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초입에 자리 잡은 남사예담촌은 안동 하회마을과 더불어 경상도의 대표적인 전통한옥마을이다.
경남 하면 산청 남사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 또한
전통한옥마을로 유명하다. 전통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는 요즘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지리산 초입의 이 작은 마을이 유난히
정감 있고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해묵은 담장 너머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삶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대한민국구석구석
한옥은 수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의 삶의 양식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한 민족의 문화가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딛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것이다. 농촌 전통테마 마을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 속에서 옛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배움의 휴식 터로 자리하고자 한다.
남사마을의 옛 담장은
마을 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하여 쌓았다고 한다.
담장 하부엔 길이 50~60cm 정도의 큰 막돌로 2~3층을 쌓은 다음
그 위에 돌과 진흙을 교대로 쌓아 올렸다.
담 높이는 2m 정도로 높은 편이다
최 씨 고가(경남문화재자료 제117호)로 간다. 이 집은 남사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집이다.
1930년대에 지었고 사랑채 좌우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2곳에 만들었는데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눈에 보이고 서쪽 중문은 외양간 채와 안채가 직접 눈에 띄지 않도록 안으로 담장을 둘러놓았다.
남녀의 사용 공간을 나누어 공간의 독립성을 부여한 뛰어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다.
남녀 음양이 섞여 비구름을 만들고 그것이 햇무리를 만나면 무지개가 되듯이 여긴 음양오행의 조화가
선비정신을 만드는 사서오경의 공간이 있다.
사랑채
사랑채 마루에는 시서 유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시와 글씨로 조상의 업으로 삼는다는 뜻인 것 같다
문창살이 정교하고 세련돼 보인다
최 씨고가 매화나무(최 씨 매)
수령 150년
최 씨 매는 최 씨고가 대문 옆에 있던 400년 된 매화나무가 고사한 뒤 심은 후계목으로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매화향이 고가의 운치를 더해준다
최씨고가 창고동
사효재(思孝齋)는 "효를 생각하는 마음을 늘 같이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수령 530년의 향나무와 사효재
1706년 (숙종 32년)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효자비를 내렸으며 후손들이 사효재를 지었다
그 효심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향나무를 심었다
성주 이 씨 집안과 마을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사효재 520년된 향나무
마을 곳곳에 목화송이가 보이네
향토음식 예담원
산청 남사마을 옛 담장(국가등록문화재 제281호)'은 이 마을 대표 브랜드며 관광객을 감탄케 하는 볼거리다.
남사마을 토담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옛 멋에 흠뻑 젖어 버린다.
마을 사람들이 눈만 뜨면 쳐다보는 저 돌담길이, 그 위 담쟁이덩굴, 곳곳의 한옥들이 우리의 은근과 끈기를
길러주는 토양이다
마을 집집마다 거의 이렇게 큰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마을 앞에서 판매를 하고 있다
전에 들리지 않았던 이사재로 올라가 본다
니사재는 판서 송월당(松月堂) 박호원(朴好元)의 재실이다. 입암(立庵) 박헌수(朴憲修)의 기문과
송주(松州) 하도(河圖)의 현액이 있다. 네 모서리에는 활주가 세워져 있으며 외진 주는 원기둥이고
내진 주는 네모난 기둥이다. 중앙 마루 전면에는 계자 난간을 비워 출입하는 곳으로 이용하고 있고,
양측면의 방 출입구는 세 짝 분합문으로 구성하였는데 세살문 형식을 보인다.
재실 서측에는 암반 밑에 얕은 우물이 있고 장방형의 연못이 연결되어 있다.
이 우물과 연못은 모서리에 잘 가공된 장대석과 장식 조각이 있어 건립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상량문에 ‘세 정사 팔월’로 기록된 것으로 건립 연대는 1857년으로 추정된다.추정된다.
지정면적은 886㎡이며, 건물 1동(51.75㎡)으로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으며, 전형적 인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다.
니사재(경남문화재자료 제328호)다.
니사재는 조선 전기 화적 임꺽정 난의 진압에 토포사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대사헌·호조판서를 지낸
박호원의 재실이다. 정문 앞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이곳을 지났다는 행로 표석이 있다.
니사재의 유숙 지는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으로 가던 길에 하룻밤 유숙한 곳이다.
정말 유서 깊은 곳이다.
니사재 배롱나무
수령 200년의 배롱나무 여름에 꽃이 피면 대단할 것 같다
재실 서측에는 암반 밑에 얕은 우물이 있고 장방형의 연못이 연결되어 있다.
이 우물과 연못은 모서리에 잘 가공된 장대석과 장식 조각이 있어 건립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
니사재
창살무늬가 최씨고가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같은 사람이 제작을 한 듯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하면서 18~20세기 전통 한옥 40여 호에
85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 남사마을이 그런 명성에 알맞은 곳이다. 농가 105호, 비농가 30호, 주민 숫자가
340명이나 되어 전통 마을 기준으로 볼 때 작지 않지만 많은 가옥이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한국 전통 역사박물관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경북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이 하회마을이라면 경남에는 남사마을이 있다고 할 정도다.
특이한 것은 이곳이 다른 마을처럼 특정 성씨의 집성촌이 아니라는 점이다. 남사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고려 말 진양 하 씨(약 700년)로 알려져 있다. 성주 이 씨(약 450년)는 하 씨가 정착한 지 약 100년
후 단종 복위 모의 사건으로 성삼문의 이모부인 이숙순이 이곳에 정착한 것이 계기다. 밀양 박 씨(
약 350년)는 병자호란 당시 외가에 피난해온 박승희, 박승필 등이 정착해 계속 살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전주 최 씨(약 100년), 연일 정 씨(약 80년), 재령 이 씨를 포함해 여러 성이 있었지만
현재는 30여 개에 가까운 다성이 있어 씨족 마을이라는 개념은 거의 사라진 감이 있다.
많은 성씨가 수백 년간 마을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양반 가문의 반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 말 하즙(1303~1380)과 하윤원(1322~1376) 부자,
그의 외손 통정공 강회백(1357~1402), 강회중(?~1441), 영의정을 지낸 하연(1376~1453) 등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물론, 많은 가문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해 명성을 유지한 것도 큰 요인이다.
구한말 애국지사인 곽종석(1846~1919), 국악 운동의 선구자인 기산 박헌봉(1906~1977) 등도
이곳 출신이다. 결속력이 남다른 씨족 마을이 근본인 조선 시대에 많은 성씨가 한 마을을 이루면서
함께 동고동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을 자체에 특이한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남사마을은 마을 북쪽의 실개천을 경계로 상사마을과 인접해 있다. 과거에는 행정 구역상 개울을
경계로 남사는 진주, 상사는 단성에 속했는데 한때는 마을이 합쳐져 사월 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산청군으로 통합되면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지만 두 마을을 사월 또는 남사라고 함께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동제를 지낼 때는 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전통 마을은 엄밀하게 남사마을을 뜻한다.
이제 개국공신 교서 (李濟開國功臣敎書)는
조선 태조 원년(1392) 10월에 이성계가 배극렴, 조준 등과 더불어 나라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이제((李濟:?∼1398)에게 내린 공신교서이다.
이제(李濟)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고려시대 고위 관료의 자제들에게, 시험 없이 벼슬을
내리던 음식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이성계의 셋째 딸인 경순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태조 2년(1393) 우군 절제사에 올랐지만 태조 7년(1398)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몰려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개국공신 교서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며,
최초의 공신교서의 형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서로 평가된다.
삼연 문(三然門)
영모재
교서 해설문
교서 복사본
300년이 넘은 이끼 낀 회화나무 신비의 나무로 불리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서로에게 빛을 더 잘 들게 하려고 몸을 구부리며 자랐고 X자형 회화나무는
부부가 나무 아래로 지나가면 금슬 좋게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부부나무라고 불린다
회화나무 열매
이 씨 고가 사랑채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 건축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외양간채와
곳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터의 서남방에 자리 잡은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고, 이 마당 북쪽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반의 크기를 가진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랑채 남쪽에 자리 잡은 외양간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외양간과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 동쪽에는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의 중문 간 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중문과 광이 있고 출입문은
안마당 쪽으로 터 놓았다
안채
중문을 들어서서 보이는 안채는 앞면 7칸·옆면 2칸 반 크기로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건넌방 1칸·대청 2칸·안방 2칸을 두고 방과 대청 앞면에 1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는데 뒷면에는 작은
벽장을 달았다. 대청 뒷벽으로 개방된 툇마루를 단 것이 특색 있다.
아래채는 앞면 4칸·옆면 1칸 반 크기로 동향하였는데, 남측단에 부엌과 방·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다. 서향 한 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안쪽은 칸을 나누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막혀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고, 일반 사대부 주택 안채에 있는 부엌 위치가 사당 방향과
반대인 점과 달리 이 집은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안채 마루에는 8가지 바른길 중에 정사 정업 정어 액자를 걸었다
8가지 바른 길
- 정견 : 바르게 보기
- 정사 : 바른 생각
- 정유 : 바른말
- 정업 : 바른 행동
- 정명 : 바른생활
- 정정진 : 바른 노력
- 정념 : 바른 알아차림
- 정정 : 바른 마음의 통일
창고인 듯
후손들이 살지 않고 비워놔서 집이 많이 노후화되어 있다
문위에 작은 쪽문이 있는 것을 보면 다락으로 사용한 듯
이 씨 고가의 사당인데 신주는 모셔가고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 사용하던 풍구
이 씨 고가의 회화나무
450년 된 마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로써 줄기의 커다란 구멍이 배꼽을 닮아 삼신할머니 나무로
불린다 아기를 가지고자 원하는 여인은 구멍에 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아기를 갖게 된다는 설이 있다
줄기 중앙에 배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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