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한제국 시절 관료, 정치인, 언론인.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군의관, 의학자. 해부학자,
시인, 소설가, 혁명가, 교육인, 병리전문의, 작가, 상인, 중추원 고문, 농상공부 고문, 학부대신 서리,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1882년 문과 증광시에 최연소 합격한 후 20세던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찬밥 대우를 받자 다시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한국에 있던 친지들이 대부분 죽고 자신도 역모자가 되어 귀국조차 할 수 없던 상황에서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해 의대 강사가 되어 강의까지 했으나 그만두고
의사로 개업한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연루자들에 대한 징계가 풀리자 박영효의 제안으로
미국 시민으로서 귀국했다
고종과 미국을 연결해 줬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민중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회 설립과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고종의 반대로 실패한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독립협회도 해산된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미국에서 언론 활동으로 3.1 운동을
지원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 군정의 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 일부에서 대통령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 출마하지 못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다 1951년 86세에
사망했다.
서재필은 나라를 바꾸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심지어는 집안이 멸문까지 당했으며 본인도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미국인이 되어야만 했던 것으로 자신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조선에게 절대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모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정체성이나 공과 등에 대한 업적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 인간으로만
보자면 비극적인 가정사부터 다사다난했던 인생사를 보면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고 고생 꽤나 한 인물이기는
했다. 어록을 봐도 알 수 있듯 최소한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 개혁적인 사상을 가졌던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1864년 1월 7일 전라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가내마을)에 있던
외가 성주 이 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아버지 서광효(徐光孝, 1830. 8. 22.~1884. 11. 2.)와 어머니
성주 이씨 이조이(李召史, 1830~1885. 1. 12.) 사이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인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가면서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으로 이주하였다. 양부 서광하의 처가는 신 안동 김 씨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의 후손이었는데, 이때문에 서광하는 세도가문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이 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참판 김성근(金聲根, 1835. 3. 19.~1919. 10. 3.)의 집에
갔다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1879년 왕이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을 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그동안에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동대문 밖 절에 모여 일본 책들을 돌려보면서 개화에 대한 꿈을 꿨다.
1882년(고종 19) 3월 22일 열린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고 권지(權知:수습관원) 승문원 부정자
(承文院副正字:종 9품), 훈련원 부봉사(訓練院副奉事:정 9품) 등을 지내다, 일본으로 유학해 1884년 토야마
소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귀국 후 신식 사관학교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 예하
조련국의 사관장(士官長)으로서 생도들을 양성하지만, 얼마 안 있어 온건개화파의 방해로 훈련소가
폐지되고 해방영이 설치되면서 그 역시 보직이 없어진다.
- 결국 그를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당시 20세였던
- 서재필은 생도들을 인솔하여 무사로서 활약했고 병조 참판 겸 육군 정령관(正領官)에 임명되었다.
- 그러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 아내 광산 김 씨(1862~1885. 1. 12.)는 자살하고 하나 있던 2살 난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는다.
- 양가(養家)와 친가(親家) 가릴 것 없이, 양아버지 서광하는 갑신정변 직후 서재필을 파양 했으나
- 결국 연좌제를 당하여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으며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유일한이 1926년에 설립한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는 서재필이 조각가인 둘째 딸에게 의뢰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유일한이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서재필이 주었다고 한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徐載春, 1859. 3. 4.~1888. 8. 14.)은 감옥에 갇혔다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형 서재형은 관군에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생모 성주 이 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미 조기숙 서광래에 양자로 갔던 첫째 남동생 서재창
역시 도주하다 붙잡혀 처형당했으며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경도로 피신한다.
화를 피한 사람들은 아직 어렸던 둘째 남동생 서재우(徐載雨, 1869. 9. 5.~1905. 1. 24.)와 맏형 서재춘의
외아들 서영석(徐英錫, 1879. 2. 5.~1966. 2. 29.) 서재창의 유복자 서◯석등이 있었고 결혼한 누나들도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제물포로 도망가 조선을 빠져나가려고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들이 일본인 선장의 배에 탑승하여 숨어있을 때 관리들과 당시 조선에서 근무
중이던 독일 출신 외교관 묄렌도르프가 제물포항으로 급습하여 갑신정변의 역적들인 세 사람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서재필은 이때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일본인 선장이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하게
할 수 없다"라고 둘러대며 그들을 돌려보내 서재필은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본으로 망명하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들은 일본에서도 찬밥 대우를 받는다.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면서 자신들이 토사구팽 당한 것을 알게 된 서재필은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했으며 김옥균은 청나라로 건너갔다가 이후 암살당한다.
미국에 갔을 초기만 해도 서재필은 당연히 영어를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단한 생활을 하였다.
초반에는 부족한 영어 실력 때문에 일자리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어 전단지를 붙이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흑인을 상대로 한 노예 제도가 폐지된 지 고작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도 그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는데 심지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 짐칸으로까지
밀려날 정도로 멸시당했다. 함께 미국에 건너온 박영효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고 서광범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에서 지내다가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리면서 서재필은 홀로
미국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조선에서는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그를 감시하고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신변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1886년 행운이 따랐는지 존 홀렌백(John Welles Hollenback)이라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 시(Wilkes Barre)로 이주한 뒤 이곳에 있는 해리힐먼
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역사, 철학, 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서재필은 마땅히 지낼 거처가 없어 교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교장의 장인이
갓 퇴임한 법관이었고, 그와 함께 살며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 사회 제도에 대해 학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서재필은 수학,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서 우등상을 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서재필박사의 생애
해리힐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재필은 코코란 단과대학에서 물리학과를 다녔다.
그러던 중 홀렌백은 서재필에게 라파예트 칼리지로 옮겨 전공 공부를 마친 뒤 프린스턴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파송 갈 것을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홀레뱃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지원해주지 않겠다고 통첩을 했으나 서재필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홀렌백과 결별하게 된 서재필은 라파예트 칼리지의 한 교수와 인연이 닿아 계속
지원을 받으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 D.C.로 이주하기 위해 라파예트 칼리지를 자퇴했다.
890년 1월 19일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은 해리 힐먼
고등학교 시절에도 나타남을 볼 때 시민권 획득 시에도 사용했다. 한편 워싱턴 D.C. 의 칼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서재필은 1894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딴다는
견해도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코란 자연과학 대학을 세균학
전공으로 졸업하고 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하다가 이후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얼마 안 가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한다. 서재필의 세 번째 결혼이었다
뮤리얼 암스트롱은 미국에서 명망 있는 정치가문의 여식이었는데, 제임스 뷰캐넌 전 미국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 전쟁 당시 철도 우편국을 창설했던 미국의 정치인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
(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이었다. 둘은 가정교사로 만나 연애를 시작, 워싱턴 D.C. 교외에 있는
커버넌트 교회에서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참고로 뮤리엘 집안에서는 서재필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결혼을 결심한 뮤리엘의 마음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뮤리엘이 결혼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서재필이 밤길에 불량배에게 희롱당하던 뮤리엘 암스트롱을
구해줬기 때문이었다고. 미국 대통령 가문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미국 주류
언론의 조명을 꽤 받았다고 한다. 이후 뮤리엘은 1896년 스테파니 제이슨(Stephanie Jaisohn Boyd)을,
1898년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을 낳았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사 면허도 따고 결혼하여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리는 동안 조선에서는 외세의
힘에 밀리는 조정으로 인해 국가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10여 년간 생활하며 미국 사회와
민주주의적 정치 시스템에 큰 동경을 가지게 된 서재필은 조선의 상황을 보며 미국식 민주제와 민권 사상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던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부
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부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그 후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같은 해 12월 26일,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옛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서재필은 원래 사면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신변의 위협과 고종과 민 씨 척족, 조선 조정 대한 환멸에 귀국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그를 데리고 오기 위해 주미조선공사관의 방을 빌려주고 식비를 제공하며 그를
설득했다. 결정적으로 서재필이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워싱턴 D.C. 를 방문 중이던 갑신정변을 함께
일으킨 박영효가 그를 방문하여 설득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다시 한번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신변 문제 때문에 서재필은 미국에서부터 사설 경호원을
고용하여 귀국길 내내 대동하도록 했다.
귀국 직후인 1896년 1월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 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서재필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국내 최초의 민간
대중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다.
특히 논설을 중요시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하려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당시 서재필은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며행동하며
철저히 미국인으로서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서재필은 조선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조선인들을 "you, korean"이라고 표현하거나 왕 앞에서도 신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었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하였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재필은 결국 미국으로 추방된다.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서재필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 중추원에는 관료 추천권이
없었지만, 최초의 의제가 새로운 관료를 추천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박영효, 서재필 등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학을 떼던 인물들이 여럿 선출된다. 그리고 이는 중추원과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와 미국-스페인 전쟁에 미합중국 육군 군의관으로 참가하였다.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하여 다시 기고문 등을 실으면서 외교적 선전 활동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 고문을 한동안 맡기도 했다.
1919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고, 16일에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며 대한독립을 외쳤던 ‘한인독립대회
(Korean Inpendence League)’를 주도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시는 군악대를 지원했다.
1921년 3월 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서재필 박사(Dr. Philip Jaisohn, M.D.)는 3·1 운동 2주년을 기념하는
'한인연합대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기미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낭독했다.
이 행사에는 미국 동부지역 한인들과 함께 현지 미국인들까지 무려 1,300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윌리엄 E. 메이슨(일리노이) 당시 연방하원의원도 자리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국의 주류 언론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는데,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튿날 '메이슨 의원,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맹비난하다'(Mason raps Japan for piracy in Korea)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메이슨 의원이 일본의
침략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25년은 호놀룰루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규탄하기도 했다.
그의 독립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사비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1926년에는 완전히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이후 1942년 3월 1일 워싱턴에서 동포들이 개최한 태평양 전쟁 전승 기원 기념식에 참가했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 육군 징병검사관으로 활동하여 미 국회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의 초청으로 고문 자격으로 입국했다.
안창호파 최능진이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을 벌인 것처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이었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었다. 본인도 대통령 자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정세와 초고령 문제로 인해서 출마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라디오 방송 연설을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무효표가 되긴 했지만 1표를 얻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재필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에 한결 편하게 오르는 기회가 된다.
그래도 보은 격으로 김규식에 이어 조선적십자사 2대 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곧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51년 사망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되었다.
사망 후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된 서재필과 그의 아내 유골은 돌봐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묘지 관리인이 주인 없는 유골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수십 년째 방치되고 있었다.
이를 1983년 현지 교민 장익태 씨와 서재필 친형의 증손자인 서동성 씨가 사비 2천 달러를 들여 좀 더 좋은
납골당으로 이장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으로 활동하느라 모아둔 재산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으며,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둘째
딸도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살만큼 궁핍했다고 한다. 생전에 딸을 둘 두었으나 장녀와는 사이가 소원했는지
장녀에게서 난 손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연락이 두절되었고, 차녀는 독신으로 사망해 사실상 혈육이 없는
것과 같았다. 차녀 뮤리엘은 사망하기 전 서동성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달라”며 울면서
부탁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윗글은 나무위키에서 발췌
그 시절 통일되지 않은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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