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들마을로 이동하는 중 길거리에 있는 남자현 지사님 기념관이 공사를 하고 있어 지나쳤는데
주실마을 가기 전에 생각이 달라져 한번 들려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다시 이곳으로 왔다
전에 남자현 지사에 대해서 한 번 보았던 기억이 있다(7/29)
남자현지사 동상
남자현 지사 생가지 좌측으로 손에 혈서 ‘조선독립원’ 천조각을 형상화 한 동상이 있다.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의 리튼 경이 하얼빈에 오자 무명지를 끊어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이라고
혈서를 쓴 뒤 이를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고 한다.
남자현 지사 생가 대문
본채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과 홑처마로 토담장을 두른 독립적인 건물인 남자현 지사 생가.
캡처한 사진
남자현 지사는 1872(고종 9)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에 주력한
독립운동가이다. 남편이 일본군과 싸우다 죽자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고 을사조약 이후
의병으로 활동하던 친정아버지를 도와 장정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했다.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당한 투사들을 간호했으며,
지린성에 교회를 세우고 여성 교육회를 조직해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 활동을 했다.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의 리튼 경이 하얼빈에 오자 무명지를 끊어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이라고
혈서를 쓴 뒤 이를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다음 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강인한 의지로 단식투쟁을 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33년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의 여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전에는 이러한 영정 사진이 있었는데 공사로 인해서 옮기고 볼 수가 없다
남자현 지사는 일본 군대가 만주국 정부를 수립하고 만주국 전권 대사로 일본 육군대장 무 등신 의가
관동군 사령관을 겸하여 신경에 주재하던 1933년 3월 1일 폭탄을 던지려 신경 일본대사관에
잠입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셨다.
남자현 지사는 일본 영사과에 구금되어 5개월간 갖은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며, 하얼빈 감옥으로
옮기게 되자. 왜경의 음식 차입을 일체 거절하고 말하기를 “원수 도적을 토살 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잡혔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라”하고, 단식투쟁 15일 만에 거의 죽은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남자현 지사는 병보석으로 출감 후 하얼빈 시내 조선 여관에서 교포들의 간호를 받다가 62세의 나이로
순국하셔서 한국인 교포들이 힘을 모아 하얼빈 외국인 묘지에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추모각은 현재 헐리고 없다 그 자리에는 기념관을 을 짓고 있는 중
뒤에 지금 현대식 건물로 기념관 공사 중이다
남자현 지사 항일 순국비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통정대부 정한 공 남정한 선생의 셋째 딸로서 1872년(고종 9년)
탄생하신 남자현 여사는 19세에 의성 김 씨 김병주와 결혼하였다
주실마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속하는 주실마을은 북쪽으로 일월산이 있고, 서쪽에는 청기면, 동쪽은 수비면,
남쪽은 영양읍과 맞닿아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주실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
壺隱宗宅. 경상북도 기념물)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고, 옥천종택(玉川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주실 마을은 1630년 이전에는 주 씨(朱氏)가 살았으나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를 만나
멸문 위기에 처해 전국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중 호은 공 조전 선생이 인조 7년(1629)년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이곳에 집성촌을 이뤘다.
조지훈 문학관
마감시간 전에 오려고 다른 곳에서 시간을 절약 서둘러 17시에 도착을 했는데
문은 다 닫혀있고 관리실도 문이 잠겨 있다
요즘 코로나로 방문자가 뜸하기는 하지만 우리 같이 모처럼 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감시간까지 기다려 줘야 되는데 벌써 퇴근을 해버렸다
수필. 이 글은 ‘멋’에 대한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가을 달밤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글쓴이는 삶에 대해 다양한 생각들을 펼친다.
‘멋’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소개하며 삶에 힘겨워하는 이들과 복을 찾아다니느라
애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멋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자와 승무관 아래는 지훈의 뜨락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 본명은 동탁(東卓).
8·15 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과 전주 이 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 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운 뒤, 3년간 영양 보통학교를 다녔다.
서울로 올라와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 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고,
이때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 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를 즐겨 읽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다
8·15 해방이 되자 다시 서울로 와서 명륜전문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1946년 전국문필가협회 중앙위원 및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고전문학 부장을 역임했고, 1947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6·25 전쟁 때는 문 총구 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고,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6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이 되면서 시 쓰기보다 〈한국문화사 대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 뒤 1965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찬위원, 1966년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편집위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고, 1972년 서울 남산에 시비가 세워졌다.
조지훈문학관과 관리실 문화해설사의 집
문향 영양
호은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된 "호은종택(壺隱宗宅)"은,
한국 시단(詩壇)의 대표적인 시인이며, 국문학자이기도 한 조지훈(본명:東卓)이 탄생한 집으로,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일부 소실되었던 것을 1963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대문 상부의 살창 사이 부착되어 있는 판재에 조각한 태극기(자세히 보면 흐미하게 보임)는 한말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 한다.
대문 앞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 임을 알려주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어,
호은종택(壺隱宗宅)은 조광조(趙光祖)의 사건인 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한양 조 씨
일문이 화를 당하자, 조종이 영주로 낙향한 이후에 안동과 영양을 거쳐 주실로 입 향한
호은(壺隱) 조전(趙佺, 1576~1632)의 종택으로, 주실마을의 한 복판에 있으며 조선 중기
인조 때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창건한 종택(宗宅)으로,
조전이 매방산에 올라가 매를 날려 매가 앉은자리인 늪지에 터를 잡고 숯으로 메우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조지훈이 태어난 곳이다
사당
조지훈이 유년시절을 보냈곳으로 알려진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사주문 위에는 "방우 산장(放牛山莊)"의 현판이 있어,
현판의 글씨는 조지훈의 아들인 조광렬의 글씨이며,
2010년 복원된 방우 산장(放牛山莊)은 조지훈이 유년시절부터 결혼할 때까지 살았던 본가로,
1936년 부친을 따라 상경할 때까지 성장기를 보낸 곳이라 하며,
"조지훈의 수필집 방우산 장기(放牛山莊記)에서,
"방우 산장은 내가 거처하고 있는 이른바 '나의 집' 에다 스스로 붙인 집 이름이다"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어, 방우 산장(放牛山莊)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주곡 교회
조지훈(동탁)의 동상과 시공원
낙화
꽃이 지기로 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먼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주렴[珠簾] : 구슬 따위를 꿰어 만들 발
우련 :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이 시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살아가는 화자가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파초 우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 메서 쉬리라던 고.
성긴 빗방울 파초 잎에 후두 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 메서 쉬리라던 고.
승무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 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 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 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도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 시는 ‘승무(僧舞)’라는 춤을 통해 세속적인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으로, 4 음보의 율격이나 소재면에서 전통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 9연의 이 시는 춤을 추는
동작의 순서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봉황수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이 시는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산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한시의 시상 전개 방식인 기승전결과 선경 후정(先景後情)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 시는 앞부분에서 퇴락한
고궁의 모습을 제시하고, 뒷부분에 가서 비애감에 젖어 있는 화자의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6·25 전쟁 당시의 다부원 전투 현장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회를 적은 작품이다.
종군 작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창작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사실적이고도 강렬한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전쟁사에서 볼 수 있는 전쟁이 주는 참혹함이 나타나 있지만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시인의 전쟁의 참혹함을 강조하면서, 역을 휴머니즘의 시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 시는 광복을 맞이한 시적 화자의 기쁨을 비유적 표현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하지만 시인은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민족의 미래에 대한 또 다른 이상을 염원하고 있다.
이 시는 전통 의상을 입고서 춤을 추는 여인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예스러운 어투로써 고전적 미감을 추구하는 시적 화자의 풍류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봄밤이고, 공간적 배경은 풍경 소리가
울리는 전통적인 기와집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시의 제목 ‘완화삼’은 ‘꽃을 완상 하는 선비의 적삼’이라는 뜻으로 ‘꽃을 즐겨 구경하는 선비’를 말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도 드러났듯이 ‘완화삼’, 즉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데,
그 선비는 구름과 물길처럼 흘러가는 유랑의 삶을 사는 나그네이다
조지훈 문학공원에는 많은 시비들이 조각상으로 세워져 있다
알알이 영글어가는 포도를 보니 이제 가을도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수국(목수국)
주실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는데 정원이 아름다운 집이 있어 발을 멈춘다
축대를 쌓고 사이사이에 송엽국을 심어 붉은 송엽국이 단조로운 축대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좌측으로 들어가면 옥천 종택이 있으나 거대한 대문에 문이 잠겨 있어 안은 볼 수가 없어
되돌아 나왔다
오늘의 종착지는 봉화군 소천면 분천 산타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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