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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첨성대와 황성공원 분황사

계림과 월정교 그리고 최부자집을 둘러보고 쉬엄쉬엄 다시 첨성대 쪽으로 이동을 한다

경주 향교(鄕校)의 북방 얕은 언덕 위에 있으며, 대형의 둥근 토분(土墳)이다.

봉분의 밑면 주변에 자연석의 한 모서리가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무열왕릉(武烈王陵)의 경우와 같이

그 안에 별도의 호석(護石)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삼국유사]에 첨성대(瞻星臺)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위치와 일치한다. 초기의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내물왕릉 주변의 소나무 숲

첨성대 주변은 많은 꽃들이 계절별로 피어 있어 항상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다

이번에는 주위에 배롱나무 꽃이 많이 보인다

아직 나무는 그리 크지 않지만 빨간 배롱나무 꽃이 만개를 하여

발길을 멈추게 한다

첨성대

국보 제31호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천문 관측대로, 과학적이면서도

신비함이 가득한 건축물이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기도 하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의 돌을

짜올렸다. 당시에는 첨성대 꼭대기에 천문 기구를 설치하여 천체를 관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첨성대 주변 언덕에 홀로 소나무 옆에 한그루가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 참 외롭게 보인다

점심식사 후 이곳 황성공원 맥문동이 궁금해서 들려봤다

꽃대도 제대로 올라오지 않고 색깔도 예전 같지 않고 어째 이상하리만큼 금년에는

볼품이 없다 아직 덜 핀 것은 아닌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2019년에 갔을 때는 이렇게 좋았었는데 작년과 금년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꽃도 제대로 피지 않고 있다 

경주에는 다른 곳보다 소나무들이 특히나  많다 삼릉을 비롯하여 오릉 통일전 황성공원 등

파란 숲이 모두 맥문동인데 꽃이 제대로 피었다면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와 잘 어울릴 것인데

아쉬움을 남기고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있다

울산 대왕암공원에서 화려한 맥문동을 본 것으로 위안을 해본다

삼릉 숲과 이곳은 후투티라는 새가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어느 블친님께서 후투티의 육추 사진을 올려주셔서 자세히 본 기억이 난다

저 맥문동 숲이 내년에는 호려한 변신을 바라며 황화코스모스를 보러 황룡사지로 가보기로 한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황룡사지

사적 제6호. 삼국시대 가장 큰 절로 대표적 왕실 사찰이었다.

신라 3 보인 장륙 존상과 9층 목탑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장륙 존상은 몽골 침입 때 완전히 소실되었지만 두 다리와 신광을 꽂았던 구멍이 남아 있는 3개의 자연석

대좌로 보아 장륙상은 5m 정도의 거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탑은 718년(성덕왕 17)에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1238년 몽골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553년(진흥왕 14)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고 할 때 황룡이

나타나자 그곳에다 황룡사라는 절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584년(진평왕 6)에는 금당을

건립했하고 몇 차례 중건되면서 고려시대까지 국가왕실의 보호 아래 호국사찰로서 숭앙되었다.

황룡사 당간지주와 코스모스 밭 코스모스는 조금 있어야 제대로 필 듯

노랑 코스모스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풀로 전국의 도로나 화단에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줄기는 곧추서며 높이 40-100cm, 가지를 많이 치고 털이 없다.

잎은 마주나며, 삼각상 난형으로 2회 깃꼴로 깊게 갈라진다.

줄기 아래쪽 잎은 잎자루가 길지만, 위쪽 잎은 잎자루가 없다.

 

꽃은 7-9월에 가지 끝에 지름 5-6cm인 머리 모양 꽃차례가 1개씩 달리며, 주황색이다.

관 모양 꽃은 양성 꽃이며, 끝이 5개로 깊게 갈라진다.

혀 모양 꽃은 무성 꽃이며, 끝이 불규칙하게 3-5개의 이 모양으로 갈라진다.

열매는 수과로 약간 굽으며, 긴 부리 모양의 돌기가 있고 2개의 가시가 있다.

분황사

분황사(芬皇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분황사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로 지정돼 있는 모전석탑으로도 유명하다.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사찰로 명성이 높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곳이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경덕왕 14년(755년)에 불상 주조의 대가인 강고 내 말이 만든

약사여래상이 있었다. 선덕여왕의 권유로 자장 법사도 오래 머물렀으며, 원효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대사가 돌아가신 후 아버님의 소상을 만들어 모셨고 이 소상은 고려 후기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종각

분황사 모전탑

분황사 창건 당시에 세워졌으며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 석탑이다. 원래는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층뿐이다. 단층의 기단은 자연석으로 높게 쌓았으며, 그 위에 화강암으로 받침을

마련하고 탑신을 쌓았다. 1층 탑신 4면에는 각각 감 실을 만들고 문짝을 달았는데, 감실 안에는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 좌우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하여 끼운 인왕상이 있는데, 매우 동적이며 근육의

표현에도 양감이 강조되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석사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옥개부는 전탑 특유의 구조인 상하에 층단이 있다. 1915년 수리 때 2층과 3층 사이의 석함 속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은제 사리합, 구슬류 등이 수습되었다.

보광전

금동 약사여래입상

‘경주 분황사 금동 약사여래입상’은 높이 3.4m에 달하는 대형 불상이다.

조선 후기 금동불 입상으로는 유일하다.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 중 목부재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분황사 상량기(芬皇寺上樑記)’(1616년)와 ‘부동 명활 성하 분황사 중창 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

(1680년)에 따르면 이 불상은 광해군 1년(1609) 동 5360근으로 조성됐다.

‘경주 분황사 금동 약사여래입상’은 앳된 얼굴이지만 우람한 체격을 가졌다. 앳된 얼굴은 16세기,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분황사 하쟁국사비부

분황사(芬皇寺)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元曉大師)를 기려 세운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였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1] 받침돌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새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라는

글귀가 있다.

 

1101년(고려 숙종 6),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 화쟁 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경주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김시습(金時習)은 이 비석을 보고 「무쟁 비(無諍碑)」라는 제목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분황사가 소실되면서 파괴된 듯하며, 이후 비석의

대좌만 남게 되었는데 조선 말기에 이곳을 찾은 추사 김정희의 고증으로 이것이 원효의 비석을 세웠던

비부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비문 일부가 탁본으로 『대동 금석서(大東金石書)』에 실려 전하며,

1976년 분황사 경내에서 발견된 비편(크기: 16㎝×14㎝)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민족문화 대백과에서

분황사 사찰 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오르거나 흘러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 변 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 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 억압정책에 따라 사찰 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위키백과에서

인왕상은 모두 8 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 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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