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부모님 산소에 늦은 성묘를 하고 내장사 드라이브를 하고 순창 쌍치에 있는
처 고종사촌집에서 하룻밤 묵고 김장용 고춧가루와 잡다한 농작물을 얻어 싣고
보성으로 떠난다
쌍치에서 순창으로 넘어가는 밤재 여기는 아직 며칠 전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있다
재를 넘어 팔달면에 접어드니 이렇게 안개가 자욱해 운전에 제약을 받는다
강천사 입구를 지나 순창에 다다를 무렵까지 계속되는 안개길이다
팔달면 소재지 가기 전에 만나는 메타길인데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을 한다
메타스퀘이어가 아름다운 길인데 잎이 거의 지고 조금 남아 있다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초연정 가는 길 주차하고 만나는 꽃이 끈끈이대나물이다
늦봄부터 초여름에 피는 꽃인데 겨울이 닥친 지금 이렇게 꽃을 피우고 있다
초연정
순천 초연정 원림(順天 超然亭 園林)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삼청리에 있는, 초연정 정자와
정자 주변의 외원(外苑)이다. 2007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순천 초연정 원림』은 “초연정 정자와 정자 주변의 외원(外苑)을 함께 일컫는 것으로, “초연정”은
헌종 2년(1836) 청류 헌(聽流軒) 조진충(趙鎭忠, 1777~1837)이 초가로 지어 옥천 조 씨의 제각으로
이용하던 것을 그의 아들인 만회(晩悔) 조재호(趙在浩, 1808~1882)가 고종 원년인 1864년에
기와지붕으로 중건, 고종 25년(1888년) 송병선이 ‘초연정’이라 개칭한 정자이다.
왕대마을 모후산의 자연 계곡을 외원(外苑)으로 삼고 있는 초연정은 우리나라 정자가 대부분 풍경이
수려한 강변이나 구릉에 건축하여 확 트인 경관을 감상하는 게 목적인데 반해 마을 뒷산의 깊은
자연계곡을 이용하여 지어져 있어 매우 드문 예의 정자라 할 수 있다. 특히 초연정에서는 나무에 가려
계곡은 보이지 않으며 맑은 물소리만 들리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초연정 앞의 모후산 자연계곡은 유량은 많지 않으나 물이 맑고 인적이 드물어 주변의 아름다운 암반과
암벽, 암벽에 부착해 자라는 활엽수(개서어나무 등)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자연미를 보여주며 자연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초연정과 초연정 앞 외원은 산간 계곡을 이용하여 지어진 특이한 예의 별서로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경사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경관적 가치가
큰 명승지이다.
정자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단층 팔작지붕의 홑처마집이다.
우측 2칸은 방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두었고, 좌측 1칸은 마루이다.
깃대바위
초연정에는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고려 공민 앙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 일행이 이곳 모후산에 머물렀다 하여 처음 머문 마을을 유경(留京)이라
부르다가, 거기서 조끔 떨어진 곳으로 두 번째 피신하여 머문 곳이 왕대(王垈) 마을이다.
초연정의 바위에는 공민왕 피신당시 왕을 호위하던 5명의 장수가 깃대를 꽃은 흔적이 있다고
하여 깃대바위라고 부른다.
송병선의 시
정자 그윽하고 깊은 곳에 서있어 마땅히 은자가 살게 마련이네.
이끼엔 냇가 노닐던 사슴 흔적 있고 꽃 그림자는 못 속 물고기 놀리네
이틀 자며 산 빗소리 들었고 가슴 열고 시렁의 책 이야기하네
초연히 세속의 근심 사라지고 내 텅 빈 가슴이 시원하네
1898년에 순천 초연정 원림에서 옥천조 씨 문중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송병선을 모시고 소학과
사서삼경의 경전을 강론하고 동유 하였다. 당시 초연정에 모인 유생들은 순천을 중심으로 인근
여러 지역, 즉 보성, 능주, 곡성, 화순, 창평, 흥양, 남원, 장성 등의 지역에서 왔는데 그 수는
71명이었다. 매년 3월 말일, 4월 1일 순천 초연정에 여러 자손이 모여 강회를 열어 종족 간의
화목을 강구하였고, 9월 가을에는 제향 하면서 선조를 추모하였다
<敬次超然亭韻 / 昌寧 曺秉琪 > <경차초연정운 / 창녕 조병기)
亭在三淸洞川流百折東先.................
예전에 편액과 여러 현판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판상 하나만 덩그러니 걸려있다.
초연
重爲輕根(중위경근) 무거움은 가벼움을 근거로 하고
靜爲躁君(정위조군) 고요함은 소란스러움을 바탕으로 하지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그리하여 성인은 종일토록 행함에
不離輜重(불리치중/짐수레치) 어느 한쪽으로 치중하지 않아
雖有榮觀(수유영관) 비록 아름다운 경치를 볼지라도
燕處超然(연처초연) 안거 하며 초연하게 바라보네
초연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얽매이지 않고 태연하거나 느긋하다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초연이란 말이 나오며, "초연이란 인간 내면의 근본, 근저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외부의 세계와 공명을 일으키는 경지를 말한다. 초연이 되지 않고 몰연(沒然)이
되면 바탕과 괴리되어 미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무릇 성인은 언제나 초연에서 언행하고 사유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말엽 유불선에 모두 능했던 월창거사 김대현은 <술몽쇄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간혹 세간의 속된 일에서 벗어나 홀로 근심 없이 사는 이가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
사류에게는 물뢰(바깥세상)에 초연하여 높은 절개를 지닌 채,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근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높게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고 한다.
송병선(宋秉璿 /구슬선)
조병익(趙秉翼)
조진충별업(趙鎭忠別業)
현손 규선(玄孫 圭璿)
조금 떨어진 바위에 趙章浩(조장호)이 이름이 보인다.
아래에는 조장호라는 이름도 보인다
왕대수석이라는 글자도 보이고
맨 하단 바위에 왕대사적 (王垈事蹟)이 음각되어 있다.
洞何謂王垈古昔君王播越駐蹕于此洞以名之云 (동하 위왕대 고석군왕파월주필우차 동이명지운
/ 말머물 주, 길치울 필)
蓋垈在於母后山主麓下而垈之上有於旗石垈之 (개대재 어 모후산 주록하이 대지상유어 기석대지
/ 덮을 개,)
南有相洞垈之下有水淸橋橋之下有留京洞名與 (남유 상대지 하유 수청교 교지하유 유경동명여)
蹟可信而國乘邑史無傳可歎吾先祖副正攻麗 (적가신이국승읍사무전 가탄 오전조부정공려
/ 고을 려)
季南下之初立案此洞子孫世守洞之中麓西坐之 (계남하지초입안차동자손세수동지중록서좌지
原卽吾五代祖考妣同窆之地所重自別從君鎭忠 (원즉오 오대조고비동 폄지지 소중 자별 종군진충
/ 하관 할 폄)
以宗孫構數間屋每年春初省楸之行會宗黨作 (이종손 구수간옥매년춘초성추지행회종당작
/얽을 구, 개오동나무추,
花樹之樂以爲纘先志貽後謨之意凡我後人勉旃 (화수지락이 위 찬선지티후모지의 범야후인면전
/이을 찬, 꾀모, 기 전,
哉 (재)
崇禎紀元後四甲子三月
日淳昌後人 趙鎭龜記
檀紀四千二白八十八年乙未六月
日曾孫淵玉重刻
마을의 이름이 왜 왕대(王垈)라고 하는 가? 옛날에 임금께서 난을 피해 와 이곳에 머무르셨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대(垈)는 모후산의 중심 줄기 아래에 있는데 대의 위에는 깃발을 꽂은 암석이 있고.
대의 남쪽에는 상동(相洞)이 있으며, 대의 아래쪽에는 수청교가 있고, 또 수청교 아래에는
유경(留京) 동 명이 또한 있었다.
왕대라는 이름과 유적이 서로 부합하여 믿을 만 한데 나라와 지방의 역사책들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지 않아 안타깝다. 우리 선조 부정공(副正公 )께서 고려시대에
남쪽으로 내려오신 처음에 이곳을 자손들이 대대로 기거할 곳으로 정하시었다. 마을 중간
산록의 유좌 지는
우리 5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묻힌 곳이므로 그 소중하기가 특별하다.
나와 종형제 간인 조진충이
종손으로서 수 칸의 초가집을 지었다. 매년 봄가을 성묘하러 다니는 길에 종친들이 모여
친족 간의 결속을 다지고 조상의 뜻을 빛내며 후손들에게도 이어지게 하고자 함이니 무릇
후손 된 자들은 힘쓸지어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갑자년(1864) 3월 아무 개날에 후손 조진구가 쓰다
단기 4288년(1955년) 을미년 6월 아무개 날에 증손이 연옥이 다시 새기다.
정헌님의 글에서 발췌
침류대
침류란 본디 돌을 베고 잔다는 뜻으로 물가에서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라 한다
풍청
부드럽고 맑게 부는 바람이라는 뜻인데 바위에 새긴 풍청은 마을 이름이다
위에 설명을 보니 왕대마을이 옛날에는 수청. 풍청. 월청. 3개 마을을 삼청이라 했는데
바로 이 마을이 풍청마를 표지석이다
적석탑
돌을 모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남근형 바위를 세워 놓는다. 벅수는 적석 위에 올려놓는 남근형
바위만을 뜻하나 일반적으로 동구밖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 놓은 것이다.
이 적석탑은 밑에는 큼직한 돌을 원추형으로 쌓아 위에 벅수를 꽃았다.
사람 키로 두세 길이나 되는 대형탑이다. 적석탑은 지역수호신, 묘역수호신, 풍요기원신, 이정표
등의 기능을 하고 있다. 유래는 신석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선돌(Menhir), 즉
거석(巨石) 문화에서 찾는다.
적석탑의 규모는 높이 280cm, 너비 700cm이며 돌이 5톤 정도 소요되었다.
위쪽으로 100m 지점 논 가운데 석석탑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초연정에 가려면 주암호를 건너야 되는데 나오면서 건너는 신평교에서 바라본 주암호 풍경
이제 서재필박사 기념공원으로 간다
눈이 내리는날엔...겨울에 듣는 팝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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