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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첨성대와 석빙고 교촌마을

나는 여행복도 없나 보다 
어디를 가면 왜 그렇게 날씨는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지 이날도 구름이 끼었다가
조금 맑았다가 비만 내리지 않을 뿐 사진 담기에는 별로인 날씨다

첨성대 주변에 주차를 하고 첨성대와 계림 반월성을 돌아보고 교촌마을로 향한다

계림 주변의 릉과 느티나무와 소나무 숲 그리고 옛 대형건물터 

대형건물터 앞에는 계림의 숲이 멋진 모습으로 김알지의 전설이 는 곳이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신비한 탄생에 관한 설화. 닭 우는 소리가 들려서 가 본 곳에 황금 궤짝이 있었고,
그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문헌에 따라 닭 우는 소리가 아니라 큰 빛을 따라가 보아 황금 궤짝을 발견한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일연 현창 향가비 (一然顯彰鄕歌碑) 내용요약
신라 선덕여왕 때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大矩) 화상이 엮었으나 가집 3 대목(三代目 888 AD)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고려 후기 일연(一然 1206~1289 AD)이 그의 삼국유사에 그 일부를 기록해 놓으므로
신라의 아름다운 詩 정신을 접할 수 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경덕왕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의 작품으로 경덕왕의 청으로 안민가(安民歌)를
지을 때 왕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향가이다.
이 노래는 냇가에서 기파랑을 위하여 제를 올리면서 읊은 향찬으로 기파랑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다.

찬기파랑가
흐느끼며 바라보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 쫓아간 아래
여기 시퍼런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 냇가 자갈밭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강을 쫓고자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 못 올 고깔이여

월성
경주 월성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신라의 왕성이다.
월성은 동서의 길이가 890m, 남북의 길이가 260m인 긴 반달 모양의 테뫼식 토성으로 둘레는 2,340m이다.
월성은 201년(파사 이사금 22)부터 사료에 등장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하여 교호 성토된 토성은 5세기
초반에 완공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월성은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재사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월성은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해자
해자(垓子, moat)는 적의 접근, 진격을 막기 위하여 의 둘레 같은 곳에 땅을 파놓고 을 채워 놓은
시설이다. 굴강(掘江), 외호(外濠), 성호(城濠)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인위적으로 땅을 파고 물을 채워넣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아예 건축 단계에서부터 원래부터
자연적으로 흐르고 있는 강이나 하천을 끼고 성을 지어서 이것들이 천연 해자의 기능을 하도록 만든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진주성. 진주 남강이 해자의 역할을 하는 구조로 건축되었다. 
경주 월성의 경우 성 남쪽은 남천 강물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성 동, 서, 북쪽에만 인공 해자를
지어서 공사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다.

월성에서 바라본 첨성대 부근 

성위에는 잘 가꾸어진 소나무 군락이 있다 

월성에서 바라본 월성해자와 계림

석빙고 

신라시대에 만드러진 석빙고가 아니고 이조시대에 만들어졌다 해서 대실망을 했다

지금도 경주 곳곳에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월성에서 내려와 교촌마을 전시관에 들렸다 

하늘에서 본 교촌마을 전경 

최부자 댁과 경주향교 월정교에 대한 설명문

12대 300년동안 부와 명예를 이어온 최부자댁의 내력 

최부자댁 가계도 

최부자댁 가훈 

대구대학과 청구대를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구대학만 나온다 
내가 잘 못알았을 수도 있겠지 

최준선생은 교육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셨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 백산상회(무역주식회사)

백산의 관계자들이 최부자댁에 보내온 신년 축하 엽서 

최준선생과 백산안희재 선생과의 관계 

12대 최준선생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삼 형제가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다  

한말의 역사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 
https://kts4500.tistory.com/7396618

 

신돌석 장군 유적지와 괴시리 마을

용수 족쇠와 수갑 의병들의 무기 화승총과 칼 일본군의 무기 일본군도와 총 신돌석 장군의 유적지와 사당을 돌아보고 괴시마을로 이동 목은 이색이 태어난곳 영감댁이 위치한 괴시리는 400여 년

kts4500.tistory.com

이곳을 클릭하면 신돌석장군의 활약상을 볼 수 있습니다

최부자집 1대 최진립의 활약상  

2대 최동량의 활약상  

3대 최국선의 활약상 

교촌마을 전시관을 나와 교촌마을 최부자집으로 가면서 먼발치로 월정교의 외관만 담아본다 

그 당시에도 이렇게 화려하고 정교한 다리가 있었을까 의문도 생긴다 

최부자집 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의 용암고택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중요민속자료 제27호)’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
 
월성을 옆에 끼고 흐르는 남천 뒤 편, 양지바른 곳으로, 오른쪽 옆에는 경주향교를 두고,
뒤편으로는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어린 계림鷄林이
병풍처럼 바람을 막아 주고 있는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집터는 원래 신라의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터의 자리로 알려져 있어, 궁궐에서나 사용함직한 거대한
석조유물들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집을 지을 당시, 인근 경주향교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유림들의 반발로 집터를 깍아 내리고, 처마높이를 낮추어서 권위적이지 않고 지금과 같은 수수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대지 2천 평에, 1만여 평에 이르는 후원,
이 집에 살던 노비 숫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을 만큼 규모가 큰 집으로서,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 양반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뜰에 보이는 자주달개비 

흔히 '경주 최 부잣집'이라고 불리는 경주 최부자댁은 1700년경에 건립된 경주 최 씨의 종가로,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원래는 99칸이었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최 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었는데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사랑채 

최부자댁 6훈 

최부자댁 6연 

만석꾼의 집안답게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 오른편 마당에, 800석을 쌓아올릴 수 있는 곳간이 다.
옛날에는 곳간이 7채까지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빈 마당의 크기로나마 그 영화를 대신 말해 주고 있다.

안채 

경주지방의 전통 가양주. 경주시 교동의 일명 '경주 최부자네' 집안에서만 이어져 내려온 법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86-3호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경주의 만석꾼 최씨네 집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에게만 전수시켜 온 독특한 술로 연한 갈색의 감미로운
맛과 향기, 마시고 난 뒤의 깨끗한 뒤끝으로 정평이 나 있다.
궁중술이라고도 부르며 최씨네 선대가 궁중 내 간장·된장 등 염장을 감독하는 사옹원의 관리로 있으면서
임금이 마시는 곡주의 제조법을 집안에 전승시켜 시작되었다.

재료로는 찹쌀, 밀누룩, 집뜰의 우물물이 쓰이며, 최씨네 집안의 뛰어난 물맛이 술의 질을 좌우했다.
제조 방법은 먼저 술쌀의 1/10에 해당되는 찹쌀죽을 쑤어서 누룩과 배합, 5~10일 발효시킨 후 모주를
만들고, 여기에다가 다시 쪄서 말린 찹쌀 고두밥을 배합시킨다. 그 뒤 숙성과정을 거쳐 100일 정도가
지나면 법주가 된다. 술의 발효와 숙성정도가 술의 질을 판가름하기 때문에 매우 섬세한 수공이 필요하다.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밀주조금지법에 따라 맥이 끊길 뻔했으나, 지금은 국세청의 허가를 받아 시판도 한다.
알코올 도수가 16도이며 지금도 가내사업으로 여전히 전수되고 있다

https://kts4500.tistory.com/7399034

이렇게 교동마을을 둘러보고 대릉원으로 향한다

 

Tonya Mitchell -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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