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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경주계림 맥문동과 월정교

울산 대왕암 공원에서 맥문동을 원 없이 봤지만 매년 가던 황성공원과 계림의 맥문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 사항  사진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반강제로 나오라고 통보를

하고 동행을 한다

첨성대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앞에 꽃단지를 거처 저기 보이는 계림으로 발길을 돌린다

황화코스모스 목수국 꽃범의꼬리 자주 꿩의비름(시계방향으로)

첨성대 앞 들판에 피어 있는 황화코스모스 단지 저 앞에 계림 숲이 보인다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풀로 전국의 도로나 화단에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줄기는 곧추서며 높이 40-100cm, 가지를 많이 치고 털이 없다. 잎은 마주나며, 삼각상 난형으로 2회

깃꼴로 깊게 갈라진다. 줄기 아래쪽 잎은 잎자루가 길지만, 위쪽 잎은 잎자루가 없다.

꽃은 7-9월에 가지 끝에 지름 5-6cm인 머리 모양 꽃차례가 1개씩 달리며, 주황색이다.

관 모양 꽃은 양성 꽃이며, 끝이 5개로 깊게 갈라진다. 혀 모양 꽃은 무성 꽃이며, 끝이 불규칙하게 3-5개의

이 모양으로 갈라진다. 열매는 수과로 약간 굽으며, 긴 부리 모양의 돌기가 있고 2개의 가시가 있다

나팔꽃

변이종인지 개량종인지 요즘은 이렇게 원예종들이 많이 보이네

수세미꽃

관상용 박과 호박 수세미들이 주렁 주얼 

코스모스도 이른 아이들이 꽃을 피우고 있어 보름 정도만 있으면 만개하지 앟을까?

팜파 그라스 우리나라 억새와 같은 서양 억새다

한창 꽃대가 올라오는 우리나라 억새

노랑 코스모스 앞에는 댑싸리가 아직 파란 모습인데 가을이 되면 붉게 물들어

멋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노란 칸나

부처꽃

계림

연혁(유래)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 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회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 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회화나무 꽃

계림(鷄林)이란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다는 것에서 연유되었으며, 후에 나라 이름으로도 사용되었다.

신라의 신성한 숲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데, 1000여 그루의 고목(古木)과 1803년에 건립한

비(碑)가 남아 있다.

순조 3년인 1803년에 세운 육각형(六角形)의 비각으로, 안에는 계림(鷄林)의 내력과 경주 김 씨

(慶州金氏)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를 새긴 ' 경주 김알지 탄생 기록비

(慶州金閼智誕生記錄碑) '가 있다. 이 비석은 높은 대석과 비신,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졌으며,

영의정 남공철(南公轍)이 비문을 짓고, 경주부윤 최헌 중(崔獻重)이 글씨를 썼다.  

왕버드나무 사이로 보이는 첨성대

계림에는 회화나무를 비롯해서 느티나무 왕버드나무 등 고목이 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울산 대왕암공원의 맥분 동하고는 색감이 많이 다르다

대왕암공원의 맥문동은 진보라 색으로 강렬한 색감이지만 이곳 맥문동은 연분홍색으로

은은한 멋을 풍긴다

또한 대왕암공원은 소나무인 반면 이곳은 잡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산책 나온 두 여성분이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고 계시는데

아마도 80은 넘으신 노인분들 같다 참 다정한 모습이다

경주 계림 사적지 남쪽 편에 향가비가 세워져 있는데, 앞면은 찬기파랑가가 적혀 있고, 뒷면은

일연 스님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찬기파랑가

(구름 장막이) 열어 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가는 것이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방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가지 높아

서리를 모를 화랑이여

 

찬기파랑가'는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충담사가 화랑을 찬미하기 위해 지은 향가로 '기파랑'의 곧은

기개와 품성을 담은 신라인의 노래입니다

계림을 나와 월정교로 가면서 복원이 이루어진 해자를 바라본다

해자는 이렇게 성 둘레에 파서 물을 가두어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해자 앞에서 바라본 첨성대 풍경

월정교는  오랜 공사 끝에 복원이 됐는데 지나면서 바라보기만 했지 들어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던 교량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된 것을 2018년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63-1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교량(橋梁)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증을 거쳐 2018년 4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1984년 11월 26일부터 1986년 9월 8일까지 진행된 두 번의 복원 설계를 위한 자료수집과 발굴조사를

통해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음을 처음으로 확인하였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공사로 길이 66.15m,

폭 13m, 높이 6m의 교량 복원이 완료되었다. 2016년 4월부터 시작된 다리 양 끝의 문루(門樓) 2개 동을

건립하는 공사를 진행하여 2018년 4월 준공되었다.

남천

2층은 문이 닫혀있고 남천에 대한 설명과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만화 형식으로 전개해 놨다

원효대사의 부인 요석공주는 신라 제29대 왕인 무열왕의 딸이다.

요석공주는 일찍이 홀로 된 몸으로 요석궁에 머물렀다.

이때 원효라는 스님이 노래를 부르며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원효의 노래는 무열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노래를 들은 무열왕은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라며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였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났는데, 이후 원효는 파계승이 되어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소요산 원효대에 정착하여 수행에 전념하였다. 요석공주는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 아들 설총을

데리고 와 소요산 아래에 조그만 별궁을 짓고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구절터는 이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고귀한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교촌에서 바라본 월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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