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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판소리 박물관

고창읍성을 돌아보고 점심식사 후 이곳 판소리 박물관으로 왔다

고창 판소리박물관

김소희

전라북도 고창군 출신으로, 아명은 옥희, 호적상 본명은 김순옥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이모가 '소희'라는 이름을 다시 지어주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 조선권번 소속의 동기로서 노래, 춤, 기악을 두루 배웠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여러 스승들에게

배웠는데 특히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과 정정렬의 소리를 많이 배웠고, 그 외에 박동실에게서도 많이 배웠다.

해방 후에도 박록주, 김여란 등 선배 소리꾼들에게 조금씩 소리를 배워 자신만의 소릿제를 짰는데, 속칭 '만정제'가

그것이다. 현재까지도 그녀의 수많은 뛰어난 제자들과 후학들을 통해 활발하게 전승되어 불려지고 있다.

다음에 다시 소개.

박초월(1915~1982)은 남원군 아영면 청계리에서 박덕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34년 김정문(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웠고, 1935년부터 10년간 송만갑(宋萬甲)에게 〈춘향가〉·〈심청가〉·

〈수궁가〉·〈적벽가〉 등을 배웠다. 1930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세에 오케·포리돌·빅타레코드사와 계약하고, 〈흥부가〉·〈춘향가〉·〈심청가〉등을 취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창제는 동편제이고, 조통달(趙通達)·남해성·김수연(金壽蓮)·김정민(金貞民)에게 〈수궁가〉를 가르쳤다.

1955년 박귀희와 함께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립해 후진을 양성했고, 1962년 초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1966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활동했고, 1971년 국악협회 상임고문, 1974년 판소리보존회 이사장을 지냈다.

1976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민속음악제에 참가했다. 〈춘향가〉·〈심청가〉에 특히 뛰어났다.

 

김연수.정응민.임방울

김연수

정응민

임방울 

이동백. 송만갑

이동백 

송만갑 

판소리의 세계적 가치 

판소리 

박록주. 정정렬

판소리란 무엇인가 

판소리의 전승 

동편제 

SP시대의 판소리음반

판소리형성기 

판소리전수 

시대개관

근대 5 명창시대의 명창들 

광복 이후 판소리 명창들

광복 이후 명창들 

판소리계소설이란?

신재효본 판소리 여섯 마당

동편소리의 창조적 계승자 송만갑 신식 서편소리의 거장 정정렬

정통 서편소리 국창  김창환 

            명창이선유의 오가전집                                                                                    중고재의 명창 이동백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성명창 이화중선 

동초 김연수의 판소리 다섯 마당  

광복 이후의 판소리 명창들 

동리 신재효

우리나라 판소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선 후기의 판소리 명창. 본관은 평산, 자는 백 원, 호는 동리이며

아버지를 따라 고창에 내려와 향리로 살면서 고창지방관청에서 열렸던 잔치에 판소리 광대를 포함한

각종 연예인들을 동원했던 경험과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판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판소리 광대들의 후원 및 이론적 지도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동편제와, 잔가락이 많고 박자의 변화가 많은

서편제에서 각기 장점을 취해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광대가>에서 판소리 사설과 창곡, 창자의 인물됨과 연기능력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판소리 4대 법례를

제시했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 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그의 가계는 본래 경기도 고양(高陽)이었으나, 서울에서

경주인을 지내던 아버지 광흡(光洽)이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경영하면서부터 고창에 살게 되었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철종 때 고창현감이던 이익상(李益相) 밑에서 이방으로 일하다가 호장(戶長)에

올랐다. 1,000석을 추수할 정도의 부호였던 그는 1876년(고종 13년) 흉년에 구휼미를 내어 이듬해 통정대부

(通政大夫) 품계를 받았다.

 

특히 판소리 광대들의 후원 및 이론적 지도자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동편제(東便制)의 명창 김세종(金世宗)이

소리 선생으로 초빙되어 판소리 전문교육을 도왔다.

이날치(李捺致)·박만순(朴萬順)·전해종(全海宗)·정창업(丁昌業)·김창록(金昌祿) 같은 명창들이 그의 지원과

이론적 지도를 받았다. 그밖에 진채선(陣彩仙)·허금파(許錦波)와 같은 최초의 명창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동편제와, 잔가락이 많고 박자의 변화가 많은

서편제(西便制)에서 각기 장점을 취해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광대가 廣大歌〉에서 판소리 사설과 창곡, 창자의 인물됨과 연기능력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판소리 4대 법례를

제시했다. 만년에는 향리직에서 물러나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

〈적벽가〉·〈변강쇠가〉의 6마당을 골라 그 사설을 개작, 정착시켰다. 이 같은 작업은 당시 광대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작품들을 일단 정리하고 후대에의 전승을 매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조선 후기 상하층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며 판소리 사설을 합리적·사실적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당대 하층민이 이룩한 발랄한 현실인식이 보수적 지향이 강한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에 의해 상당 부분

거세되었다는 한계를 함께 지닌다. 판소리 개작 외에도 〈치산가 治産歌〉·〈오섬가 烏蟾歌〉·〈방아타령〉·

〈갈처사 심보가 葛處士十步歌〉 등을 비롯해 허두가(虛頭歌) 30여 편을 지었다.

이들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신오위장본 申五衛將本〉에 개작한 판소리 6마당과 함께 실려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하거리(下巨里)에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가 남아 있으며, 묘소는 고창읍 성두리

(星斗里)에 있다.

소리굴에서의 100일 공부와 폭포소리

김소희의 예술관 

김소희의 판소리특징 

김소희

본명은 김순옥(金順玉). 호는 만정(晩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32년 전남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수료하였고, 당대 명창 이화중선의 「추월만정」

을 듣고 감동받아 판소리에 입문하였다.

1930년에 명창 송만갑을 찾아가 판소리에 입문하여, 단가와 「심청가」 몇 대목을 배웠다. 송만갑이 떠난 후

이화중선이 어린 김소희를 창극무대에 향단이 역으로 세상에 소개했다.

그 후 15세가 되던 해인 1932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온 지 한 달여 만에 김소희는 한성준의 주선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1932년 전계문에게 가곡과 시조를, 김용건에게 거문고와 양금을, 1933년 정경린에게 무용을 배웠다.

1934년 정정렬의 문하에서 판소리를, 김종기 명인에게 가야금을 배웠고, 1938년에는 박동실에게, 광복 후에는

정응민, 김여란, 정권진, 김연수한테서 판소리를 배웠다.

1930년 조선음룔협회와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1948년에 사단법인 여성국악동호회

이사, 1954년에 민속예술원 원장, 1957년 대한국악원 이사, 1962년 국립창극단 부단장, 196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주요 공연으로는 1949년 제9회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및 유럽 순회공연, 1964년 동경올림픽 공연, 1972년

미국 카네기홀 공연, 1976년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 순회공연, 1979년 국악생활 50주년 대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공연 등이 있다

김소희는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를 장기로 삼는데, 그는 소리뿐 아니라 각종 악기 연주와 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룰 정도의 기량을 지니고 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수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안향련, 한농선, 박초선, 박송희, 김동애, 오정숙, 안숙선, 성창순, 남해성, 이일주, 신영희

, 박양덕, 오정해 등이 김소희한테 판소리를 배웠다.

수많은 제자 가운데 안숙선이 김소희의 소리를 가장 잘 물려받은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신영희는 2013년

중요무형문화재 김소희제 춘향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소희는 장단 붙임새 운용에 변화가 많고 매우 기교적이다. 슬픈 대목이 많은 「심청가」도 서정적이고 청아한

느낌이 나게 부를 정도로 고운 목소리를 가졌다.

김소희는 「들국화」 같은 신민요도 작곡한 바 있고,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국립창극단 공연 시

편곡을 해주었으며, 「탕자가」·「부활가」 같은 창작 판소리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1932년 말에는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처음으로 녹음하여, 1933년 상반기에 음반으로 나왔다.

이때 취입한 것은 단가, 「춘향가」, 「심청가」 등 유성기 음반 5면이다. 1934∼1935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심청가」, 「춘향가」, 민요 등 다수의 음반을 취입했는데, 유성기 음반이 17면으로 확인되었다.

1936년에는 빅타레코드사에서 「춘향가」 전집, 「춘향가」 중 ‘이별가’와 ‘옥중상봉’, 「춘향가」 중 ‘심봉사

황성 가는데’,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등을 녹음했다. 1959년 KBS레코드에서 제작된 해외 소개용

국악음반에 남도민요,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녹음했고,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문화재관리국에 「춘향가」 전 바탕을 녹음했다.

이 「춘향가」 전 바탕 녹음은 1976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한국전통음악대전집』에 담아 제작한 바 있고,

1988년 중앙일보사에서 『국악의 향연』 전집에 담아 제작하기도 했다.

1960∼1970년대에 지구레코드, 신세기레코드, 시대레코드, 히트레코드, 현대음반, 미국 넘서치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여러 장의 단가, 판소리, 창극, 민요음반을 냈고, 사가판으로 「심청가」(성음 4LP, 1974),

「춘향가」(성음 6LP, 1978)를 제작한 바 있다.

 

1931년 남원춘향제 민속예술경연 1등 상, 1959년 제4회 국악상(국악진흥회), 1962년 세계방송대상,

1966년 국전 서예 입선, 1968년 국전 서예 신인예술상, 1971년 제2회 아시아 음악제 방송 적합성 부문 우수상

(유네스코), 1972년 문화예술진흥 공로상(문화공보부), 1973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국창기념비 건립헌수

(고창 흥덕 청년회의소), 1982년 초대 한국국악대상, 198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87년 남원시예술문화대상,

서울시문화상, 초대 동리대상, 1994년 제1회 방영일 국악상, 1995년 금관문화훈장 등이 추서 되었다.

김소희는 제자들도 많이 배출을 하였다

김소희 공연모습 

큰 으아리

조용필/아직도 사랑은 끝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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