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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영양 두들마을(이문열작가 마을)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이곳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서 들어와 개척한 이후, 그의 후손인 재령 이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선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 병원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 채를 비롯하여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 장 씨 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 유묵도 뚜렷하게 보인다. 1994년 정부로부터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다.

                      두들 마을은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지만, 그중 단연 으뜸은 바로 음식디미방입니다.

         음식디미방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이었던 장계향이라는 분이 남긴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조리서인데요

                      조리서 안에는 예로부터 전해온 음식과 스스로 개발한 음식, 그리고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 등이 자세히 담아져 있습니다.

                          17세기 중엽 우리 선조들의 식생활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왔을때는 체험관을 운영했었는데 오늘은 휴관인지 냉랭하고 조용하다

음식 디미방 체험관에서는 女中君子(여중군자)인 장계향이 쓴 음식 디미방에 수록된 음식을

복원하여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어 재 해석한 상 차림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야외공연장

대추가 지금 커가고 있는 중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지향하고픈 마음을 냇물로 씻어 내기 위해 바위에 앉아

대자연을 감상하였던 곳으로 조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심신이 상쾌하고 잡념을

잊고 마음을 씻을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지어졌다는 세 심대(洗心臺)가 있다. 

樂飢臺(낙기대)는 배고픔을 즐기다 라는 뜻인데,

安貧樂道(안빈낙도:가난한 처지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켜 즐긴다)를 목적으로,

窮不失義(궁 불실의:어려움에 처하더래도, 도리를 잃지 않아야 한다)를 실천해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장계향은 "천하인이 모두 굶주리는데, 나만 배부르면 부끄러운 일이다"

 하면서 이 낙기대에서 굶주리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도토리 죽으로 救恤(구휼) 활동을 하였다

지금도 마을 주변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이 식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절벽 밑에는 선비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덕목으로 삼고 궁 불실의(窮不失義)를

 본령으로 실천하라는 뜻이 담긴 낙기대(樂飢臺)가 있다

 

여중군자 장계향 안동장 씨 유적비

장계향 여중군자는 1598년 경당 장흥효와 안동권 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19세에 영해 재령이 씨 가문에 출가하여 7남 3녀를 훌륭하게 양육하고 말년에는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고 1680년 83세로 돌아가시자

'영남의 신사임당'으로 비견되면서 유림에서 '여중군자'로 숭상하였고 1689년

셋째 아들 현일의 관직이 대사헌(종 2품)겸 성균관 쇄주(정 3품)에 임명돼자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고 한다.

병암 고택

병암 고택은 현재 한옥체험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두들마을은 총 44여 호에 1,0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1640년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서 이곳에 들어서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된 곳이다.

석계고택

경북 민속 자료 제91호인 석계 고택은 석계 이시명과 장기 향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았던 집으로,

간결하고 절제미가 있는, 그리고 검소함이 엿 보이는 고색창연한 고택이다

석계 이시명은 안동에서 세상을 떴으나, 부인 장계향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영양군은 고산 준령에 둘러 싸여, 내륙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내륙의 섬"으로 불리는데,

지금도 시림들이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조선 후기 사회가 혼란하던 시기에 영양은 숨어 살기 좋다 하여, 뭇 많은 명문가들이 찾아들어왔다

석계 이시명도 숨어 살기 위해 지금의 영덕 지방인 영해 인량 마을(나랏골)을 떠나, 이곳 영양 땅에

들어와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석계 이시명은 부인과 사별한 후, 당대의 유명한 성리학자인 스승 張興孝(장흥효)의 딸인

장계향과 재혼을 하였다

스승 장흥효는 석계 이시명이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길의 뒤를 이어, 퇴계학의 계보를 이을 인재로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석게종택은 지금 보수공사 중

석계종택

보수공사 중인 종택

 

                                영양 두들마을은 다양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고 이조 판서를 지낸 이현일, 그리고 1919년 파리 장서 사건에

              유림 대표로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동호, 이상호, 이명호가 이곳 두들 마을 출신입니다.

 

           두들마을에는 마을 옆 둔덕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지은 석천서당과 석계 고택이 남아있고,

       마을 앞에 흐르는 화매천가에는 이시명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겼다고 하는 동대, 낙기대,

                         서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새겨진 암석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문학관은 다 불타버리고 북카페만 남았다

북카페 건물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문열 문학관인 이 건물은 지난 2001년 석보 두들마을 출신 이문열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조명하고 문학도의 창작활동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지었다.

문학관은 부지 2만여㎡에 건평 500여㎡ 규모의 전통 목조 한옥 양식으로 지어졌고,

내부에 학사 6실과 강연장, 식당을 비롯 관리사와 주차장 등이 들어섰다.

1년 후에 배달이 되는 느린 우체통

불에 탄 문학관은 잿더미인데 담벼락의 배롱나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붉은 꽃을 피워내고 있다

화재로 전소된 문학관 북카페만 건너편에 남아 있다

경북 영양 두들마을 이문열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배울 수 있도록 지어진 '광산문학연구소'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7시간여 만에 완진됐다.(6/30)

1일(7/1) 경북소방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밤 11시 14분쯤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위치한

이문열 문학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불은 한식 목조 건물 5동, 418㎡를 태우고 다음 날인 1일 오전 6시 20분쯤 완진됐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다.

장계향예절관은 현재 보수공사 중 휴관이다

예절관

휴관으로 캡처한 사진임

산딸나무

석간 정사

 

석계 이시명의 4남인 恒齋(항재), 李崇逸(이숭일)의 후손의 집으로,

소설가 이문열이 친부가 월북을 하여 할머니와 함께 어릴 적에 이 집에서 자랐던 인연이 있다

(3세~10세) 원래 "여산 정사"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팔린 후 석간 정사로 바뀌었다 한다

석간 고택

석간 고택

유우당

유우당

유우당 뜰에 있는 회화나무

원리 쉼터

두들 마을의 원리 쉼터에는 항일 시인인 이병각 시인의 "가을밤"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을밤

뉘우침이여 베개를 적신다

달이 밝다

뱃쟁이 이름에 맞추어 가을밤이 발버둥 친다

새로워질 수 없는 래력이거던

나달아 빨리 늙어라

여기서 "나달아"는 "재빨리"란 뜻으로 일제 식민지를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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