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용봉산을 오를까 오서산을 오를까 하다가 산에 못 오르는
사람들이 있어 방향을 돌려 수덕사를 돌아보기로 하고 이곳 수덕사에 왔다(11/29)
덕숭산(德崇山)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높이는 495m의 고즈넉한 산이다.
천년고찰 수덕사가 있어서 수덕산(修德山)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험하지 않고 높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계곡과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많아 예로부터
호서(湖西)의 금강산으로 부른다.
11월 29일 여기 수덕사는 조금 낙엽이 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단풍이 남아 있어
기을임을 실감케 한
총림에 대해서 묻는데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찾아보니 선원 강원 율원을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 한다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2016년 현재 총 8개의 총림이 있다.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동화사·쌍계사·범어사 등이 그들인데, 이들 8대 총림은 「총림법」에
의하여 별도 운영되고 있다. 총림법에는 “총림이란 선원, 승가대학(승가대학원), 율원, 염불원을 갖추고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이라고 규정한 내용이 있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 ~ 597) 때 고승 지명스님이 처음 세운 것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고려 공민왕 때 나옹스님이 중수하고, 조선 고종(高宗) 2년에 만공스님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강문
부처를 경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신 곳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왕들이 악귀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사천왕을 모신 곳이.
칠 층 석탑
범종각
법고각
대웅전을 바라보이는 왼쪽에는 범종각이 오른쪽에는 법고각이 있다
예전에 보니 오후 5시가 되면 스님들이 북을 치며 독경을 하고 있었다
대웅전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修德寺 大雄殿)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영천 거조사 영산전'과 더불어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소중한 목조건물이다.
이 중 '지대원년(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이라는 묵서가 발견된 ‘수덕사 대웅전’은 창건 연도가
정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건축물이다. 약 700.약700
목조여래 삼존불
대웅전 안에는 보물 제1381호로 지정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과
복장유물(腹藏遺物)이 있다. 조선시대인 1639년 인조임금 17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앉아 있는 대좌형 수미단(須彌壇)은 대웅전이 창건된 1308년으로 추정되어
그 가치가 높다.
황하정루
황하정루는 스님들의 하안거의식이나 불교의식 교육을 하는 곳이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다례와 의례가 있고, 전통 산중의 염불의식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사찰은 예전에도 몇 번 돌아본 곳이라서 대충 돌아보고 정 헤사와 만공탑을 보기 위해 산으로 오른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불규칙한 돌계단이라서 신경이 많이 쓰인다
4 면불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네 개의 면에 불상을 조각한 석불이 나온다.
1983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 유일의 사면석불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사면에 약사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미륵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소림초당
이곳에서 스님 한분이 나와 위 정사로 오른다
거대한 암벽 옆으로 길이가 나있고 소림초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소림초당은 유명한 만공스님이
1871(고종 8년)년에 태어나 생전에 수행하던 암자로 1925년 바위 위에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출입금지라는 기왓장이 세워져 이 씨.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부처의 자비와 수행의 참뜻을 깨우치는 길이다.
지금은 등산객들이 산을 오르기 위해서 걷지만, 만공스님의 독립운동과 불교문화 계승을
위한 뜻이 서려있는 길이다.
수덕사의 초대 주지스님인 벽초 경선스님은 수덕사에서 덕숭산 정상 아래에 있는 정혜사까지
손수 1080개의 돌계단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경선스님에게 1080개의 돌계단은 산을 오르는 길이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한
마음의 수행길이라 했다
향운각과 관음보살 입상
만공의 관음보살입상
만공이 세운 암자 향운각 인근에는 수덕사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거대한 석불이 있다.
1924년 만공 스님이 조성했다는 관음보살입상이다.
자연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높이가 25척에 달한다.
만공이 세웠다는 향운각
음각되어 있는 글자를 눈이 좋지 않아 알아볼 수가 없다
만 공 선사가 꿈에서 석가세존을 만난 뒤 조성했다는 미륵불 입상.
본래 직벽으로 이었던 바위를 깎아내고 앞에 석단을 덧대었다.
만공 월면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 씨였다.
본관은 여산으로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이다.
따라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렀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올랐다가 어느 날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그 길로 내려와
공주군 동학사에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만공(滿空, 1871년 4월 26일(음력 3월 7일) ~ 1946년 10월 20일)은 조선과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로, 석가모니 이래 제76대 조사이다. 속세의 성은 송 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른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간화선(看話禪)의 수행과 보급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경허(75대) - 만공(76대) - [혜암](77대) - [묘봉](78대)으로 법맥이 이어졌다.
춘성은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위키백과에서
만 공 탐에 사각으로 남아 있는 세계일화(世界一花)
1945년 8월,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의 작은 암자(庵子)에 머물던 만공(滿空)은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다음 날인 16日에야 들었다.
신자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암자에서 내려오면서 길가에 핀 무궁화(無窮花) 꽃, 몇 송이를 땄다.
내려와서는 무궁화 꽃에 먹을 찍어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네 글자를 쓰고 낙관(落款) 대신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썼다
정혜사로 연결되는 자연동굴
동굴로 가지 않고 위쪽에서 담은 정혜사의 모습
덕숭산정혜사
본사인 수덕사와 함께 599년(법왕 1) 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이후 많은 고승대덕들이
수도한 곳이나,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930년 만 공 선사(滿空禪師)가 중수한 이후 사세(寺勢)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가 이 절 선원(禪院)의 조실이 된 이래 문하에 100여 명의 승니(僧尼)가 따랐고, 현대의 불교계를 움직인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을 비롯하여 수도본전(修道本殿)인 능인선원(能仁禪院)·산신각·불유각(佛乳閣)·
주지실·요사 등이 있으며, 그중에도 정혜사의 현판이 걸려 있는 선원은 고색과 무게를 갖춘 당우이다.
또한, 깨끗한 정원의 구석에는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작은 2기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 쌍탑(雙塔) 또는
남매탑(男妹塔)이라고 하나 유래 및 연대 등은 알 수 없다.
정혜사 남매탑
수도정진으로 출입을 금한다고 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남매탑 사진은 캡처했음
피라칸사스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등을 거느린 수덕사는 규모면에서 다른 총림들에 비해 작은 편이다.
그러나 수덕사가 총림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만공滿空선사의 원력願力이 큰 구실을 했다.
한암, 경허, 수월 등 스님과 함께 일세를 풍미했던 만공은 고종 2년(1865) 중창불사를 일으킨 뒤부터
불도들의 수련장으로 제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만공 다음으로 법맥을 이어받은 이는 벽초碧超스님이다.
벽초스님은 1912년 13세 때 수덕사로 출가해 만공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다.
이후 금강산 마하연을 몇 차례 다녀왔을 뿐 산문 안에서 대중지도와 제반 불사에만 정진하다가 1986년
5월 6일 입적했다. 법랍 74세, 세수 8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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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내리면/백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