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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봉선사

서울의 청와대산책길과 일부를 돌아보고 인완산 자락길을 둘러보고 경복궁으로 해서

팔각정 드라이브 길상사탐방을  마치고 저녁에 이곳 국립 포천 운학산자연휴양림에서

1박 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소식이 있지만 바람도 없고 세찬비는 아니어서 계획대로 

봉선사와 강릉숲을 살펴보고 귀가를 할 것이다(10/22)

이동은 우리가 머물렀던 2층 꽃창포 8인실이었다

비가 내려 아침 산책은 생략하고 9시에 차에 탑승을 한다

휴양림이 서울 부근이라서 인지 숙소도 많고 자연환경도 좋은 편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바라본 주위 풍경 곱게 물들어가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

30분 정도 걸려서 이곳 봉선사 주차장에 도착을 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의 '봉선사'는 서기 969년 고려 광종 20년에 법인국사께서 창건하고 '운악사'라고 하였다.

그 후 1469년, 조선 예종 1년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이곳 지역에 모시고는 '광릉'이라 하였으며,

능침의 명복을 비는 자복사로 삼고 '봉선사'라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때 병화를 입는 비운을

겪었으며, 현재의 봉선사는 1960년 무렵부터 재건불사를 일으킨 가람의 모습이다.

3.1 운동 만세시위 내용

사찰에 오르는 길 곳곳이 여러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아~~ 감탄사가 나온다

광릉의 원찰은 광릉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인근 농안 마을에 있는 봉선사다.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가 창건했고 정희왕후의 명으로 중창되었다.

이름도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를 담아지었으므로 광릉과는 한 짝 같은 존재다.

한명회, 구치관 등이 책임을 맡아 건설한 사찰로 왕실 원찰 중에서 으뜸으로 대접받았다.

 

봉선사는 흥미 있는 용어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법석은 원래 불교 용어로

'법회석 중(法會席中)'이 줄어든 말이다. 이는 설법을 듣는 법회에 회중이 둘러앉아 불경을 읽는 법연을

일컫는 말로써, 매우 엄숙한 자리를 뜻했다. 그런데 봉선사는 신자가 많아 법당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법당 밖에서 법회를 여니 주위가 산만해져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봉선사에서 유래되었든 아니든 시끌벅적하게 떠든다고 할 때는

'야단법석(惹端法席)'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설명도 있다.

사찰주위가 공원처럼 넓고 호수들도 세 곳이나 되고 연방죽도 겸비해 아름다운 풍경이다

봉향당은 매점과 찻집이 있는 건물이다

봉선사는 세조의 원찰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비롯해 6·25 전쟁 등 여러 전란 때마다 화를

입어 현재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건물은 없다. 하지만 봉선사에 있는 대종(보물 제397호)은 아직도

현장에서 역사를 지켜보고 있다. 이는 예종 1년(1469)에 제작된 것으로 높이 238센티미터, 입 지름

168센티미터, 두께 23센티미터, 무게 1,500킬로그램에 달한다. 종 입구가 넓어진 형태나 몸통에 있는

가로 띠와 조각 수법 등은 조선 시대 나타난 새로운 양상으로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법당입구에는 험상궂게 생긴 금강역사가 버티고 있다

청풍루 아래 법당입구에는 험상궂게 생긴 금강역사가 버티고 있다

큰 법당(대웅전)

큰 법당 현판과 주련 글씨는 서예가 운봉(雲峯) 금인석(琴仁錫1921~1992) 글씨며

법당 건물은 철근콘크리트가 가미된 건물이지만 전각의 전통성 표현 가치가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522호로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태허(운암 김성숙) 스님, 운허스님이 머물렀고,

운허의 친척 형이 되는 이광수도 은거한 일이 있다. 이 때문에 이광수 기념비가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년(광종 20)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雲岳寺)라고 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때에 이전의 7종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할 때

이 절을 혁파하였다가,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 씨(尹氏)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라고 하였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남양주 봉선사 동종을 같은 해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1550년(명종 5)에 이 절은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 주지 낭혜(朗慧)가 중창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637년에

주지 계민(戒敏)이 중창하였으며, 1749년(영조 25)에는 재점(再霑)이 중수하였다.

석가모니불: 모든 중생들의 큰 스승이신 부처님

문수보살: 최고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님

보현보살: 최고의 진리수행을 상징하는 보살님

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주인이신 부처님

관세음보살: 중생들의 소구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보살님

대세지보살: 삼도의 고통을 여의고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시는 보살님

약사여래불: 중생의 일체 병고를 어둠으로부터 밝음으로 인도하시는 보살님

일광보살: 태양처럼 빛나는 지혜로 어둠으로부터 밝음으로 인도 하시는 보살님

월광보살: 달처럼 청정한 덕상으로 어둠의 길을 안내해 주시는 보살님

우측건물은 방적당

설법전

요사채와 기도처인 듯

봉선사는 윤판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봉선사 괘불은 1735년에 조성된 길이 7.85m, 폭 4.58m 크기로 서울 경기권에서 가장 오래된 괘불이다. 

대의왕전

사찰에서는 보통 약사전에 '약사불'을 모시는데, 봉선사에서는 정자 형태의 '대의왕전'에 약사불을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약사불은 병을 고쳐주는 부처란 의미로 '대의왕불'이라고도 부른다.

길상사에도 이러한 조각상이 있던데 관음상이라고 한다

족두리풀 (풍접초)

미륵전

미륵전에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저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봉선사 일주문을 통해 들어가면 3개의 조그만 연못에 연꽃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7월 중·하순이면

연꽃이 만발하고, 연꽃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수크령
불교와의 깊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부속 건물들은 살펴보지 못했고
사찰마다 거의 같은 형태여서 사진을 잘 담지 않습니다

물자님들께는 조금 죄송한 생각도 듭니다

 

10월의 어느 멋진날에 - 김동규&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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