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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봉화 쌍벽당 종택

거촌리 황전마을 경암헌 고택과 도암정을 둘러보고 이곳 거촌리 쌍벽당 고택으로 왔다

쌍벽당(雙碧堂)은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148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1984년 1월 10일 국가지정문화재

중요 민속자료 170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봉화읍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거촌리(巨村里)는 뒷산의 큰 소나무들이 마을을 두른 야트막한

산자락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거촌 1리와 3리로 나뉜다. 쌍벽당(雙碧堂)은 거촌 1리에,

쌍벽당의 외손인 변 씨들이 살고 있는 쪽은 거촌 3리이다. 거촌 1, 3리 모두에 큰 규모의 한옥이 자리 잡고

있는데, 거촌 1리에 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큰 기와집이 광산 김 씨 쌍벽당 공파의 종가이다.
쌍벽당은 이 자리에서 500년 가까운 세월을 튼실하게 버티고 서서 처음 세운 주인의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쌍벽당 고택은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 있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사랑채로 들어가게 된다

 

별당(別堂)에 걸려있는 쌍벽당 중수기(重修記)에 보면 정종(正宗)을 지낸 홍공(洪公)이라는 이가 쓴

편액(扁額)에는 건물의 창건년대(創建年代)가 가청 병인(嘉請丙寅)(1566년)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하며,

1864년 토사공(土舍公)이 남익(南翼) 3칸을 수선(修繕)하였고, 고종 29년(1892년) 그의 손자 용정(容正)이

안채를 크게 수리하면서 외당(外堂)을 별도로 세웠다고 하였으니 지금 쌍벽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별당은이때 건축된 것으로 판단된다

쌍벽당 

쌍벽이라는 뜻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말한다.

세상의 명예를 좇지 않고 선비로써 바른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 가옥은 완만한 경사지의 뒤편에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넓게 터를 잡았다.

행랑채에 우뚝솟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의 안채와 우측 별당의 정면이 보이고, 별당의 후방에

방형(方形)으로 담을 쌓아서 사당(祠堂)을 배치하였다.

쌍벽당 천정

안채의 뒤편으로는 사랑채 공간과 경계를 짓는 낮은 담장이 있고, 작은 문을 지나 왼쪽을 보면

단을 높게 설치하여 사당 영역을 만들었는데, 돌을 쌓아 꽃나무들을 심어 두었다

사당은 지금 보수공사 중이다

예전에 왔을 때의 사당 모습

사랑채

사랑채 현판 하루(霞樓)와 송죽헌(松竹軒)이 나란히 달려있다

별당인 쌍벽당의 좌측으로는 사랑채인 하루(霞樓)와 송죽헌(松竹軒)이 자리하고 있다. 口자형 안채

대청마루 앞에는 둥글고 튼실한 기둥 2개가 집안을 바치는 힘을 모으고 있다. 

안채

가정집에서는 보기드문 원형 기둥으로 되어 있다

부처를 모신 사찰이나 왕궁은 우람하고 신성함을 뜻하는 원형기둥을 쓰고 일반 백성의 집은 사각기둥을 썼다

또한 사랑채의 기둥은 둥근기둥을 쓰고 안채는 사각기둥을 쓴다. 둥근 것은 양이고 사각은 음이다

그런데 여기도 저기도 맞지 않는 안채의 기둥을 우람한 원형기둥을 썼다 궁금한데 주인장도 거기에는

모르신다고 한다

 

이집 종손이신 김두순 옹께서 예전에 왔을 때 방명록 기록을 보여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오랜 공직(교사)에 계시다  퇴직을 하시고 연로하셔서 많이 불편하시고 부인께서도 무릎 수술을

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시다고 한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3칸의 대청이 안마당 폭 가득히 안채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이 안채의 대청은 낮은 잡석 기단 위에 있지만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굵고 높은

둥근기둥을 사용하여 지붕이 매우 높고 웅장하게 보인다.

 

대청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상부 골격구조[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로 마룻보 위에 키가 높은 사다리꼴

판대공(板臺工)을 세워 놓았다. 대청의 좌측에는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도장방과 안방이, 우측에는 고방과

주인이 거처하는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서 경북지방의 옛 방식을 보이고 있다.

김언구(金彦球, 1507~?)선생의 자는 대명(大鳴)이고, 쌍벽당(雙碧堂)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조부 김용석의 유지에 따라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은거하며 학문에만

힘쓰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당시 황량한 마을이라 불리던 거촌리에 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으며 집뜰에는 솔과 대나무를 심으며 거문고를 즐겼는데 호는 송죽(松竹)이라 하였다.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조부(祖父)인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점필재 문하의 십철(十哲)이란

이름이 있었다.
성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연산군 때 사화의 조짐을 느끼고 안동 풍산(豊山)의 구담(九潭)으로 들어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담암(潭庵) 선생은 “성균관 진사만은 아니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마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2남인

습독(習讀 -조선(朝鮮) 때 훈련원(訓練院)의무관직(武官職)을 지낸 죽헌(竹軒) 김균(金筠) 역시 이를 따르며

수양과 후학양성에만 힘썼다.


특히 안동지역의 뜻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천성 향약과 안동 향약의 기틀을 마련하여 안동 사림의 흠모를

받았었다고 전해진다.
김언구의 부(父)김균은 1505년경 장인이었던 군위 현감 금계(琴啓)의 권유로 이곳 거촌리에 입 향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종손인 김두순(金斗淳)선생이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봉화일보에서

Richard Clayderman - 숲속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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