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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세종대왕릉(영릉)

화담 숲을 돌아보고 이곳 세종대왕의 영릉으로 왔는데 마감시간이 오후 5시다 

도착이 5시 4분 전광판에는 입장마감이라고 표시가 됐는데 어찌할까

관리자가 마침 앞에 나와 있어 문의를 하니 단체로 왔으니 잠깐 영릉까지만

다녀오라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 역사관도 들어가지 못했다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사적 제195호인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대왕의

영릉(寧陵)이 있는 경기도 여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3개의 상설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영상실,

카페, 수장고 등을 갖추고 있다. 세종대왕과 효종대왕 그리고 조선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세종대왕께서 후손에게 남긴 훌륭한 업적들과 그 업적의 바탕이 된 애민정신을 느껴볼 수 있도록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꾸며져 있다

여주영릉(驪州英陵)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심 씨의 합장릉이다.

1446년 헌릉의 서쪽에 돌방과 병풍석을 갖추어 건립되었으며, 『국조오례의』 「흉례」의 치장조에 따라

조선 석실 제도의 모범이 되었으나, 1469에 여주로 천릉하면서 광릉의 제도에 따라 삼물회

(황토, 고운모래, 석회)로 회격현궁을 만들고 난간석만을 둘렀다. 왕이 살아 있을 때, 왕후의 국장을

위하여 산릉을 조성하면서 추후에 안치될 왕의 수실을 미리 만들었던 유일한 사례이다.

관리사무실에서 영릉으로 가는 길 

세종대왕상  

훈민정음 

세종대왕 능역 정화비 

세종대왕 시절에 발명한 발명품들 

측우기. 혼전의. 자격루. 양부일구. 간의. 등을 전시해놓았다

정자각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 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

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있고,

향어로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이전의 정자각 형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건립경위

1446년 3월에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승하하자,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산릉을 동분이실(同墳異室)로 만들겠다고 결정한다.

동분이실이란, 하나의 봉분 아래에 2개의 실(室)을 구성한 합장릉을 말한다.

터는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묻힌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으로 정하였다.

가운데 사잇돌을 세워 두 돌방의 칸막이 벽으로 하고, 북쪽에 북우석(北隅石)을 세우고 동쪽과 서쪽에

벽체를 세워 덮개돌을 덮어서 2개의 돌방을 만들었다. 서실(西室)은 세종의 수실(壽室)이며, 동실(東室)은

왕후의 돌방이다. 돌방의 남쪽에는 남문의 문짝인 두 짝의 문비석(門扉石)으로 입구를 막았다.

돌방의 외벽에는 석회와 모래 · 황토를 섞어서 4자 두께로 쌓아 회격을 만들어서 밀실 하게 하고, 그 바깥에

5치 두께로 숯을 쌓아 올렸다.


7월 19일에 소헌왕후의 국장이 이루어지자 동쪽 돌방이 밀폐되었다.

1450년 2월 17일에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의 집에서 승하하자 예비해 둔 수실에

안장되면서 별도의 산릉 공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6월 12일에 세종의 재궁이 서쪽 돌방에

안치되었다.

변천

1467년(세조 13) 4월 5일에 영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천릉할 것을 논의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468년에 영릉 옮길 곳을 모색하여 1469년에 여흥[지금의 경기도 여주]으로 옮겼다.

새 능을 조성할 때 세조의 광릉을 전례로 삼아 현궁(玄宮)을 회다짐으로 조성하고, 병풍석(屛風石)을 설치하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세웠다. 초장지(初葬地)에 남겨진 돌거리는 옮기기 어려웠기 때문에 땅에 묻고,

정자각(丁字閣) 등의 건물도 옮겨 짓지 않고 새로 조성하였다. 1469년 3월 6일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재궁이

여흥으로 옮겨졌다.

천릉하여 여흥에 건립된 영릉은 회다짐으로 만든 합장릉으로 봉분이 하나로 합쳐지고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둘렀다. 난간석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을 각 네 마리씩 번갈아가며 배치하였다.

능은 계체석(階砌石)을 3단으로 배열하였는데, 상단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두 개가 놓이고 양쪽으로

망주석(望柱石)이 한 쌍 세워졌으며,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쪽에 문석인(文石人)과

석마(石馬)가 마주 보게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가 마주하여 배치되었다.

 

능 아래로 36보 지점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서북쪽에 망료위(望燎位)가 있으며, 동쪽으로 17보 지점에

표석이 세워졌다. 소실되었던 수라간(水剌間)과 수복방(守僕房)은 1970년대에 복원하였으며, 천릉하면서

땅속에 묻었던 신도비(神道碑)는 1974년 3월에 발굴하여 세종대왕기념관 야외에서 전시하고 있다.

붉은 병꽃 

가막살나무 

산딸나무 

돌나물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주말 잠시 자리 비웁니다 다녀와서 뵐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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