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남.울산

울산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

학성 이 씨 파종가집(서면파)으로 시조인 이예(李藝)의 11 손 이의창(李宜昌)이 지었다.

고종 때 이의창의 증손인 이장찬이 고쳐 지었고 1934년경 다시 전체적으로 고쳐 지었는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천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이 집은 문간채, 사랑채, 곳간채, 별당채, 안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갖추고 있다.문간채는 대문에 딸린 건물이고 사랑채는 작은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 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 주는

집이다.이 고택은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이재락 의사가 살았던 곳이었으며, 또한 이곳은 울산 유림들의

독립자금 모금활동 시 모여서 논의를 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 고택은 조선 영조 41년 근재 이의창 이 세운 학성이 씨(鶴城李氏)
봉사공파(奉事公派) 종택이다.

고종 때 한 차례 고쳤고. 1934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의 구분이 뚜렷하고 사당도 갖추고 있어

조선 후기 사대부 종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툇마루가 있는 사랑채는 정면 3칸 안채는 정면 6칸 기둥은 사대부 집에서는 보기 힘든 원형이다.
그리고 뒷마당이 넓은 것도 눈여겨 볼점이다.
안채 정침에서 보면 대문 쪽 방향의 조산인 벼락띠산 회야강 건너편 산이 보이도록

집을 지어 풍수설을 따랐다고 한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주로 거처하면서 외부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생활공간 또는 방을 말한다

근재공고택의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며 팔작지붕의 형태로 가운데 용마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내려오는 내림마루가 멋스럽고 아주 아름답다

특히 민족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심산 김창숙선생이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을 할 때 실제로

학성이 씨 근재공고택의 사랑채에서 기거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랑채 뒷모습

객사

고택의 객사는 근재공고택을 찾은  손님을 맞이하거나 묵게 하는 방으로 요즘식으로 손님방이다

근재공고택의 객사는 이재락선생의 며느리이자 심산 김창숙선생의 딸 적기에 대한 아픈 역사가 있다

이재락선생의 큰며느리였던 덕기는 이재락선생이 일본순사에 의해 체포되는 장면을 보고 쓰러지고

난 후 몸과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지 못해 깨어난 후에도 줄곳 객사에서 지냈다는 의리시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객사

우물 

안채

고택에서 두채 이상의 집이 있을 때 가장 안쪽에 있는 집채로 안채는 살림집에서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던 중심건물을 말한다

근재공고택의 안채는 팔 짝 지붕을 얹은 정면 6칸의 비교적 큰 건물이며 안채의 기둥은 일반 사대부

집에서는 보기 드문 둥근 모양의 원형기둥이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따라 가장 멀리 우뚝 솟은 봉우리를 뜻하는  조산인 벼락띵이 산 (병풍산)이

보이도록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토록 생활공간을 나눈 영역분리가 명료하고 독립된 사당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의 상류층

종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채에 기거하는 여성들의 사랑채나 거처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다

사당

사당은 조상의 신주(죽은 사람의 혼을 모시는 나무패)를 모시는 곳이며 가묘(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고조부 이하의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라고도 한다

선조 이후부터는 사대부 양반층에 일반화되었고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세워야 했다

사당은 반드시 집안의 북쪽 끝에서 남쪽을 바라보게 하여 짓고 서쪽 방향으로부터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순서로 위패를 두며 각위패마다 제사상을 놓고 그 위에 촛대 한쌍식을

놓아둔다  오늘날은 오래된 별묘는 그대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나 새로 신주를 조성하는 집안이

별로 없어서 사당은 특별한 경우에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안채가 있는 뒤뜰

안채 뒷면의 모습

임진왜란 때 울산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이겸익 선생의 후손인 근재공 이의창 선생이 1765년 웅촌면

대대리에서 현 위치로 옮겨지을 때 이 모과나무도 같이 심었다고 이야기가 전해지며 나무의 나이는

200년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 오래돼서 말라죽기 직전이지만 매년 모과가 주렁주렁 열린다고 한다

목련나무

근재공 고택 전경

밖에 밭에 있는 울타리에는 아직도 박주가리 씨방이 남아 있다

극재당 고택의 밭 울타리에 있는 박주가리 씨방과 계뇨등 열매

어느 집 대문위에 키위나무에 주렁주렁 키위가 열려 있는데 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마을의 어느집 울안에 있는 산수유는 그렇게 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도 아직 탱글탱글하다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루귀와 복수초  (32) 2023.02.20
변산바람꽃  (43) 2023.02.18
울산 신정동 용연서원  (23) 2023.01.29
양산 통도사 자장매  (36) 2023.01.27
울산 석계정사와 석계서원  (32) 2023.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