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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울산 신정동 용연서원

용연서원은 1737년(영조 13)에 도(道) 유림의 공의에 의해 황용연(黃龍淵) 위에 용연사(龍淵祠)가 창건되어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를 배향하였으며 1782년(정조 6) 웅촌 석천리로 이건 되어 사호(祠號)를 석계라 하였다.

1860년(철종 11)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훼철되었고 1900년(광무 4) 9월 9일 설단 하여

그 후 매년 9월 9일 향사를 봉행하여 왔으며 1915년 경수당(敬守堂)과 필동문(必東門)이 중건되었고

2002년 9월 9일 설단을 훼철하고 복원하여 매년 음력 9월 9일 향사를 봉행하여 왔으나 2001년 3월에

옛 용연사(龍淵祠) 유허지(遺墟地)에 울산 향유의 공의와 월진문회(越津門會) 주도로 용연서원(龍淵書院)을

복원하여 음력 2월 23일 기일(忌日)을 기하여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용연서원 정문인 추인문

용연서원

명성재(동재)

동재는 양반자제가 서재는 평민자제가 기거하며 공부를 했다

온고재(서재)

학성이 씨 일가묘 출토복식이 소장되어 있다

충숙공학파이선생신도비

충숙공이예선생신도비다. 정확히는 충숙공 학성 이선생 신도비라고 적혀 있으며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동남쪽의 큰 길가에 세운 석비로

묘 주인공의 삶을 기록한 비문을 새긴다고 한다.

경앙문

경앙문은 이휴정의 정문이다

이휴정 

이 건물은 본래 울산도호부의 객사(客舍)였던 학성관의 남문루(南門樓)로서 현재의 울산초등학교 교문

근처에 있었다. 한때 이 건물에 옛 태화사의 누각 현판을 달아 태화루(太和樓)라 불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 울산공림보통학교(현 울산초등학교)의 교정을 확장하면서 이 건물을 헐게 되자

학성이씨 월진문회에서 이를 사들여 현재의 위치에 옮겨지었다. 이때 본래 학성이씨 월진파의 정각(亭閣)

이었던 이휴정의 이름을 빌리고 건물도 정자(亭子) 형식으로 일부 고쳤다.

 

문루였던 당시에는 중층의 누각으로 아래층은 출입이 이루어지고 2층은 개방된 마루의 모습이었으나,

현재는 1층이 낮아져서 출입이 안 되고 2층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시설한 모습으로

변하여 문루(門樓) 형식에서 정자형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기둥 간격이 넓고 굵직한 부재를 사용한

초익공 팔작지붕집의 모습만이 조선 후기 문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2003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2005년 복원되었다

돌벼루는 이휴정 이동영 선생이 가문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벗들을 모아 시회를 열어

시문과 정담을 나누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소나무 50~100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믿음직스럽다

시계방향으로  광다회대. 면포소모자. 명주솜 소모자. 난봉화문단겹장옷.

 

국가민속문화재 제37호.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은 1969년에 이천기(李天機: 1610∼1666) 묘와

그의 부인 흥려박 씨(興麗朴氏: 1605∼1672)의 묘,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 1642∼1666)과

그의 부인 평해황 씨(平海黃氏: 1637∼1718)의 부부 합장묘에서 출토된 10점의 일괄유물이다.

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울산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천기의 묘에서는 광다회대(廣多繪帶) 1점, 솜소모자(小帽子: 면포, 명주) 2점이 출토되었으며 이천기의 부인

흥려박 씨의 묘에서는 무명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 등, 3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황 씨의 묘에서는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솜누비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켤레, 옷감 1점 등 모두 10점이 수습되었다.

 

2004년 2월 전문가들의 조사 자료와 문중에서 제시한 묘주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2004년 6월 18일에

문화재명 ‘울산이휴정소장출토복식’을 ‘학성이천기일가묘출토복식(鶴城李天機一家墓出土服飾)’으로

변경하였으며 묘주의 이름과 일부 유물 명칭도 수정하였다. 그리고 흥려박 씨의 묘에서 출토되었던

면포 홑치마 1점을 추가 지정하였다.

시계방향의로 면포솜장옷. 명주솜누비치마. 면포솜버섯. 면포홑치마

 

장옷[長衣]은 지정 당시 ‘직령포(直領袍)’로 명명되었던 것인데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2004년 6월에

‘장옷’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착용하였던 대표적인 포(袍) 종류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장옷은 머리에 덮어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그 이전 시기에는 포(袍)로 착용되었다.

 

장옷 1점은 이천기의 부인인 흥려박 씨의 묘에서 수습된 짙은 아청색 무명 솜장옷이다.

뒷길이가 124㎝, 뒤품은 57㎝, 진동은 32㎝, 화장은 90㎝이며 깃에는 넓은 동정이 달려 있다.

다른 1점은 이천기의 아들인 이지영의 부인 평해황 씨의 묘에서 수습된 ‘난봉화문단(鸞鳳花紋段) 겹장옷’이다

 

치마[赤亇]는 저고리와 더불어 여성의 기본적인 옷이다. 여러 폭을 이어 만든 직사각형 자락의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 허리말기에 고정시키고 끈을 다는데 17세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서 치마를 허리에 둘러

착용하였기 때문에

 

광다회대(廣多繪帶)는 ‘광다회(廣多繪)’라고도 불리어졌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시띠 [絲帶]이다. 관복(官服)이나

사복(私服)에 사용된 넓적한 형태의 띠이다.

 

솜소모자(小帽子)는 이천기의 묘에서 2점이 수습되었다. 아청색 고운 면포와 명주로 만들어진 것인데 머리

부분에는 삼각형 6조각을 이어서 만들고 그 아래에 직사각형 두 조각을 이은 넓은 띠 조각을 둘렀다.

 

 이지영 부부의 합장묘에서 수습된 면포 솜버선 1켤레가 있다. 발길이는 24㎝이고 높이는 27㎝이며 버선목의

너비는 17㎝이다.

 

포금 헌

거문고를 타는 집이라는 뜻이겠지

우락재

사당 상충묘

서원에 관련된 분을 모시는 사당이다

 

식사시간이 넘었는데 시골로 돌아다니다 보니 때를 놓첬는데 가다 보니

보릿고개라는 식당이 있어 들어갔는데 오후 3시가 넘었다

식당내부가 고풍스럽게 꾸며서 있고 특이한 내부풍경에  몇 장 담아본다

방도 있고 테이블식탁도 있고 책상다리 식탁도 있고 중간에는 연못과 섬도 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퀴퀴한 것 같기도 하고 깔끔한 멋은 없어 보인다

많은 골동품들을 수집해 배열을 했고 옛 초가집을 연상케 하며 지붕에는 

박들이 열려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락과 다락방 사이로 연못이 있는데 연못 위를 무지개다리로 연결을 해서

한 껏 분위기를 살렸다

식당이라기보다 찻집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시설과 구조다

중앙에 자리 잡은 연 못에 섬도 만들어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식사 메뉴는 딱 보리비빔밥 하나다

카운터도 마치 진열장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알루미늄 밥솥이나 주전자나 사용하는 그릇들이 다 옛날 우리 가정집에서 사용하던 

것들이고 궁색했던 시절 보리밥을 먹든  그러한 분위기를 주려고 일부러 이런 것들만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리밥이지만 우리가 통상 이용하는 돌솥밥을 연산케 하는 밥을 덜어 비빔밥으로

사용하고 밥솥에는 물을 부어 누룽지를 후식으로 먹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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