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창면에서 남산면 반곡지로 가는 도중에 삼성현역사문화공원이 보여 잠시 들렀다 가기로 한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경산시 남산면 인흥리에 자리 잡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26만 2천여㎡의 넓은 면적에 조성돼 있다.
경산에서 태어난 세 성현, 즉 한국불교를 대중화한 화쟁국사 원효, 이두를 집대성한 설총, 삼국유사
집필로 우리 민족 역사관을 세운 보각국사 일연의 역사 문화적 업적과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고
도시생활에 지친 시민들의 휴식을 위해 2015년 문을 열었다. 전통과 문화, 쉼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공간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찾아 보고 즐기고 쉬면서 역사도 배울 수 있다.
아마도 분수대 건너편에 피어 있는 꽃이 라일락 같아 보인다
줌인해 보지만 꽃의 형체만 보일 뿐이다
잘 가꾸어진 잔디광장
벚꽃은 이제 다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삼성은 원효 설총 일연을 말한다
원효
원효는 신라 진평왕 때에 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 밤실에서 오색구름이 찬란한 가운데 첫 울음소리를 냈다.
그의 출생 상황은 석가와 비슷했다. 그의 어머니는 유성(별똥별)이 배 속으로 들어와 요동을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꿈을 깼다. 그 직후 그녀는 아기를 잉태했으며, 친정집으로 가던 중 아랫배가 아파 밤나무 밑에서 쉬다가
원효를 낳았다
설총
일연스님
신라의 고승. 설총의 아버지. 특정한 스승이 없이 여러 교학과 학승들을 편력하며 혼자 공부했다.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며, 원효는 그의 법명(法名)이다.
원효는 왕실과 귀족 등에게만 받아들여진 불교를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제자를 양성하는 데에는 큰 뜻을 두지 않았으며, 신라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중국에 널리 알려져 중국 화엄학이 성립되는 데에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특히 고려 시대에 들어와
의천에 의해 화쟁 국사로 추증되면서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불교 사상을 종합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이자 으뜸가는 저술가다.
화쟁국사는 원효가 죽은 후 왕으로부터 내려진 시호다
원효의 진영
대승을 회고하다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
원효의 일심사상
파게와 번뇌
원효와 의상
해골물의 교훈
원효가 만난 세상
수행과 배움의 길로 들어서다
초계사와 사라사
설총
신라 10현의 한 사람이며, 강수·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3 문장으로 불린다.
자는 총지.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이며,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다.
태종무열왕 때인 654~66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천성이 명민했으며 경사와 문학에 널리 통했다고 한다.
설총 원효를 그리워하다
신라유학의 흐름
이두. 한문에 토를 달다
한자풀이에 이두를 활용했다
경주 서악서원은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아래 있는 서원으로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으며, 서원철폐령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이다.
이 서원은 1561년(명종 16) 당시의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을 기리기 위해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를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던 것을 1600년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옛 터에 초사(草舍)를 다시 지어 전란을 피해 보존된 위패를 모셨다,
1602년 부윤 이시언(李時彦)이 사당 중건을 시작하였고, 1610년 강당과
동재, 서재,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새로 지었다.
1623년 조정에서 서악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1646년 부윤 이민환이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였고, 이후 수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김유신·최치원의 영정과 홍유후·설총·문창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경주 서악서원의 이름을 본 따 남악서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전설에는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전략상 요지를 찾아다니다가 현재의 남악서원 자리에서
신령을 만나 삼국통일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남악서원의 기원은 680년경에 세워진 김유신의 사당에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서원으로 완성된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다.
설총의 강학당
문묘는 공자나 여러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설총의 신도비와 도동제
1864년 경산의 유림들이 도동단을 세워 설총을 제향해 오다가 1923년 도동제를 건립하였다
이후 1925년에 단소와 홍유후설선생신도비를 세워 설총의 문학과 업적을 기리는 추모제를
매년 음력 3월에 지내오다가 근래 음력 9월에 지내고 있다
2007년 유림들에 의해 도동재 사당(경모사)을 새로 지은 후 성균관에 도동서원으로 신청하여 승격되었다
보현스님 -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