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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고엽제 전우회 전적지 참배

고엽제 전우회 중구지회 전적지 참배에 참석을 했다 

전우들의 가족과 미망인들 45명이 동참을 했다(5/12) 

첫 번째 방문지가 영천 호국원이다 

참배

참배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기 위하여 현충탑 또는 묘비 앞에서 추모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로 국권이 침탈되고 6·25 전쟁 등으로 나라가 어려웠을 때 더 큰 희생정신을 보여 주신 분들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현충탑 참배는 안장되신 모든 분들에게 참배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며,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받들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호국의지를 고취시키고 평화의 소중 함을 되 세기는 계기로 삼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개인묘역별 참배는 안장자께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노력하신 나라사랑의 마음을 본받을 뿐 만 아니라 고인과의

생전 추억을 떠 올리며 추모 하는 자리입니다.

묘역별 안장현황

묘역별 안장현황구분합계국가유공자6·25참전유공자월남참전유공자제대군인봉안묘충령당(제1관)충령당(제2관)합계

19,864 4,104 13,130 2,330 300
6,921 667 5,234 900 120
26,500 4,530 17,787 3,743 440
53,285 9,301 36,151 6,973 860

영천호국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을 모시고 국민의 애국정신 함양을 위한 호국의 성지로 활용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호국로에 설립한 국가보훈처 소속의 국립묘지.

국립영천호국원의 부지면적은 약 36만 9,000㎡로, 묘역은 크게 국가유공자묘역과 6·25 참전군인묘역,

6·25 참전경찰묘역, 월남참전군인묘역, 충령당 제1·2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외에 현충관·현충탑·현충문·

홍살문·영천대첩비·전투장비전시관·호국지(護國池)·식당 및 매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에 의거해 전몰군경·전상군경·순직군경·공상군경·무공수훈자,

6·25 참전군인 등은 물론 6·25 참전군인과 학도병유격대원·소방/철도공무원·종군기자·기타 참전자, 이외에도

월남참전군인과 종군기자, 6·25 참전경찰과 10년 이상 장기 근무한 장기복무제대군인 등이 안장 대상으로,

각종 전투와 작전에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면 안장을 신청할 수 있다.

영천대첩비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관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바다 위에 건립한 호국전시관이다.

기념관은 장사상륙작전 당시 실제로 투입된 문산호를 복원해 만들었다. 기념관은 5층으로 이뤄졌다.

1층에서는 장사상륙작전의 배경과 출동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층은 상륙작전의 전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조형물 등으로 꾸며졌다.

3층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휴게 공간, 4층은 학도병의 교복 등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체험공간이다.

5층은 문산호의 갑판으로 장사해수욕장 등 주변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갯메꽃 

중부지방 이남의 바닷가 모래땅에 흔하게 자라는 덩굴성 여러해살이풀로 전 세계 온대 및 아열대지역에

폭넓게 분포한다. 땅속줄기는 굵고, 옆으로 길게 뻗는다. 줄기는 땅 위를 기거나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가며,

길이 30-80cm다. 잎은 어긋나며, 신장형, 끝이 오목하거나 둥글고, 가장자리에 물결 모양 톱니가 있다.

두껍고 윤기가 난다. 꽃은 5-6월에 잎겨드랑이에서 난 꽃자루에 한 개씩 피며, 분홍색이다.

화관은 희미하게 5각이 지는 깔때기 모양이다. 수술은 5개, 암술은 한 개다.

열매는 삭과이며, 둥글다. 씨는 검은색이다.

갯완두 

콩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 바다 근처 모래땅에 서식한다. 크기는 30~60cm 정도이다.

잎은 어긋나게 자라며 잎자루를 따라 작은 잎들이 난다.

꽃은 여름에 자줏빛이 도는 푸른색으로 피고, 진 뒤에는 털이 난 꼬투리가 달린다.

원산지는 한국이며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다.

장사해수욕장

장사해수욕장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에 위치한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900m 길이의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루며, 깨끗한 바닷물과 완만한 경사는 가족 여행객에게

최적의 장소다.

특히, 해변 뒤편에 펼쳐진 소나무 숲은 자연 그늘을 제공하여 더위를 피해 시원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1층전시실현황 

대부분 학도병으로 이루어진 상륙작전이었다 

장사상륙작전

6.25 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이었던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실시에 맞추어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한 기만작전의 일환으로,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일대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전개된 상륙작전.

학도의용군으로 구성된 육본 독립 제1 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 대위) 추정 772명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작전이다. 9월 15일 새벽 05시경 북한군의 공격으로 부대 수송을 맡은 LST 문산함이 좌초하고 다수의

탄약을 유실하는 등 작전 개시 초반부터 난관에 빠졌으나, 악전고투 끝에 09시경 전 대대가 상륙하여

북한군 제2군단의 주 보급로인 7번 국도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9월 19일 구조작전이 진행되어 철수할 때까지 전사 139명, 포로 39명의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4일 넘게 방어를 지속하여 낙동강 전선 동부의 북한군 전력 약화에 공을 세웠다.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된 부대는 육군본부 계엄민사부 동원과장 이명흠 대위가 편성한 독립 제1유격대대였다.

이명흠은 육사 5기 출신의 정훈장교로, 개전 이후에는 각종 선무공작을 수행하면서 북한군의 유격전(게릴라전)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군에는 항일투쟁, 중일전쟁국공내전을 통해 유격전 경험이 풍부한 인력이 많아

유격전을 수시로 구사하였다.

 

정규군의 전면공격 이전에 유격대를 투입해 염탐과 후방을 교란하는 통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여러 차례 큰 곤경을

겪었다. 이를이선근 대령, 작전교육국장 강문봉 대령에게

유격대 편성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육군 수뇌부가 유격대 편성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풍전등화의 상황이 되자, 공세를 꺾고 반격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유격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되어, 이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 청년들은 유격전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윗분의 뜻이 분명해지자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도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육군은 이에 따라 육군본부 직할로 다양한 유격대를 편성하고 낙오병, 예비병력 등을 긁어모아 잡다한 단기

소규모 작전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강문봉도 이에 맞춰 8월 중순에 이명흠이 희망하던 유격대 편성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병력자원을 조달할 지역이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로 한정되어 있고, 이조차도

마구잡이로 징병해 허겁지겁 훈련시켜 최전선 사단들로 보내기 급급했다.

 

이런 마당에 영세한 유격대대 입장에선 별도의 경로로 모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명흠은 안강-기계 전투 도중 8사단 배속이 끝나자마자 대한애국단 단원 수 명을 거느리고

대구역 광장 등 대구 시내를 돌며 모병운동을 했다.

당시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고, 학교 역시 모두 휴교하여 청년 및 학생들이 다수 배회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어서 예상보다 많은 청년들이 자원을 했다.

 

그래서 이명흠은 특히 사상이 건전하고 키 크고 담력 있어 보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병력을 선별했다고 한다.

 이들은 8월 24일에 대구역에서 화물열차로 밀양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이들은 독립군 출신인 최윤동전 의원이 독자적으로 모병한 청년들과 합류한다.

 

이렇게 모인 총 760명의 병력으로 1950년 8월 27일에 밀양에서 제1 독립 유격대대, 이른바 '명(明) 부대'가가 3개

중대 편제로 편성되었다. 여기서 확인된 학도병의 수는 677명이며, 나머지는 기간이 되는 정규 장교 및 부사관이다.

그러나 당시 급박한 전황 속에서 보급 순위에서 밀리는 유격대대는 개인화기조차 전혀 지급받지 못한 채,

구보 등 체력단련과 정신교육 중심으로밖에 훈련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며칠 뒤인 8월 31일 이 부대는 강문봉 대령 지시로 부산의 육군본부로 이동하게 된다.

이들은 부산 문현동에 위치해 있던 육군본부에서 숙식하며 조금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여기서 부대원들은 아직 정식 군번은 받지 못하지만, 일단 임시로 강문봉 명의의 '육본직할 유격대원'이라는

대원증을 발급받는다.

그리고 유격전에 필요한 간단한 소화기 사용법 및 교량, 토치카 등의 파괴 방법 등을 교육받았다.

후방에서 적으로 위장할 때를 대비해 북한 출신 대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북한군 군가도 학습하였다.

 

이때 훈련에 이용된 화기들도 대부분 모신나강 소총과 PPSh-41 기관단총, PM M1910 등 노획된 북한군

무기들이었다. 물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작전발령과 출동준비

1950년 8월 말, 인천 상륙작전의 결행이 결정되자 유엔군 및 한국군은 여러 기만작전을 동시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서해안에서 군산 기습작전이 준비된 것과 마찬가지의 작전을 동해안에서도 결행하려고

했다. 군산 기습작전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인천 상륙작전 2일 전인 9월 13일에 웨어(James H. Wear)

소령이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직할 침투중대(Raider Company)와 영국 해군의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혼성 특수부대가 영국 해군의 방공호위함 HMS 화이트샌드베이(Whitesand Bay)의 지원을 받아 군산 인근

해안에 공격을 감행한 소규모 양동작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미군은 해안 방어부대의 반격을 받아 3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곧장 퇴각하였다. 이와 같이 잘 훈련된 소규모 특수부대가 동해안 요충지에 치고

빠지기 식의 작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미군은 제8군 직속으로 새로 창설된 레인저 중대(Ranger Company)를 투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검 결과 이 부대는 아직 훈련이 완료되지 않아 실전 투입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는다.

대신 유엔군 총사령부에서는 한국군 육군본부를 통해 영덕-포항 등 동해안 전선을 담당한 제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상륙작전을 벌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9월 초에 포항 일대의 전선이 북한군

제2군단을 상대로 절체절명이었다는 점이다.

 

일단 영천·신녕 방면에선 북한군 제766부대와 제8사단, 제12사단, 제15사단 병력들이 연이어 전선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고, 동해안 쪽의 북한군 제5사단은 한국군 제3사단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계속 압박을 가해

경주와 영일비행장으로의 돌파구를 뚫기 일보 직전에 있었다.

그러니 국군 3사단으로서는 1개 대대 차출도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안은 한국 육군 입장에서도 매우 매력적이어서 그냥 포기하기는 아까웠다.

이때 육군에서 주목한 것이 제1 유격대대였다.

일설에는 제3사단에서 예하 병력을 빼내기 곤란하자 대신 유격대대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도 한다.

 편성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제1 유격대대를 부산의 육군본부로 불러들인 것도 이런 양동작전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강문봉은 이러한 작전 내용을 철저히 숨기고 있다가 9월 10일 무렵에야 이명흠을 호출하였다.

 

강문봉은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적 후방인 장사 해안에 상륙하는 지시를

내린다. 이명흠은 이제 막 2주 남짓밖에 훈련을 받지 않은 이 부대가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건 무모한 짓이라고

항변하였다. 하지만 강문봉은 전선에서 빼낼 정규부대는 전혀 없으며, 포항 지구 전선을 압박하고 있는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력을 꺾기 위해서는 후방 보급 차단이 불가피하다고 무조건 실행을 명령하였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준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이명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륙작전이었지만,

육군본부가 다음의 작전명령 제174호로 출동을 정식 명령했으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철수 과정에서의 피해는 상륙 때보다는 적었다.

그럼에도 미 해군장교 1명이 부상을 당하고 유격대원들 가운데도 전사 9명, 부상 12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북한군은 화력이 크게 열세였지만 그래도 박격포탄이 조치원호를 정확히 가격하여 승선한 유격대원

가운데서도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 철수 완료 목표시간은 12시까지였으나, 이때까지도 승선이 완료되지 않아 약 60명이 해안에 남아 있었다.

겁을 먹어 빨리 빠져나가려는 조치원호 선장의 독촉 과한 명이라도 더 철수시키려는 이명흠 대위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30여 명이 더 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3시가 넘어서자 썰물로 접어들며 더 지체하다가는 배가 빠져나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철수를 진두지휘하던 스페어 소령도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결국 일부 병력을 뒤에 남긴 채 퇴각을 명령한다.

이에 13시 33분경 조치원호는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며 최후까지 해안에서 적을 저지하던 29 연대 5대대

(제1 유격대대 2중대 5소대) 39명을 뒤에 남기고 해안을 빠져나온다. 이들은 모두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철수에 성공한 병력들은 약 64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조치원호를 타고 이튿날인 9월 20일 새벽에

부산항에 입항했다.

조치원호 입항 이후 이명흠 대위는 작전결과 보고를 위해 당일 육군본부로 출두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의하면 강문봉 등 관계된 장교들을 만나자, 이들은 모두 이명흠이 왜 살아 돌아왔는지

크게 놀라고 당혹해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문산호를 그대로 버리고 온 죄를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 총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및 미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구출에 나섰던 데 비하면 너무나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한국 육군 쪽에서는 제1 유격대대를 여차하면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고, 아예 적

후방에서 최후까지 옥쇄해서 북한군을 더 괴롭히는 걸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말 화가 나요

 

 작전 참가 인원수(위 명단은 장사상륙작전 참전용사)

             잊혀진 영웅들 등과 언론 기사에서 772명은 순수 학도병 인원수이고 지휘관인 국군 장교 및

             기간병까지 합치면 독립 제1유격부대 인원수가 800명대로 알려졌지만 독립 제1유격부대의

                        총인원수가 772명으로학도병 인원수는 700명대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사 상륙작전 희생자 위령비

장사해수욕장의 방풍림 소나무  

청춘의 불꽃 아! 장사학도병

Pavel Ruzhitsky - 내 영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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