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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예산 수덕여관(이응로 화백 사적지)

수덕여관은 세 여자와 세 남자 이야기 때문에 수덕사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 
      세 남자란 송만공스님, 이응로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여관 뒤편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 공 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 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 실 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된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왔다"

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은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 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애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34년부터 43년까지 작품활동을 하며, 자유연애, 이혼고백장 발표,

최린을 상대로 한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소송 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 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 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옥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1967년 또다시 김태신이 어머니  김일엽 스님을 견성암으로 찾아온다.

일엽스님은 쪽 물감 만드는 일과 선수도 하는 것과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갈하게 가꾼 쪽을 응달에다 말려 단지에  발효시키는데, 동짓달부터 이듬해 5월까지

7백 번 손을 써야 한다.
699번 정성을 들였다가도 단 한번 소흘이 하거나  부정을 타면 쪽이 죽어버린다는 지극히

선적인 생명체다.”라고 한다.

“발효하기 시작하면 목욕재계하고 조석으로 저어 줘어야 하는데, 젓는 동안 화엄경을 암송한다.

”(김일엽이 입적하기 5년 전이다.)

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스르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

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라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낱같은 희망으로 살아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 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 오리그림이 걸려 있다.
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년 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신 한 사람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 노 스님이 털어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 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며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 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6 사람의 이야기는 끝내고, 수덕여관의 현재

상황을 설명한다.

이암각화는 1969년 동백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고 이곳 수덕여관에 쉬면서

암각을 제작할 때 박귀희여사께서 당신 너무나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시지 않고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긴 디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 하니 고암선생께서 당신은 모를 거야 삼라만상의 성쇠를 만들고 있네 

하더랍니다

 

만공스님에게 불자의 길을 거절당한 후 몇 년이 지나서 결국 화가도 한 남자의 아내가

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혜석은 수덕여관을 나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다가

그곳 마곡사에서도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안양 양로원을 거쳐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던 나혜석은 양로원 생활도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음인지 양로원을 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그때가 1948년 12월 10일이다.

전체글 임종건/한남대 교수의 글에서 가져왔다 

 

예술가의 여관이란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첫 번째 손님, 나혜석 
근대 여성인권의 선각자 


1896년 구한말에 태어난 나혜석은 오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여성을 안타깝게 여긴 선각자였다.

도쿄여자미술학교서양화부 재학 중에 "여자도 사람"이라는 내용의 최초 여성해방평론인

「이상적 부인」을 발표했고, 국내 최초페미니즘 소설 「경희」를 발표한 문학가인 동시에,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이자 한국 여성 화가로서는 최초로 개인유화 전을 연 화가였으며 3·1 운동에

가담해 감옥살이를 하는 등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여성이다.  
나혜석의 진보적인 주장은 불륜 스캔들에 가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나혜석이 가는 강연장마다 휴지와 돌이 날아왔고 온갖 사회적 불이익이 발생했지만 나혜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약혼과 결혼, 이혼에 이르는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에 대해 솔직히 써 내려간 이 고백서에서 나혜석은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강하게 비판했다. -52페이지

 

나혜석은 소품 전 실패와 경제적 궁핍, 아들의 사망에 방황하던 끝에 수덕여관에 도착했다.

비구니가 되기 위해수덕사를 찾았지만 김일엽의 만류와 만공스님의 거절에 결국 스님은 되지 못한다.

대신 만공스님의 배려로 그녀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그녀를 찾아온 학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수덕여관에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이때 찾아온 학생 중에는 이응노도 있었는데 훗날 이응노가

파리로 훌쩍 떠난 데에는 나혜석의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비록 갖가지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회의 냉대 속에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해야 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로 일평생 사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에 남성과 동등한 위치로 여성을 끌어올리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여성을 바라보라고 주장했던 그녀의 시도는 여권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요즘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두 번째 손님, 김일엽 
신여성에서 시대의 선객이 되다 


본명은 원주元周, 아호 일엽一葉, 불명 하엽荷葉, 도호 백련도엽白蓮道葉.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김일엽은 이름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지식인이다.

여성 문학의 선구적 작가인 동시에 최초의 여성잡지 주간이었던 그녀는 1920년대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기자, 소설가,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가 1933년 파란만장한 삶을 정리하고 수덕사로

출가한다.
김일엽은 개인주의가 퍼질수록 타인의 권리도 존중받게 될 것이라 주장했는데, 어느 강연에서는 "자기의 생명

가운데남의 생명을 발견하며, 남의 인격 가운데 나의 인격의 존엄성을 보게 되는 거인적인 개인주의의

시대가 올 것을 믿는다."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유교의 수직적이고 위계질서가 뚜렷한 인간관계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사회나 조직보다는 개인의 권리가

소중하며 어떤 것도 개인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성리학자는 물론 남성 지식인,

조선총독부나 친일파, 독립운동가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반감을 샀다. -82페이지
늘 자기 삶의 주체를 꿈꾸며 출가 전에는 여성해방과 자유연애의 상징으로써 봉건적 인습에 갇힌 조선 여성을

구하고자 했고, 출가 후에는 한국 비구니의 정신적 지주가 된 그녀는 시대의 선객이었다.

30여 년의 은둔 세월 후 발표한 종교적 산문들은 스님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갖는 인간적인 욕망과 고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아름다운 문체로 전하여 당대 유명 인사들이

그녀를 찾아 수덕사로 몰려올 만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달마대사가 낙엽 하나를 타고 중국으로 건넜다는 고사처럼 한 자루의 펜으로 여성과 민족을 일깨웠던

김일엽의 가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인정받을 것이다. 

 

세 번째 손님, 이응노 


세계를 사로잡은 한국의 추상 이응노가 수덕여관을 찾은 이유는 서양화가의 대모, 나혜석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때의 인연으로 그는 나혜석이 떠난 후에도

낡은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수리하고 현판도 직접 달았다.

 현재 남아 있는 수덕여관의 현판이 바로 이응노의 작품이다.

그는 수덕여관을 인수한 이유를 밝힌 글에서 전쟁에서 일본이 이길 경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농사지으며 평생 그림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수덕여관은 그에게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도망칠 피난처이자 오로지 미술만 생각할 수 있는 화실이었다.  
이응노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보수적 화풍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대신 사생 중심의 창의적인

교육을 시도했다.

1945년 이화여대 미대, 1946년 서울대 미대, 1949년에 홍익대 미대가 차례로 설립되었으나 당시미대 교육의

체계가 완전히 잡힌 것은 아니어서, 많은 미대생과 아마추어 작가,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았던 사람도

고암화숙을 찾았다. 고암화숙을 다녔던 제자로는 배정례, 금동원, 원석연, 이기우 등이 있다.

-126페이지

이응노의 일대기는 그림을 향한 지독한 열정과 불굴의 의지로 기록되어 있다.

수덕사 인근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9살 산골 소년이 유럽을 뒤흔든 화가가 되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익숙한 그의 이름은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실험으로 한국 회화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완성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예술가, 전통성과현대성을 함께 갖춘 현대 한국화단의 증인이자

거목으로 기억된다. 동양의 전통 위에 서양의 새로운 방식을 접목한 그의 독창적인 창작세계는

현대에도 통용되는 세련된 방식으로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기개와 사회의식 그리고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열린 사고는 모든 예술가의 귀감이 될 것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수덕사 선미술관 

이응노화백의 군상 

여러 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밖에서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 휘리릭 돌아보고 나왔다

여기저기 이응로화백의 그림도 보인다

미술관을 나와 걷는 길에는 아직도 가을이 그대로 남아 여행자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 준다

James Last - Ave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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