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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봉화 춘양 한수정과 청암정

백두대간 수목원을 둘러보고 이곳 만산고택에 왔다

위에는 문간채고 아래는 안채다 사진은 2019년에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임

  만산고택  봉화군 춘양면 서동길 21~19 경북민속자료 제 121호

만산고택은 조선말기 문신인 만산 강용(1846-1934)이 고종 15년(1878)에 지은 집이다. 강용은 중추원 의관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으며 1910년 이후에는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면서 마을 뒷산에 망미대를 쌓고

그 곳에 올라 국운이 회복되기를 시로 읊었다고 한다.

 가옥구조는 앞면에 11칸의 긴 사랑채가 있고 가운데는 솟을대문이 있다. 사랑채와 만채가 ㅁ자형으로

되어있으며 왼쪽에 서당을 두고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을 둘러 별당을 배치하였다.

사랑채에는 만산이라는 대원군이 쓴 현판이 걸려있고 서당의 한묵청연(翰墨淸緣) 이라는 편액은 영친왕이

8세때 쓴 글씨라고 전한다.

나는 이집 주인장 강백기 선생과 이야기를 하고 옆지기는 한바퀴 돌아 보는데 어찌나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시고 진지한 말씀에 옆지기 돌아 보는 동안 계속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전에 돌아 봤기에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했다 이집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 분은 아래 주소로

들어오시면 자세한 내용을볼 수 있습니다

https://kts4500.tistory.com/7397915?category=1021865

춘양은 작은 고을 치고 양반의 기품이 짙게 남아 있다. 춘양역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운곡천 개울

옆에 오래된 정자 하나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다 바로 한수정이다

 

지금 한수정이 있는 곳에 원래는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 있었다.

그러나 거연헌이 화재로 소실되자, 그의 손자인 권래(權來)가 선조 41년(1608년)에 지금의 정자를 세웠다. 

이 정자는 찬물과 같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고 하여 한수정(寒水亭)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자 세로축에는 맨 앞쪽에 2칸 온돌방을 두고, 그 뒤편에 4칸 대청을 놓았습니다.

가로축에는 좌측에 2칸 온돌방을 두고, 그 우측에 1칸 대청을 놓았습니다.

가로축 온돌방 좌측과 배면에는 툇마루를 들이고, 건물 둘레 모두에는 쪽마루를 두었습니다.

정면, 좌측면 뒤쪽 일부, 배면, 우측면 쪽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두었습니다.

 정자를 빙 둘러서 파놓은 와룡연(臥龍淵) 연못과 300년 넘은 느티나무가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만이다. 이름대로라면 차가운 물에 머리를 맑게 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곳이지만, 책을

핑계 삼아 담소를 나누거나 술 한잔 걸치고 푸지게 낮잠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건물의 삼면에 못을 파서 물이 돌아나가고 건물 앞에 작은 언덕을 만들어 초연대(超然臺)라 이름 붙였다. 

닭실마을 청암정의 주인인 충재(冲齋) 권벌(權橃)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자 권벌의 손자인 석천(石泉) 권래(權來,1562~1617)이 그의 뜻을 기려, 1608년(선조 41)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초연대

운곡천 물을 끌어들여 물돌이를 시키고 밖으로 흘려보낸다

억지춘양의 시발점 춘양역

춘양은 이름부터 좀 억지스럽다. 춘양역은 안될 일을 무리하게 기어이 해내려는 고집, ‘억지춘양’이라는

말의 유래가 된 곳이다. 일반적으로 철로는 강을 만나면 다리로 건너고, 산을 만나면 터널로 통과한다.

휘어진 길을 곧게 펴 되도록이면 두 지점을 최단거리로 연결한다. 그런데 1955년 개통한 영암선(영주~철암)

선로는 법전~녹동 구간에서 말발굽(Ω) 형태로 크게 휘어진다. 애초 계획에 없던 춘양면소재지를 거쳐가기

위해서다. 빠른 길을 놔두고 철도 노선이 이렇게 된 데는 당시 춘양면 서벽리 출신 자유당 정문흠 의원의

영향이 컸다. (춘양역에는 ‘정모 의원’이라 써 있고, 춘양시장 벽화에는 이름과 사진까지 명확히 그려 놓았다.)

춘양에 숙소가 없어서 영주로 나갔다 아침에 다시 봉화읍으로 나와 여기 석천계곡과 석천정사로 왔다

석천계곡에 오니 또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청하는 해지기 직전 반짝 나타나는 찬란한 푸른 노을을 뜻한다

동천은 신선들이 영생을 사는 도교의 이상향이다

순간의 찬란함을 영원히 지속하는 곳이라  하면되겠다

개울물도 이제 조금씩 오염돼서 바위에 이끼가 검게 끼어 있다

석천정사

봉화읍 삼계리 석천계곡에 소재하며 충재 권벌(1478 - 1548)의 장자인 청암 권동보 (1518 - 1592)가

초계군수에 임명되었다가 향리에 돌아와 선지를 계승하여 1535년에 창건한 정자이다.

정자라 하기엔 34칸의 큰 건물로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정사(精舍)라 한 것 같다.

 


석천정사는 산곡간의 울창한 송림을 끼고 청류벽에 세워진 청암정과 삼계서원 일대와 함께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및 명승 제3호 지정구역내에 보존 관리 되고 있다.

시원한 석천 계곡을 따라 난 길을 오르면 물길이 돌아 흐르는 내성천을 앞에 두고 정자라고 하기엔

규모가 큰 석천정사(石泉精舍)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본 정자는 춘양목으로 지어졌으며 주위는 기암절벽과 노송으로 장관을 이룬다.

석천 정사 위쪽 내성천 가운데 큰 바위에 지주암(砥柱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작은 규모이긴하나 폭포와 방불하여 비룡폭이란 각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도 있다. /펌

1526년(중종 21)에 충재선생이 대(臺)를 쌓아 쉼터를 만들었고

1535년(중종 30) 선생의 큰아들 靑巖公이 그 위에 건물을 지어

'石泉精舍'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후 충재선생의 손자 석천(石泉)

권래(權來)가 다시 온돌방을 지어 정사를 확장하였다.

뒤쪽 언덕 밑에는 석천정(石泉井)이라는 샘이 있다.

 이 건물도 청암정과 함께 빼어난 전통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충재 권벌 선생의 큰아들인 청암 권동보는 중종 37년인 154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양재역벽서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아버지가 삭주로 유배되어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전원의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충재 권벌선생이 삭주로 귀양가 있으면서 지은 시

결국 귀양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삭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참골무꽃

충재 권벌의 종가집이다

충재집안의 사당

가죽나무

酉谷先公卞宅寬(유곡선공변택관)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니

雲山回復水灣環(운산회복수만환)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정개절서횡교입)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하영청지활화착)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가포자능비가학)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헌상무모불상관)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

更燐巖穴矮松在(경인암혈왜송재)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激勵風霜老勢盤(격려풍상노세반)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나.

 

퇴계 이황이 청암정을 읊은 시인데 정자와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도 했지만 충재의 증조부가 퇴계 외조모와 외조부여서 서로 친숙한 관계이기도 했다.

봉화에서 제일의 양반촌으로 닭실을 꼽는다고 한다.

닭실(酉谷)은 안동 권씨의 충재 권벌이 자리 잡은 후 400여 년간 후손들이 살던 곳이다/펌

충재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川前),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 지역의 

4대 길지로 꼽고 있다.충재는 안동 도촌에서 살다 정암 조광조의 기묘사화로 파직 당한 후 예전 삼척부사

시절 마음속에 두었던 봉화 닭실로 옮겨 살았다.

충재는 조정에서 다시 부를 때까지 15년간 세월을 보냈는데 중종 26년(1526) 무렵에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10년 동안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사적 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으로 건축한 정자로 영남 최고의

정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거북 암반 주변에 연못으로 둘러져 있고, 바로 옆의 종택 뜰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운치가 있다.

주위에는 노송,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의 고목들이 수백 년 세월을 보여주며 이 풍광은 계절에 따라

청암정의 풍광을 빛나게 한다.

정자에는 퇴계 이황, 백담 구봉령, 관원 박계현, 번암 채재공, 눌은 이광정 등 당시의 명현들의 현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거북바위 위에 지은 청암정

 

충재는 1518년 6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임금이 그 자리를 공기(公器)로 여긴다면 그 용심(用心)은 두루 미쳐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지만, 

만약 천하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일만을 생각하고 또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을 위하고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하게 됩니다.

…말세의 임금들은 그 지위를 자신의 사물로 여긴 나머지 조금만 급박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는데, 이는 모두 그 사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강직한 문신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공(公)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안이라도 군주에게 말해야 하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꾸밈없이 말하는 것을 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인물인 충재는 기묘사화(1519)로 파직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1526년 봄 독서당으로 3칸(

두 칸은 온돌 방 한 칸은 마루)짜리 ‘충재’를 지었고, 같은 해에 그 서쪽 옆 거북처럼 생긴 바위 위에

정자를 완공했다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온돌방을 넣고 이름도 ‘구암정사(龜巖精舍)’로 했다.

그런데 온돌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소리 내며 울어 괴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한 스님이 들러 이야기를 듣고는 이 바위는 ‘거북’이라서 방에다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바위가 우는 소리를 낸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아궁이를 막고 바위 주변을 파내어 못을 만들었더니 괜찮아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충재는 후일 다시 벼슬길로 들어섰으나 죽음은 결국 유배지에서 맞이했다.

 

정자 이름 구암정사는 후일 청암정으로 바뀌는데, 청암은 충재의 큰 아들 권동보(1517~91)의 호다.

청암정은 커다랗고 넙적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 지은 丁자 형 건물이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연못의 돌다리를 지나 정자에 오르면 사방이 툭 터진 풍광이 다가와 시원한 선비의

기상을 불러오고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연못 주위에는 소나무·향나무·느티나무·단풍·철쭉·국화가 어우러져 멋진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거북바위

청암정 현판은 남명 조식이 쓴 것이며,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이 정자 대청 마루를

빛내고 있다.허목은 청암정에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다가 88세 되던 해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이라

네 글자를 써 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이 되고 말았다.

 

해서로 쓴 ‘청암정’은 매암(梅庵) 조식(曺湜·1526~1572)이 썼다.

그동안 누구 글씨인지 정확히 모르다가 2008년에 도난 방지를 위해 청암정과 근처 석천정사의 현판 30여개를

모두 철거해 유물관에 보관하는 과정에서, 편액 뒤를 보니 필자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유곡(닭실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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