호도 눈에 띄지 않는다

또 거창하지 않은 택호에서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관직을 받은 적이 없으니 택호 라야 그저 '논 건너집', '누렁개 집', '큰상나말 집' 이런 식이다.

어딘지 어수룩한 친근함이 묻어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여느 한옥마을보다 마을이 훨씬 고즈넉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평화로움의 견고 함이다. 

한국전쟁 때에는 바로 옆에서 밀고 밀리는 전투가 치열했지만 이 마을의 평화를 깨지 못했고, 거친 싸움에

지친 동학혁명군도 이곳의 평화에 잠시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이를 기념해 세운 마을 입구의 기념비에는 견고한 평화에 대한 마을의 신뢰가 담겨 있다.

 

또 가깝게는 고성 산불이 일대를 태워서 두어 번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이 마을을 범하지는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모두 풍수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더구나 마을이 특별한 인물을 내지 않고 깊숙하게 숨어 있던 탓에 강원도의 전통적인 집 양식을

비교적 잘 보존할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세상 모든 초가가 양철지붕으로 머리를 새롭게 단장할 때조차 이 마을에서는 문화적인

평화가 잘 유지되었다.

함 씨보다 100여 년 늦게 이곳에 들어온 또 하나의 성씨 강릉 최 씨(江陵 崔氏)가 마을의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이후 함 씨와 최 씨 두 성씨가 서로 교류하며 하나가 되어 이곳의 전통 한옥을 굳건히 지켜 오고 있다.

두 개의 성씨가 나란히 마을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비슷한 듯하지만 두 마을은

확연히 다르다. 양반집과 양반을 뒷바라지하는 사람들의 거주공간이 명확히 구분되는 양동마을과 달리

이곳에서는 모든 집들이 위아래 없이 이웃이 되어 하나가 된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

성취해 온 평화의 밀도가 양동마을보다 훨씬 촘촘하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의 안온함에는 숨은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왕곡마을은 양반이 아닌 양민이 살아온 곳이어서 양동마을의 향단이나 관가정처럼 이 집만이 특별하다

할 만한 집이 없고 모두 그만그만하다. 특별히 어느 집을 내세워 집안의 내력과 건축적인 의미를 미화할

필요가 없는 민속 주택이니, 굳이 어느 한 집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할 까닭도 없었다. 마을 전체를

중요 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한 연유다. 그래서 한옥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감상하기보다는

마을 전체를 하나로 묶어, 그 안에서 이루어지던 삶을 더불어 감상하는 편이 좋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마을에서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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