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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예림서원과 점필재 생가

위양지를 돌아보고 이곳 퇴로리로 점심을 먹기 위해서 왔는데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보이고

고택이 있어 잠시 돌아본다(4/28)

독립의사 함평이공휘상관기적비

매화는 벌써 60%는 큰 것 같다 오워하순이면 딸 것 같다

붓꽃

정겹게만 느껴지는 우리의 전통 돌담이다

작약

낮달맞이꽃

퇴로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여주이 씨 자유헌공파 종택 이익구의 고택이다

잘 지어진 집이지만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어 비어 있는데 정부에서 보조금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보존이 될는지 안타까운 실정이다

공조팝나무

 

소은고택도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는 없지만 밖에서 바라봐도 많이 낡아서 몇 년이나 더 지탱할는지 모르겠다

소은고택현판

큰물칭개나물 

2년생 초본으로 종자로 번식하고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냇가의 습지에서 자란다.

줄기는 높이 40~120cm 정도로 가지가 갈라지고 전체에 털이 없다. 마주나는 잎은 길이 5~15cm,

너비 2~5cm

정도의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낮은 톱니가 있다.

 

7~8월에 개화하며 총상꽃차례에 달리는 꽃은 연한 하늘색 바탕에 자주색의 줄이 있다.

삭과는 지름 3mm 정도로 둥글다.

‘물칭개나물’과 달리 소화경은 길이 3mm 정도로서 다소 위로 향하며 꽃차례의 지름이 8~12mm

정도에 이른다.

식용하거나 퇴비나 사료로 이용한다. 밀원용으로 심기도 한다. 어린잎과 싹을 데쳐서 나물로 먹는다.

독서루와 외삼문

 

서원은 국가에서 권장하고 사림에서 추천하는 유림만을 엄격하게 선별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양성하는 사설 고등기육기관으로서 조선시대전기에는 전국에 29개소 밖에

설치되지 않았다

그중에 덕성서원(예림서원의 전신)은 전국에서 10위안에 들었다

 

예림서원은 명종 22년에 당시 부사 이경우가 밀양유림의 요청으로 퇴계이황의 자문을 자시산 아래

영원사 옛터인 지금의 밀양시 황성동에 서원을 짓고 덕성서원이라 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1567년(명종 22) 중동면 자시산에 덕성서원을 창건하고

김종직의 위패를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했다.

1634년(인조 12)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서원의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박한주·신계성을 추가 배향했다.

1669년(현종 1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875년에 복원되었다.

일신제(왼쪽 글)

일신우일신 날마다 새롭게라는 뜻

 

극준조약무생과실(오른쪽 글 )

'이치와 규약을 지극히 잘 따르면 잘못이 생겨날 수 없다'는 뜻이다. 김종직 선생이 원칙에

 충실하게 살았고, 그 때문에 잘못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후학 분성배길기가 쓴 예림서원현판

구영당

가득 참 즉 완성됨을 추구한다는 뜻

시민재

때에 맞게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뜻

직방재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

돈선재

두터운 우정과 선행으로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

직방재와 돈선재는 학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와 사재이다.

무오사화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며 유자광은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이에 연산군은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았다.

또한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유자광 등 훈구파는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음백과

전사청 

정양문

제사를 모시는 사당 내삼문

육덕사 사당에는
중앙으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좌우에는 오졸재 박한주 선생과 송계 신계성 선생을 배향했다.

음력 3월 9일이 제향날이라서 준비를 하는 것 같다

불두화 

둥근형태의 꽃 모양이 부처님 머리모양을 닮았다 하여 불두화라 하였다.

정원수로 쓰이며 열매를 맺지 않는 상징적 의미 때문인지 사찰에 많이 심겨 있다.

인동과의 낙엽 지는 작은 키나무이다. 불두화는 백당나무의 유성화를 없애버리고 무성화의

 꽃잎만 자라게 한 원예품종이다. 공 모양의 커다랗게 핀 꽃이 인상적이다.

점필재김종직

1470년부터 1480년대 초까지는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지방관을 거치면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불행도 겹쳐 세 아들을 모두 잃게 된다.

1482년에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난다.

 한 마디로 불행의 연속이다. 그래서 '죽은 아내에게 바치는 제문'이 더욱 절절하다.

 

적막해라 서편 방 그대 있던 곳이었네.            寂廖西閤 君其在玆

옷 이불 대야 빗자루 그대 물건 그대로 있네.    衣衾盥櫛 象君平時

음식과 기물도 편의대로 따랐건만                  飮食供具 亦且隨宜

자식 낳은 수고에도 아이 하나 없으니             君昔劬勞 終無一兒

상복 입을 사람 누구인가 아아 모두 끝났구나.  執喪者誰 嗚呼已而

앞에는 거대한 산수유나무가 가지는 다 잘린 채 덩그러니 두 그루가 서있다

조의제문

운문체로 써졌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이 칠 장복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서초패왕 항우를

세조에, 의제를 노산군에 비유해 세조찬위를 비난한 내용이다

점필재 김종직 생가

밀양을 대표하는 강은 밀양강이다. 밀양을 관통해 낙동강과 합류한다.
감내는 그 밀양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인데,감내란 이름엔 전해오는 내력이 있다. 
 선생이 태어나자 사흘 동안 물맛이 달아서 감내라 지었다한다.

[金宗直(김종직) 선생 동상]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죽은 지 오륙 년이 지나서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마저 찢긴 비극의 정치인. 생전에 지은 문집마저 불 찔러 버려라,
임금이 엄명한 비운의 문인이었다.
 그럼에도 영남 사림파의 開祖(개조)로 불리는 대학자.
'아닌 것은 아니요', 송곳 같은 정신을 내보인 풍운아. 
연산군 무오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김종직의 글 한 편, 弔義帝文(조의제문).

추원재

추원재는 조선전기 성리학의 거두인 김종직의 생가터로, 1389년 김종직의 부친인 김숙자 선생이 지었고,

1810년 김종직을 따르던 선비들과 후손들이 합의하여 낡은 건물을 중수·개조해 그 이름을 추원재라 하고,

당호를 전심당이라고 지었다. 추원재가 위치한 밀양 제대리는 김종직의 외가였고,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생장했고, 일생을 마쳤다. 추원재 정원에는 김종직의 흉상이 세워져 있으며 팔각지붕과 7개의 계단이 인상적인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기둥 사이 하얀 벽과 단조로운 멋이 있는 지붕의 추원재가 드러난다.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닮아 있는 이곳은 전심당이라는 당호로 불리고 있다.  추원재 뒷산에는 김종직의 묘소가 있다.

그의 묘소는 원래 자리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온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묘역 정비 과정에서 본래 자리를

확인한 후 지난 2009년 5월 중창을 마친 후 기적비를 건립했다.

전심당의 뜻은‘성리학의 전수자’라는 의미로, 이는 김종직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전심’은 동방의 성리학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에서 김종직, 김굉필,

정일두 등에게 전해졌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물같이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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