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북.대구

경주 양동마을 2

 

두곡 고택 입구 밭에 감자밭이 있는데 꽃이 피어 있어 한컷

두곡 고택을 나와 수졸당으로 왔다

수졸당 고택은 현재 후손이 기거를 하고 있어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위아래 사진은 2015년도에 왔을 때 찍은 사진임

수졸당 오르는 언덕에 핀 찔레꽃

옛날부터 사용하던 우물 

분홍 낮달 맞이 꽃(꽃 달맞이꽃)

수백당(송첨종택)

경주 손 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은 집이다.

양민공의 아들 손중돈 선생과 외손인 이언적(1491∼1553)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뒤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뒤편 정원에는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있다.

대개 사랑방은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집은 작은 사랑을 모서리

한쪽으로 두어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종의 마루 통로 형식으로 꾸민 점

역시 특이하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 역시 뛰어난데,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백당 앞 향나무

 

서백당 사당

백정화

삼색병꽃

 

무첨당 사랑채

무첨당 안채

사당

외부에서 바라본 향단(캡처한 사진)

향단은 철저히 차단을 시켜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

관가정

관가정 향나무

송첨 종택 향나무 하고 비슷한 연대에 심은 것이 아닐까?

관가정 전래석

이 비각은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중실한 노(奴) 억 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 7년(1783)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정충 비각은 앞면과 옆면이 각 1칸으로 팔작(八作) 지붕이어서 가구 방법이 특이하다. 옆에 있는 노(奴)의 비를

세운 충노각(忠奴閣)은 정충각(旌忠閣)보다 건물이 못한 편이다.
낙선당은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현손으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무과에 합격하여 남포 현감(

藍浦縣監)을 거쳤다.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利川)의 쌍령(雙嶺) 전투에서 따라온 노(奴) 억 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옷가지만으로 장례를 지냈다. 비의 글은 우승지(右承旨) 이정규(李鼎揆)가

짓고 글씨는 정충 필(鄭忠弼)이 썼다.

 

양동마을

한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조선시대 양반 씨족마을로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재상이자 성리학자요 영남학파의 선구자가 되신 회재 이언적 선생을 배출한

6대 국반(國班) 여주 이 씨(광산 김 씨, 반남 박 씨, 은진 송 씨, 덕수 이 씨, 진보 이 씨가 6대 국반), 이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 된 우재 손중돈 선생을 배출한 명문 도반(道班) 경주 손씨 양성이 서로 협동하고

경쟁하며 6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영남 남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문과 31명 포함 과거 급제자가

총 116명에 달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학자와 충절대의 명장,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면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경북.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양서석지  (42) 2022.08.05
영양선바위 유원지  (29) 2022.08.03
경주양동마을  (0) 2022.05.29
경주 기림사  (0) 2022.05.09
경주 감은사지와주상절리  (0) 2022.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