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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창경궁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향이며,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대한민국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영조는 홍화문 앞에서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지난다. 조형미로 이름난 옥천교를 건넌다. 일직선상에 명정문과 명정전이다.

명정전 주위로 문정전과 경춘전과 환경전·통명전 등 창경궁 대부분의 전각이 자리한다.

이를 기준으로 남쪽에 동궁 터와 궐내각사 터가, 북쪽에 내전 터 일원과 춘당지·대온실 등이 있다

명정문

명정문(明政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출입문이다. 명정문은 흥화문과 같이 동향을 하였는데,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행각은 2칸 폭의 복랑이며, 경복궁의 행랑에 비해 높이가 낮다.

옥천교

창경궁 금천 위에 놓은 다리이다.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족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창경궁 살펴보기

홍화문(弘化門) : 창경궁의 정문. 다른 궁궐과는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음.

옥천교(玉川橋) : 정문인 홍화문에서 명정문 사이의 금천에 설치된 다리.

명정문(明政門) :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지나 명정전으로 가는 출입문.

명정전(明政殿) : 창경궁의 정전. 이곳 역시 남쪽을 향하고 있는 다른 궁의 정전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음.

문정전(文政殿)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편전.

빈양문(賓陽門) : 외전과 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문. 왕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됨.

숭문당(崇文堂) : 임금이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던 곳.

함인정(涵仁亭) :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편. 영조는 이곳에서 문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함. 내부에는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사계절에 관한 시, ‘사시(四時)’가 춘하추동

한 구절씩 방위에 맞춰 동남서북에 배치되어 있음.

통명전(通明殿) :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

경춘전(景春殿) : 창경궁의 내전.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임.

환경전(歡慶殿) : 창경궁의 내전. 임금이 늘 거처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 :

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함.

춘당지(春塘池) : 큰 연못과 작은 연못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음.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內農圃)라고

부르던, 왕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정을 살피던 논이었으나 1909년 일본인들이 이곳을 파서 연못을 만든 것을

이후 1986년에 한국식 연못으로 재조성한 것. 춘당지 북쪽에 인접한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춘당지라 부르던

원래의 연못임.

대온실(大溫室) : 1909년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원. 일제강점기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조성하면서 함께

만든 한국 최대의 목조구조 식물원.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음.

관덕정(觀德亭) :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 인조 20년1642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현종 5년1664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함.

궐내각사(闕內各司) : 왕실과 관련된 여러 관청이 있는 건물. 창경궁의 궐내각사는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음.

 창경궁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곳에 자리하고 있다. 

또, 고려의 국새를 넘겨받은 수창궁(壽昌宮)의 청심정(淸心亭)과 동일한 이름의 정자를 가까이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창궁(壽昌宮)과 매우 유사한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성종 15년(1484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한 건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중층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보다

격식이 낮다. 특이한 점으로는 건물 뒤쪽에 퇴칸 형식의 월랑을 두고 있으며, 건물 내부의 앞쪽으로 고주를

세우고 뒷부분 기둥은 모두 생략하였고, 정면 양 협칸의 벽면 하부를 전복돌로 쌓아 점을 들 수 있다.

 명정전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제외한 세 면에만 경사지에 맞추어 월대를 조성하였고, 좌향도

지세에 흐름을 맞추었기 때문에 정문인 명정문의 중심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다.

용상

드므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서 화마가 물에비친 제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한다는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큰 방화수통이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지은 효성

지극한 궁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을 비롯한 난리와 순조 때의 큰불로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은 대개 순조 임금이 중건한 것들이다

숭문당 뒤편

숭문당 밖으로는 내전의 전각들이 전개된다. 숭문당의 서북쪽으로 함인정이 있고, 그 좌우로는 담이 둘러져있다.

이 담 뒤편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이 있다.

환경전에서 통명전으로 이르는 일대는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곳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식이

높게 잘 다듬어져 있다.

함인정

원래 연산군때 지은 인양전이 있던 터이나 왜란때 타버렸다.

인조가 인조반정후 인왕산밑에 인경궁에서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함인정 부근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 함인정은 전면 열린공간이 아니었다. 3면은 막힌 공간이었다.

함인정과 환경전 사이에 공묵합이라는 전각이 있었으나 소실되어서 현재는 없다.

저넘어에는 낙선재가 위치하고 있다

경춘전

원래 대비전으로 쓰인 건물이다. 인수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혜경궁 홍씨가 거쳐하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헌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인수대비와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환경전

환경전 또한 침전임에도 불구하고 용마루가 있다. 또한 중종이 환경전에서 훙서하였으며, 세자 시절의

 광해군, 광해군의 세자 이지소현세자, 등이 거처하였다가 소현세자 사후 1652년(효종 3년) 14세까지

 숭선군이 여기서 거처하였다.

창경궁은 유독 빈터가 많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남쪽의 내전도 그 터만 남았다.

더불어 궐내각사 인근의 동궁 터 일원은 이제 창덕궁에 속한다.

행각들이 복원되지 않아 명정전을 제외하고는 전각 주변도 휑하다

춘당지로가는 주변의 소나무들은 이제 완전 숲을 이루고 있다

통명전

보물 제818호. 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는 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16년에 재건하였으나,

다시 정조 14년(1790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1834년)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퇴칸이 설치된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동궐도에는 이 건물이 터만 남은 것으로 보아 순조33년 이전에 불탄것으로 보이며 숙종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모해하기 위해 통명전 뜰에다가 저주하는 물건을 심어다놓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1830년(순조 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거처한 궁49)이 있던 곳이다.

 세 사람을 위하여 따로 지은 대비궁,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구별지으려고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에는 창덕궁의 부속 궁궐로 활용되었으므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렸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9]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창경원으로 전략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발굴, 복원 공사로 명정전, 문정전 일곽만이 복구되었다.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다.

쪽동백

산사나무

창경궁에는 연못이 두 개 있다. 앞쪽의 큰 연못은 원래 왕이 농사를 짓던 열한 개의 논이 있던 자리다.

1909년 일제는 논 뒤쪽의 작은 연못인 춘당지의 물을 끌어와 큰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지난 1986년 복원 작업 때 연못 가운데 우리 전통 양식을 빌려 섬을 조성하고 주변으로는 전통정원수인

왕벚나무를 심었다. 궐내에 있던 기존의 벚나무는 대부분 제거했다.

연못의 동쪽 길가에 있는 백송도 사계절 시선을 끈다. 흰빛의 수피를 자랑하는 희귀한 소나무다.

햇볕을 받아 물을 머금은 듯 반짝인다

수초도 있으려니와 물빛이 흐려서 반영을 시원찮은데 잉어마저 파문을 일으키고 다닌다

하얀철쭉이 햇볕에 반사돼 순백이 아름답다

부족하지만 이렇게 반영도 담고

백당나무

뻐꾹채

굵은 줄기가 땅속 깊이 들어 있으며, 줄기에는 거미줄 같은 흰 털이 밀생해 회백색으로 보인다.

잎은 피침처럼 생긴 타원형이나 가장자리가 깃모양으로 깊게 갈라져 어긋나고,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작아진다.

줄기 끝에 지름 6-9cm의 큰 꽃이 곧게 핀다. 두상화서의 꽃은 반구형 갈색 총포에 의해 층층이 싸여 있다.

꽃은 늦봄 5월에 피기 시작해서 여름 7월까지 볼 수 있다. 진분홍 혹은 연자주색 꽃이 줄기 끝에 한 송이

피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수많은 작은 꽃이 한데 몰려 머리 모양을 한 두상화서다.

뻐꾸기가 울면 그 소리를 듣고 피어나는 꽃이라 하여 ‘뻐꾹채’라고 불린다.

또 총포잎이 겹쳐진 모습이 마치 뻐꾸기의 앞가슴 깃털을 닮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부채붓꽃

민백미꽃

풀밭이나 숲 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는 곧추서며, 높이 30-60cm, 가지가 갈라지지 않는다.

전체에 가는 털이 난다. 잎은 마주나며, 타원형 또는 난형, 길이 8-15cm, 폭 4-8cm,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 앞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연한 녹색이다.

꽃은 5-6월에 피며, 줄기 끝과 위쪽 잎겨드랑이에 산형으로 달려 전체적으로 취산꽃차례를 이루고 흰색이다.

화관은 5갈래로 갈라지며, 털이 없다. 열매는 골돌이고 털이 없다.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한다.

일본, 만주, 우수리에 분포한다.

백송

겉시식물 구과목 소나무과의 식물. 학명은 ‘Pinus bungeana’이다.

학명의 ‘Pinus’는 켈트어 핀(Pin)에서 파생되었는데, 산에서 나는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bungeana’ 같은 경우에는 중국 식물을 연구하던 러시아의 식물학자 분게(Bunge)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이 원산지이기 때문에 한국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말인 백송은 하얀 소나무라는

뜻으로, 나무의 껍질이 처음에는 밋밋하지만 자라면서 점차 큰 비늘조각처럼 벗겨지고 회백색을

띠는 데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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