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 예담 재
남사예담촌 독채 한옥숙소 쉼이 있는 남사 예담 재
파리장서 기념비
장서 문
면우 곽종석 생가
곽종석
한말에 호남의 전우(田愚)와 쌍벽을 이룬 대표적 유학자이며, 파리장서의 민족대표.
25세 때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 되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각지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안동의 권세연(權世淵)이나 김도화(金道和) 등이 부장으로 추대했으나
응하지 않고, 각국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
1903년(광무 7) 비서 원승(秘書院丞)에 오르고, 이어서 참찬(參贊)으로 시독관을 겸했으나 곧 사퇴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며, 조약 체결에 참여한 오적(五賊)을 처단할 것을
상소했다. 1910년(융희 4) 일제에 합병이 되자 거창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 운동 뒤 영남과 호서 유생들의 연서를 받아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호소문을 작성하여 김창숙(金昌淑)을 통해 상해를 경유하여 발송케 했다(파리장서 사건) 이로 말미암아
대구에서 재판을 받고 2년형의 옥고를 겪던 중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이내 죽었다.
곽종석은 그의 집 처마가 낮아 출입할 때면 언제나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의 집에 거처했다.
그 때문에 그가 호를 ‘俛宇’ 즉, 숙이고 들어가는 집이라고 지었다. 그런 중에도 일생을 통하여
학문과 수신에 정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문인이며, 이황·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하여, 주리설을 주장하였다
면우(俛宇)는 25세 되던 겨울에 경북 성주군 대포(大浦)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곽종석은 이진상이야말로 퇴계(退溪)의 학통을 잇고 주자(朱子)의
종지(宗旨)를 체득하여 사풍을 일으킨 스승으로 존경해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면우는 스승 한주(寒洲)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아 1만 3천4백 자에 달하는
<한주 행장(寒洲行狀)>을 지어 가르침에 대한 사모의 정을 표시했다.
주:성주 한 개 마을에는 한주(이진상) 선생의 종택이 아직도 남아 있으나 후손들이 없는지
빈집으로 남아 있다 지자체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만우재에는 유학자의 방과 독립운동가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중앙에는 파리 장서가 동판으로 걸려있다
독립운동가의 방
유림 독립기념관 앞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유림독립기념관
선비들은 국운이 기울자 비분강개하여 책을 덮고 일제에 대항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거나 망명길에 올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망국의 통한을 증명한 선비도 있었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교육과 애국 계몽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500년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온 유림은 굳센 지조로 대한독립의 길을 꼿꼿이 걸어갔다
파리장서 운동
유림대표들의 독립 청원운동은 4월 2일 성주의 만세시위 때 이와 관련된 성주의 유생들이
체포됨으로써 일본 관헌에 알려졌다 이들이 완강히 비밀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었다
후에 상해에서 각 고을 향교로 발송한 한문본 청원서가 발각됨으로써 137명의 이름이 알려졌다
유림의 독립운동
국내 정세와 항일운동
파리평화회의
이역만리에서 피어난 유림의 독립열망
면우 곽종석 선생 약력
유림 이남 긴 자취
파리장서 사건에 함께했던 전국의 유림들 그들의 존영과 문집 글씨 유품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김창숙(金昌淑, 1879년 음력 7월 10일[1] ~ 1962년 5월 10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시인 겸 교육자이다.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字)는 문 좌(文佐)이며 호(號)는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躄翁)이다.
일제강점기의 유림 대표로 독립운동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남조선 대한 국민대표 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유도회 회장 겸 성균관(成均館) 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김우(金愚)'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나석주 의사(1892~1926)는 동양척식 주식회사 농장이 있었던 황해도 재령 출신으로, 3ㆍ1 운동이 일어나자
겸이포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군 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활동을 펼치다
1920년 9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중국에서 나석주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과 한단 군관학교를 거쳐 1924년까지 중국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천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해 한층 적극적인 독립투쟁을 강구하던 중, 1926년 6월 유림대표 김창숙을
만나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조선은행, 식산은행 등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12월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나석주는 28일 오후 먼저 조선 식산은행에 들어가
대부계 철책 너머로 폭탄 한 개를 던지고 큰길 건너편 동양척식 주식회사 경성지점으로 달려가 총격과
함께 또 폭탄 한 개를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모두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이어 나석주의 사는 동양척식 주식회사 바로 옆의
조선철도회사로 들어가 한차례 더 총격을 가하고 길거리로 나왔는데,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자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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