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2년 전에 옆지기와 화순 여행하면서 오후 늦은 사간 지나가며 보았던 곳인데
이번에 화순적벽 가면서 들려보았다
사약을 받은 자리에 건물을 지은 애우당(愛憂堂), 현판은 후학 이병현의 글씨다. 적중거가(謫中居家)는
유배생활을 할 때 기거하던 처소로 방 두 칸, 부엌 한 칸의 세 칸짜리 초가집으로, 유배 당시의 누옥을
재현하여 복원하였다. 방 한 칸에는 기묘사화로 귀양 와 있던 정암 조광조 선생과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학포 양팽손 선생(갓 쓴 사람)이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도 재현했다.
유적지에는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 영정은 조선 후기의 화가 국오 정홍래(1720 ~ 미상)의
작품이다.
적려유허추모비(謫廬遺墟追慕碑)가 있는 비각은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년)
조선 중종 때 도학정치를 주창해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한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
호는 정암이며 17세 때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워 20세 때 촉망받는 청년 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됐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처형되면서
제자들까지 처벌당하게 되자 함께 유배당했다.
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해 왕의 신임을 얻게 됐다. 연산군이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뒤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했을 때, 정치사상을 주장하면서 중종으로 하여금 이상 정치를 실현하게 했다.
하지만 훈구파의 탄핵으로 사사의 명을 받았고, 정광필의 변호로 유배에 그쳤으나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다시 사사됐다. (다음백과)
<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유배지 적려유허추모비
1519년(중종 14) 훈구세력과 반정 공신들이 한데 뭉쳐, 조 씨가 역심을 품고 왕이 되려 한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이 꾸며졌다.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글씨를 갉아먹도록 한 사건이다.
즉,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는 성리학의 도학주의적 정치이념에 따른 개혁정치를 펼쳐가고 있던 조광조를 영수로 이하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세력이 남곤, 심정, 홍경주 등 기성 훈구세력에 의해 거세된 정치사건이다.
정암 조광조는 훈구파의 모함을 받아 전라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25일째인 12월 20일에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 후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당시 능주 목사였던 민여로가 적려유허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새겼다. 적려(謫廬)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한다 푸른비님글에
받침돌은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다. 비신에는 앞면에 '정암조 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글씨를 2줄의 해서체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 내력을 적었다. 머릿돌은 반달 모양으로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엉키어 있고 뒷면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의정부 우찬 겸 성균관제주세자이사 송시열이 짓고 전서는 충청도 관찰사 겸 수군절도사 순찰사 민유중이,
글씨는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썼으며 현종 8년(1667년) 4월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건립하였다.
꼿꼿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아무리 고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인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올바른 판단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성격은 자신보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대가 약한 사람들을
수하나 추종자로 만들 수 있지만, 그와 능력이 비슷하거나 뛰어난 사람, 혹은 그 못지 않게
심지가 강한 사람들의 혐오감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이다.
즉 학자로서나 정치인으로서도 스스로 적을 만드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 성격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이다.펌글
사약을 받고 지은 절명시(絶命詩)가 가슴을 울린다.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
내 충성스러운 마음을 환히 비춰 밝히리라
이 시를 전해 들은 선비가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밖에서 본 유배지 전경
유배를 와서 살았던 집 채 한 달도 안 살게 된다
정암 조광조선생과 양팽손선생의 대화 장면
양팽손(學圃 梁彭孫 1488∽1545년)은 조광조에게 의리를 지킨, 조선의 대표적 ‘절의’(節義)로 꼽히는 인물이다. 광주 인근인 능성(화순) 출신으로 1510년 정암과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했고(양팽손은 생원과 2등, 정암은 진사과 수석), 평생을 그와 동지로 지냈다.
서화에도 뛰어났던 양팽손은 조광조보다 한 해 늦은 1516년(중종 11년) 과거에 급제했고,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평소 성품이 강직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사림의 대표가 되어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삭탈관직 돼 낙향한다. 그 사이 훈구파에 의해 역모로 몰린 조광조도 유배되는데, 유배지가 하필이면 양팽손의 고향인 능성(화순). 두 사람은 능성에서 조우한다. 실로 기막힌 만남이었다. ‘학포집’에 따르면 두 사람은 매일 만나 서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1519년(중종 14년) 12월 20일. 양팽손은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고 운명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날따라 큰 눈이 내려 한 자나 쌓였다. 양팽손은 홀로 종일토록 곡을 했다. 조광조의 시신은 왕명으로 사사(賜死)된 주검이어서 수습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양팽손은 밤을 틈타 아들과 함께 시신을 달구지에 싣고 50리 떨어진 쌍봉리 중조산 자신의 선산으로 운구해 가매장한다. 이듬해 봄, 그 유해를 조광조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에 보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한다. 연경님 글에서
공조팝나무
알리움
정암유배지를 돌아보고 이곳 영벽정에 왔다
화순 능주 영벽정에는 지석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있다. 이 철로는 경전선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오고 가는 철로이다.
목포에서 부산까지 완행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예전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을 때는 이 열차가 유일한 교통인 시대가 있었다.
시골에서 광주로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의 학교 가는 통학열차였고,
농촌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실어 나르는 유일한 교통수단이기도 했던 열차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 있는 영벽정이 지석천의 맑은 물빛에 투영되며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특히 물결 한 점 없이 고요한 지석강이 마치 밝은 거울을 보는 듯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연상케 한다.
영벽정(映碧亭)은 맞은편에 있는 구슬이 연이어 있는 듯한 모습의 연주산(連珠山)이 지석강의 맑은 물빛에
비치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석강을 가로질러 뻗은 경전선 철길로 기차가 지나가면 낭만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연주산과 지석강과 어우러지며 풍광이 빼어나 일찍이 많은 시인묵객들이 자주 찾은 곳으로 능주팔경
(映碧賞泉․영벽상천)으로 불려 왔다.
정자에 오르면 계절에 따라 바뀌는 연주산의 아름다운 자태가 맑은 지석강물에 투영되면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해 낸다.
사계절 사진작가들과 행락객들이 자주 찾고 있는 화순의 관광 명소다.
2층의 팔작지붕에 한식골기와를 얹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형이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양팽손(l488~l545)의 제영, 김종직 (1431~1492)의 시로 보아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순브레이크뉴스에서
영벽정(映碧亭)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 있는 건축물이다.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시
연주산에 뜬 쟁반 같은 달이여
바람 잠든 풀숲에는 이슬만 차갑구나.
하늘 가득한 뭉게구름 모두 지나가고
태평연월에 병영은 찾아 무엇할까.
일 년에 중추가 가장 좋은 시절임을 이제야 알랴만
나그네의 밤이 이리 즐거울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는 이제 서쪽 바다로 갈 것인데
손끝으로 게꼬막 까먹을 일만 남았구나.
학보 양팽손의 시
일신재 정의림의 시
누정 안에는 시인묵객들의 시문을 적은 여러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기둥과 기둥을 이어주는 도리에는 용틀임을 하는 용의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을 새겼고 천정에는 연꽃 문양과 우물(井) 장식으로 멋을 부렸다
영벽정의 전설 같은 이야기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貫永里)의 지석강(砥石江) 상류
영벽강(映碧江)에는 영벽정(映碧亭)이라는 정자(亭子)가 있다.
능주 고을 목사들의 영송연회(迎送宴會)가 모두 이 정자에서 베풀어졌는데,
정자가 세워진 내력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능주 고을에는 진 처사(陳處士)가 살았는데
영벽강에 정자를 짓기 위하여 높은 산의 거목을 베어 끌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을 지어 상량을 올려놓으면 집이 쓰러지기를 반복하였다.
이에 진 처사는 실의에 젖어 병석에 눕게 되었는데,
어느 날 꿈에 용암산의 산신이 나타나 “계책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하였다.
칠일 째 되던 날 사미승(沙彌僧)이 찾아와 터의 지세가 복토혈(伏兎穴)이라고 하면서
정자의 기둥 하나를 칡뿌리로 세우고 토끼 지장신을 그려
정자 터 중앙 주추에 묻어야 한다고 하고서는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진 처사는 날마다 칡뿌리 기둥을 생각하다 다시 병석에 누웠는데,
용암산 산신이 다시 나타나 뜻을 풀어 줄 사람이 찾아올 터이니 기다리라 하였다.
다음 날 책장수 노인이 나타나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하자
진 처사는 그를 묵게 하고는 은근히 칡뿌리 기둥 이야기를 하였더니,
장흥 천관사(天官寺)에 500년 묵은 칡이 있는데 천관사 스님이 보호하고 있다고 말을 하였다.
이에 진 처사가 천관사를 찾아가 늙은 주지 스님을 뵙고
천관사에서 보호하고 있는 칡뿌리로 기둥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전생의 형님을 뵈었다고 하면서 한 달 후에 기둥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 뒤 한 달이 채 못 되어 영벽강에 물이 넘쳤는데,
천관사 스님이 작은 배를 타고 칡뿌리를 물에 띄워 끌고 왔다.
이렇게 하여 칡뿌리로 기둥을 세우고,
즉시 지장상(支將像)을 그려 영벽정 주춧돌 밑에 묻었는데,
그 뒤로 정자는 쓰러지지 않고 무사하였다.
이후 1931년에 원인 모를 불이 났는데
칡뿌리 기둥만은 신기하게도 조금도 타지 않았고
지금도 영벽정 기둥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고 한다.
반영이 아주 아름다운 곳인데 바람이 불고 부유물이 많아서 반영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곳에서 간단히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이제 화순적벽을 보기 위해서 화순 이용대 체육관으로
이동을 한다
신원형/개똥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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