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마지막 코스 메밀꽃과 이효석문학관을 보기 위해 이곳 봉평 창동리에 왔다
문학관은 추석연휴 이틀간 휴무라고 한다 대실망
이효석
장편소설보다 단편소설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이국에 대한 동경을
소설화했다. 호는 가산. 이시후(李始厚)의 맏아들로 태어나 가정 사숙에서 한학을 배웠다.
1920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시절 조선인 학생회 문우회에 참가하여 기관지 〈문우〉에 시를 발표했고, K. 맨스필드, A. 체호프,
H. J. 입센, T. 만 등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문학관의 정립에 힘썼다.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KAPF)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비슷한 경향의 소설을 써서 유진오 등과 동반자 작가로 불렸다.
1930년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보름 정도 근무하다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 농업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이때부터 작품 활동에 전념하여 1940년까지 해마다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1933년 구인회에 가입했고, 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40년 아내를 잃은
시름을 잊고자 중국 등지를 여행하고 이듬해 귀국했으며, 1942년 뇌막염으로 언어 불능과 의식불명
상태에서 죽었다.
메밀꽃필 무렵 줄거리
허생원은 갖가지 옷감을 취급하는 드팀전 상인으로, 장에서 장으로 행상을 도는 장돌뱅이다.
20년을 넘게 장돌뱅이로 잔뼈가 굵은 데다 나이 지긋한 그를 주변에서는 ‘생원’으로 불러준다.
강원도, 특히 봉평, 대화 등지를 주로 돌고 있다. 본인 입으로 청주 어딘가가 고향이라고 했으나,
내내 한 번도 살피러 가지 않은 걸 봐서는 가족 친지 하나 없는 혈혈단신인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있어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사시사철 펼쳐지는 풍경들, 저녁 무렵 불빛이 어른어른하는
장터 마을의 정경이야말로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는 고향 그 자체였다.
이런 그가 이제껏 장년에 이르기까지 결혼 한번 하지 않은 채 홀로 늙어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왼손잡이에다 얼굴에 곰보자국 가득한 얼금뱅이라는 핸디캡과 콤플렉스 때문이다. 당시 왼손잡이는
어딘가 모자란 장애인 취급받던 때였다. 게다가 원체 숫기까지 없어 놓으니,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만
붉히고 말 한마디 못했다. 물론 여자 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경우도 없었고 말이다.
그나마 젊을 때는 돈 푼 꽤나 모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백중(百中, 음력 7월 15일에 열리는 농민 축제
)이 열리던 어느 해, 젊은 혈기에 읍내 투전판에서 시원하게 다 날려 먹었다. 돈 다 날리고 빚까지 지게
되었으나 함께 다니던 정든 나귀만은 끝끝내 넘기지 않았다. 이후 빚에 허덕이며 겨우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처지로 나귀와 함께 내내 장돌뱅이를 하고 있는 터다. 결국 반평생 가까이 함께 늙어가고 있는
나귀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피붙이자 분신이었다.
그런 허생원이 장을 돌 때 절대로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봉평’이다. 아마도 그가 종종
이야기하는 젊었을 적 단 한 번의 꿈같은 ‘그 일’ 때문인 것 같다.
‘그 일’이 있던 밤은 보름달이 휘황하게 떠 있었다. 눈이 닿는 곳은 새하얀 메밀꽃 천지였다.
달빛이 메밀꽃을 비추니 온 세상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눈부신 하얀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한 밤을 지난 때라 세상은 너무도 고요했다. 달이 살아 있다면 숨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그런 밤이었다.
허생원의 말을 빌리자면 그날따라 묵고 있던 객줏집 토방(土房)이 너무 더워 홀로 개울가로 목욕하러
나갔단다. 그런데 주위가 너무 밝아 그대로 옷을 벗기가 민망해 방앗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난데없이 성 서방네 딸을 만났다. 봉평서 제일가는 미인으로 소문난 처녀였는데,
집안이 어려운 처지에 있어 홀로 방앗간에 앉아 근심하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서로 놀랐으나
특별한 밤 분위기 탓인지 서로 걱정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두 남녀는 마음이
통해 정을 나누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생각해도 무섭도록 기이하고 신비로운 인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처녀는 바로 제천으로 도망쳐버렸다. 아마 한 순간 분위기에 휩쓸려 큰일을 저질렀다는
자책과 후에 있을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 장 날 허생원이 다시 봉평에
와 보니 성 서방네는 아예 마을을 떠나버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장터에는 성서방네 처녀가 외간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집안도 기운 데다 안 좋은 소문까지 나버렸으니 그대로 눌러앉아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연민과 걱정에 마음이 아팠던 허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를 찾기 위해 제천 장터를
몇 번이고 뒤지고 다녔으나 끝내 소식한 줄 얻어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로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 된
그 처녀를 잊지 못해 봉평에 다니기를 반평생 해왔다는 것이다.
한여름 장은 서늘한 새벽에 열리고 더위가 정점에 달할 정오쯤이면 파장이다.
그날도 허생원은 같은 드팀전 상인이자 친구인 조선달과 봉평 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어 슬슬 휘장을 거두고 장사를 접으려 할 때, 조선달은 대화 장으로 가기 전 한 잔 걸치자며 충주댁이
하고 있는 술집으로 잡아끌었다. 허생원이 충주댁에 관심이 있다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요즘 충주댁이 젊은 행상인 동이와 만난다는 소문도 들려주었다. 반신반의하던 허생원이었지만,
술집에 들어서 막상 동이와 충주댁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는 걸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홧김에 욕을 퍼부으며 따귀까지 한 대 갈겨 버렸다. 동이가 일어서 덤벼들려고 하는데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지금 행실이 부모님께 걱정이나 끼치는 불효라는 꾸중 아닌 꾸중까지 해댔다. 그러자 어찌 된 일인지
동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비실비실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조선달, 충주댁과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지만 허생원은 도무지 흥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나간 동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이도 많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충주댁을 놓고 시샘을 부린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때 동이가 헐레벌떡 달려와 허생원 나귀가 줄을 끊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고 알렸다.
반가움과 고마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판을 뒤져 나귀를 찾아 달래 흥분을 가라앉혔다.
장터 아이들 장난이라고 생각해 혼내려고 했으나 사실은 다른 암컷 당나귀를 보고 흥분해 발광을
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늙은 나귀가 암컷 때문에 저 혼자 흥분한 것을 가지고 놀려댔다. 허생원은 마치
조금 전 충주댁을 놓고 동이를 시샘했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발끈 화를 내었다. 마침 쫓아온 조선달과
동이가 만류했고 함께 짐을 싸서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셋은 함께 대화를 향해 길을 떠났다. 달은 휘영청 밝은데 주위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마침 만개한 메밀꽃이 달빛을 받아 흰 빛 천지였다.
허생원이 그 옛날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났던 밤과 꼭 같은 밤이었다. 회상에 젖은 허생원은 언제나처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그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달은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길이 좁아한 줄로 늘어선 탓에
맨 뒤의 동이에게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산길을 벗어나 다시 큰길로 나오자 셋은 나란히 섰다. 허생원이 먼저 동이에게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동이는 허생원의 꾸중 덕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그리고 제천에서 미혼으로 아이를 낳고 집에서도 쫓겨나 홀로 자신을 키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어머니는 새 남편을 얻어 술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부는 술주정뱅이에 돈만 탕진하는 놈팡이였고 툭하면 동이와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했다.
결국 의부와 의절하고 열여덟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장돌뱅이를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마침 개울을 건너고 있었는데 물살이 꽤 세었다.
그런데 동이 어머니의 고향이 봉평이라는 말에 허생원은 혹시 옛날 ‘그 처녀’ 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흔들린 탓에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버렸다. 허우적거리던 것을 얼른 동이가 달려와 구해 주었다.
동이의 등에 업혀가는 동안 뼈에 사무치는 듯한 따듯함마저 느꼈다. 어머니가 지금 제천에서 홀로 살고 있고,
동이의 생부와도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자 허생원은 알 수 없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대화 장을 돈 후 동이와 함께 제천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밤 길을 재촉해 가고 있는 허생원의 눈에
동이의 왼손잡이가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요즘 우리나라 광광지에가면 남미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전통복장과 악기로 연주를 하며 기념품을 팔고 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보름날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메밀꽃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귀찮아서 삼각대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니 동반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혼자서 인증을 했다
이쪽 편에는 메밀꽃이 빼곡히 피어 있는데 오른쪽 뒤에 보이는 곳은 메밀꽃 심을 때 강원도
비가 많이 내려 씨앗이 모두 떠내려간 듯 메밀이 반도 차지 않아 맨땅이나 다름없고 전에
왔을 때 백일홍 코스모스 수수 등 많은 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메밀밭만 반 정도 조성되어 있다
터널에는 관상용 박이 주렁주렁 열려있네
메밀꽃 필 무렵 무대가 됐던 그 물레방아간이다
허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가 사랑을 나누던 곳이다
허생원과 동이의 모습인가 보다
전에는 백일홍 단지도 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바로 부근에 있었는데 모르고 지나처버렸다
봉평 메밀국수 조형물
어김없이 금년에도 섶다리는 놓여 있다
통나무로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잎 나무, 잔가지 따위를 얹어서 만든 임시 다리.
이곳 섶다리는 솔가지를 깔고 흙으로 덮었다
달뿌리 풀
냇가에 흔히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기는줄기는 땅 위에서 사방으로 벋는다.
줄기는 곧게 서며 높이 150-300cm, 아래쪽 마디에 퍼진 털이 많고, 속이 비어 있다.
잎은 길이 10-30cm, 폭 2-3cm이며 어긋난다. 잎집은 잎몸보다 짧고, 위쪽이 붉은 자주색을 띤다.
꽃은 8-9월에 핀다. 이삭 꽃차례가 모여서 원추 꽃차례를 이루며, 자주색이다.
전체 꽃차례는 길이 25-35cm이다. 작은 이삭에는 낱꽃이 3-4개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한다.
대만, 러시아, 몽골,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이곳을 판관 대라고 하는 것은 신사임당(1504~1551)께서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을 잉태한 곳으로
율곡 이이 선생의 부친 이원수가 수운판관(水運判官)의 관직을 지냈기에
이를 따서 판관대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판관대 비문을 살펴보면 이곳 봉평면 백옥포리는 조선시대에는 강릉부에 속했으며
양지동에서 흘러오는 흥정천이 판금대를 돌아 금당산 밑에서 속사천을 만나 큰 줄기를 이루는 산자수명한
곳으로 예로부터 산태극, 수태극이라 이르는 곳이니 과연 동방의 성현이 잉태할만한 곳이라 할 정도로
명당이라 한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이곳 봉평에 살았다는 기록과 함께
강릉에서 지내던 신사임당이 꿈에 용을 만나고 1936년 음력 2월 이곳으로 옮겼으며
당시 수운판관직에 있는 이원수가 말미를 얻어 이곳으로 돌아와 신사임당과 합방을 하여
결국에는 율곡 이이를 잉태하게 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봉산서재(율곡 탄생에 대한 설화이니 길더라도 한번 읽어보십시오)
설화는 봉평면 평촌리 봉산서재와 관련 있다. 율곡 이이와 화서 이항로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율곡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바로 봉평이 율곡의 잉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일찍이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이원수가 여가를 틈타 처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루 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일찍이 혼자 몸이 되어 홀로 주막을 경영하던 주모의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므로 이상히
여겨 홀연 꿈을 깨고 일어나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주모는 이것이 틀림없이 잉태할 꿈이며 비범한 인물을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얻을
기회가 왔구나 하였다. 주모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혼자 몸이요, 그날 밤 대상이 될 사람은 주막에
묵고 있는 원수 공뿐이라 여러 모로 살핀 끝에 그분이 예사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의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십시오.”
하니 놀란 원수 공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내 그대를 행실 바른 여인으로 알고 묵으려 했는데 이러면 되겠소.
하고 달래니 “손님 아무 말씀 마시고 하룻밤만 정을 맺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였으나 원수 공이 완강히
뿌리치고 말아 주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끄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는데 원수 공의 얼굴에는 범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이는 도저히 내 운수가 아니구나 하며 체념하였다.
그 무렵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 씨(申氏)는 강릉 오죽헌 친정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하룻밤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꾸고 나서 즉시 귀가하려고 하였다.
언니는 며칠 더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임당 신 씨는 이를 뿌리치고 그날로 14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마침 원수 공이 도착했다.
신 씨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대하여 반기기는 고사하고 말도 않고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남편을 대하였다. 부인의 성품이 남다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수 공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율곡을 잉태하게 되었고, 그 후 9개월 만에 강릉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한다. 한편 원수 공은 며칠을 이곳에서 머물다 임지로 돌아가던 길에 또다시 반정 주막에 들게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청을 못 들어준 것이 마음에 걸려 “여보시오 주모, 내 전날에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소. 오늘 밤 당신과 정을 맺을까 하오.” 하니 “어르신네의 말씀은 대단히 고마우나 지난번 하루 밤 모시고자 한 것은 홀로 사는 아낙네에게 하늘이 점시 하신 비범한 영재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오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졌으므로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며 말을 이어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틀림없이 인시에 낳을 것이니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호랑이한테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당황하여 “그 무슨 말이요,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앞일을 예견하는 당신께서는 그 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것이니 제발 묘법을 가르쳐 주시오.” 했다.
그러자 주모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그러면 돌아가 사람을 천 명 살리는 셈 치고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십시오. 그랬다가 아이가 다섯 살 되는 해 아무 날에 금강산에서 어떤 늙은 중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기는 절대로 보이시지 말고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아기를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시고 덕을 쌓은 것을 보자고 하거든 밤나무 천 그루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해 12월 26일 인시에 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원수 공은 주모의 말이 맞았구나 싶어 강릉에서 남쪽으로 백리쯤 되는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그 후 율곡이 다섯 살이 되는 해 주막 여인이 말한 바로 그날 늙은 중 한 사람이 나타나 “금강산에서 살고
있는 중인데 이 댁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하니 원수 공이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하자 중이 “무슨 덕을 쌓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이원 수공이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니 중이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 했다. 이원수공이 중을 데리고 산으로 가
밤나무를 하나하나 세는데 아무리 헤아려도 천 그루에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원수 공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늙은 중이 “한 그루가 모자라니 기어코 아드님을 데려가야겠습니다.
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 하고 소리치자 늙은 중이 혼비백산하여
큰 호랑이로 둔갑하여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던 중 그 당시에 강릉부 관할이던 이곳에 이르렀다.
아담하면서도 그 자연경치가 빼어난 풍광에 감탄하여 하루 동안만 머물다 가고자 하였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정사도 잊은 채 여드레 동안을 신선처럼 자유로이 노닐며 경치를 즐기다가 갔다는 곳이다.
그 뒤 양사언은 이곳에 팔 일정八日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매년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 세 차례 씩
찾아와서 시상詩想을 다듬었다고 한다.
그가 지은 정자의 자취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양사언이 강릉부사를 그만두고 고성 부사로 옮겨가게 되자 이별을 아쉬워하며 정자 주변에 있는
여덟 개의 큰 바위에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봉래蓬萊(전설 속 삼신산 중의 하나, 금강산). 방장方丈. 영주瀛州(전설 속 삼신산 중의 하나, 한라산).
석대 투간石臺投竿(낚시하기 좋은 바위). 석지 청련石池靑連(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돌로 만든 연못).
석실 한수石室閑睡(방처럼 둘러싸여 낮잠을 즐기기 좋은 곳). 석평 위기石坪圍琪(뛰어오르기 좋은 흔들바위).
석구 도기石臼搗器(바위가 평평하여 장기 두던 곳)라고 지었는데, 그 바위들은 주변의 풍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팔석정 밑에 있는 구룡소九龍沼는 용 아홉 마리가 등천하였다는 곳이고, 팔석정으로 들어가는
소는 도래 소到來沼라고 부른다. 출처 : 더리포트
팔석정 표지석
이렇게 돌아보고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려고 여러곳을 들렸지만 모두가 추석날이라휴무를 하고
있어 월정사 쪽으로 진출을 하는데 호텔에서 가까운 곳에 아래와 같은식당이 불이켜져 있어
들어갔는데 다행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오대산 찜마을 부부와 아들 둘 가족끼리 영업을 하고 있었다
황태구이정식(인당 2만오천원) 반찬이 무려 20가지 그런데 조기와 황태구이 외에는 맛이 그저 그랬다
깔끔하기는 한데 가격에 비해서 맛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여가까지는 좋았는데 숙소에서 자다가 장모님 부음을 받고 모든일정 취소하고 3시반에 일어나
야간운전을 해서 바로 부산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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